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번 제주 여행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좀 있다. 삼별초가 제주를 마지막 거점으로 삼았음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또 하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일제가 제주를 그들의 마지막 항전지로 삼고자 군 기지를 건설하고 비행장을 만들어 상해를 폭격하고 카미카제를 훈련시켰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역시, 제주는 내게 미지의 섬이 맞다.

아침나절, 일본군이 파놓은 17개의 진지동굴을 보고 난 직후 알뜨르 들판으로 향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보리밭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었고, 밭 사이로 심심찮게 보이는 제주 특유의 무덤 '산담'은 봄꽃에 뒤덮여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밭 가운데 음울하게 엎드려 있는 낡은 갈색의 격납고가 눈에 드러났다. 격납고의 모양은 인간의 눈과 닮았다. 이곳에 비행장을 세우느라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죽어간 사람들을 지금도 기억하는 듯, 그 눈들은 전쟁의 침울한 광기를 기억하며 녹슬어 가고 있었다.

카미카제도 훈련했다는 알뜨르 비행장,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았다.
▲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모습 카미카제도 훈련했다는 알뜨르 비행장,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았다.
ⓒ 장윤선

관련사진보기


알뜨르는 이번 여행지에서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준 곳이다. 만약, 이 너른 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격납고 근처에 울타리라도 몇 개 박혀 있었더라면 이곳의 인상이 그처럼 강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격납고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세워둔 표지판이 아니었더라면, 이곳의 격납고들이 그저 창고가 아닌가 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관광지도 아니고 명승지도 아닌 곳. 알뜨르는 무심하게, 담담하게 맨 얼굴 그대로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며 세월호 속보 소식을 계속 실어 나른다. 우리는 이제 삼별초의 마지막 접전지였던, 그러니까 그들 삼별초가 죽음을 맞이했던 항파두리를 향한다. 고려시대라는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죽음의 내음새도 훨씬 옅어진 느낌이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 우리는 세월호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여기, 애월이라는 데가 원래 물이 많았어요. 게다가 저기, 저쪽에 보면 바다가 훤히 보이지? 저기로 들어오는 배는 여기서 다 볼 수 있었으니까, 지리적으로 유리했지요. 여기서 약 2년 넘게 살림도 하고 농사도 하면서 살았어요. 그러다 함덕 쪽으로 여몽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다 죽었어요. 몰살이지 몰살. 그때 대장하던 김통정이는 붉은 오름이라고, 저쪽에 있는 오름에서 자살했다지. 그렇게 끝난 거야."

"제주에선 '에이 저 몽고놈 같은' 이런 말도 했소"

그들의 죽음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문화해설사 할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나 어릴 적만 해도 제주에서 나쁜 놈이라 하면 '에이 저 몽고놈 같은' 뭐 이런 말도 했었소. 원 지배 때 일본이랑 주변 섬으로 많이들 도망갔다고 합디다. 큐슈나 오키나와 같은 데에는 아직도 제주도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도 하던데…. 4·3 때도 배 타고 일본으로 많이 도망갔지요."

<신증 동국여지승람>이나 <탐라지>에도 삼별초 전멸 이후 원나라의 제주 지배에 대한 기록이 여기저기 나와 있다. 원나라의 관리가 토착민이나 우리 측 관리를 학대하고 살해한 사건이 있는가 하면 제주 민중이 원의 관리에 대항해 일으킨 난도 있었다. 100여 년이나 지속된 지배였다.

"여기까지 와서 결국은 다 몰살 당했으니 삼별초도 한이 많은 사람들이지요. 나라가 결딴나니까 이런 사람들이 생겨난 건데, 그래도 이렇게 항쟁지라도 꾸며 놓으니까 우리가 몽고에 맹렬히 대항했다는 것도 알게 되는 거 아닙니까. "

옆에서 아들 녀석은 계속 실망의 탄식을 쏟아냈다. 드라마 <기황후>에 푹 빠져 있던 녀석인지라 원나라와 관계된 것에 관심이 많았건만, 막상 와서 보니 유적지가 너무 썰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유적지보다 더 재미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말이요, 뭍에서 구경도 못하던 공책이니 연필이니 지우개니 그런 걸 많이 쓰고 살았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4·3 때나 그 전에 일본에 갔던 사람들이 집으로 돈도 부쳐주고 물건도 보내주고 그랬거든요. 그때는 우리가 정말 형편없이 살았으니까, 일제 물건들을 보내주면 큰 도움이 됐어요.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도 거기서 허드렛일 하면서 힘들게 살았다고 하더구만요."

우리는 할아버지가 따준 하귤(여름에 먹는 귤)을 손에 쥐고 삼별초가 쌓았다는 토성 쪽으로 내려갔다. 귤은 껍질이 두껍고, 엄청나게 시고, 알이 굵고 탱글거렸다. 설탕물을 넣은 듯 달디 단 시장의 귤과는 달랐다. 마치, 삶이란 이렇게 힘든 것이라고, 관광지 제주의 다른 속살을 까보면 이토록 슬프고 힘든 죽음들이 있었다고, 하귤이 그렇게 속삭여 주는 것 같았다.

잘 죽을 수 있는 나라, 잘 죽을 수 있는 권리

"내 몸은 내가 잘 아느니라. 이젠 다 살았다. 밥 다 먹고 숭늉을 마실 차례인 거지. 배불러 숟갈을 놓았는데, 또 밥을 먹을 수는 없는 법이여."

현기영의 다큐멘터리적 소설 <쇠와 살>에서,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흔둘의 할머니 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한 생애의 자연스러운 죽음은 아쉽고 슬프기는 하지만 지는 해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한스럽지도 않다. 아름다운 죽임이다.

아주 먼 과거에 이 애월 바닷가에서 몰살 당한 삼별초의 죽음은 세월이 지나면서 잊혀지는 듯 잊혀지지 않고 있다. 4·3의 죽음은 침묵을 강요당하다가 결국 터져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수많은 국민들이 억울하게 희생 당한 세월호 승객들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잠겨 있다.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에는 분노가 따른다. 그 분노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항파두리로 가는 길에 방문한 섯알오름 학살지. 더 많은 이들이 기억하길 바라며.
▲ 섯알 오름 4.3 학살지 현장 항파두리로 가는 길에 방문한 섯알오름 학살지. 더 많은 이들이 기억하길 바라며.
ⓒ 장윤선

관련사진보기


알뜨르와 너븐숭이에서 만난 죽음도 아주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용운의 시구처럼, 타다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격이다. 억울하고 한 맺힌 죽음으로 삶을 마감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현재 살아가는 이들의 가슴과 입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은 아주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

아니, 그들의 죽음을 말함으로써, 오히려 살아 있는 우리들의 삶은 더 단단해지고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더 잘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한 맺힌 죽음들 앞에서, 머리 숙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미안합니다. 억울한 죽음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주 여행은 4월 20일부터 26일까지 했습니다.



태그:#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