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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오래된 경전 <사자의 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은 모두 고귀하게 태어난 자들이니, 죽음을 통해 허공처럼 많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게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라고. 죽음으로 삶을 잘 마무리 하고 죽음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라고.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죽음을 꿈꾸기에 힘든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제주도 여행을 앞두고 내게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살펴보니 더욱 그러했다. 여행 전에 만난 친정엄마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고, 하나뿐인 동생은 암 선고를 받고 수술과 방사선 치료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몸도 마음도 쇠약해진 엄마의 우울한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저 봄꽃들은 뭐가 좋다고 저리 펴대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지고 말 텐데."

2014년 봄은 몹시도 우울하다.
▲ 제주의 봄꽃은 화사하건만. 2014년 봄은 몹시도 우울하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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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근심불 위에 기름을 부은 격인 세월호 사건은 2014년 봄날을 처참한 죽음의 진창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신랑과 아들과 함께 떠난 가족 여행길이건만, 마냥 즐겁고 들떠 있을 수가 없었다. 택시 안에서도, 공항에서도 온통 실종자 몇 명, 사망자 몇 명, 앞으로의 구조 계획과 책임자 처벌 등 죽음에 연이은 소식들뿐이었다.

늙고 병드는 개인사도 감당하기 힘든 터에, 이 나라 전체가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살아 있는 그날까지 생생하게 목숨을 지켜낼 것인가. 생(生)이 생(生)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하게 떠오르는 답이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죽음, 억울한 죽음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죽음이라는 테마를 안고 제주로 갔다.

미지의 섬, 제주

어릴 때, 제주도 여행은 우리 모두의 로망이었다. 제주도에는 물에 가라앉지 않는 구멍 난 돌이 있고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열대 과일이 열린다고 했다. 뭍에서 보기 힘든 전복, 감귤은 물론이요 옥돔이라던가 고등어회, 갈치회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먹거리가 있다고 했다. 광어는 줘도 안 먹으며, 동네 시장에서도 귀한 돔을 흔히 볼 수 있다고 들었다. 어린 우리들은 아무도 타 보지 못한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그런 로망이 남아서인지, 동생은 암에 걸리고도 제주도 타령이었다.

"입맛만 돌아오면 내가 꼭 제주도 가서 다금바리를 먹어봐야지. 내가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 이 피 같은 돈을 병원에 다 쓰게 생겼잖아. 낫기만 해봐. 제주도 물고기는 내가 다 먹는다!"

그렇게, 퍼덕이는 바닷물고기같이 싱싱하고 낭만적이기만 했던 제주가 나에게 다른 의미로 각인된 것은 당연히(?) 4·3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번 제주여행을 앞두고, 신랑은 이런 말을 했다.

"대학 가기 전에도 광주항쟁은 광주사태니 폭동이니 해서 귀동냥이라도 해봤지. 그런데 4·3은 대입 전까진 전혀 몰랐어. 그렇게 많이 죽었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몰랐다는 게 더 신기해."

억울한 죽음이 더 많이 기억되도록...
▲ 너븐숭이 앞에서 기원하는 평화. 억울한 죽음이 더 많이 기억되도록...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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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우리 사회를 둘러싼 죽음의 그림자 때문인지 몰라도, 이번 제주 여행을 준비하며, 나는 그 어느 곳보다도 4·3 유적지를 가보고 싶었다. 한라산 등반도 하고 우도에서 자전거도 타고 싶었지만 가장 가고 싶은 곳은 4·3 유적지였다. 너븐숭이와 섯알 오름에서 죽어간 사람들, 다랑쉬 오름의 작은 굴에서 학살당하고 정방폭포 옆의 바닷가에 시체로 던져진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번 여행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뿐이랴. 미지의 섬 제주는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일제가 지어놓은 알뜨르 비행장과 붉은 오름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한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도 가고 싶었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들의 죽음을 떠올려야만 생(生)이 생생(生生)해질 것 같았다.

수능시험과 <순이 삼촌>

제주에는 어디에서나 4·3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조천리 너븐숭이는 내게 좀 더 특별한 곳이다. 아마도 소설 <순이 삼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한때 입도 뻥끗 못했던 4·3문제를 다룬 기념비적 작품 <순이 삼촌>과 기타 4·3을 다룬 소설들이 수능 대비 학력평가에 나온 것은 2000년대 초반 무렵이다. 고2 학력평가에 나왔던 이 작품을, 아이들은 어려워했다. 문제는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너븐숭이 학살 때 가족을 잃고 겨우 살아남았으나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 순이 삼촌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주 간단하게 발췌되어 있고, 다음과 같은 문제가 딸려 있었다.

문제 : 다음 보기를 보고 윗글의 내용과 관련 없는 것을 고르시오.

기자 :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작가 : 30여 년 전 제주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 ①
기자 : 지금까지 다루어지지 않았던 제주도 4ㆍ3사건을 굳이 소설의 제재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작가 : 우리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지나간 역사를 잊곤 합니다. 저는 그 잊혀진 역사적 사실을 작품화하고 싶었습니다. …… ②
기자 : 작품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구상하는 데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무엇입니까?
작가 :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③
기자 : 이 작품을 형상화하는 데 특별히 고려한 점은 무엇입니까?
작가 : 당시 제주도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을 통해서 시대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싶었습니다. …… ④
기자 :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작가 : 지나간 역사는 현재와 이어져 있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아픔이 계속되고 있다는 거죠. …… ⑤

<순이삼촌>기념비 앞에서.
▲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 <순이삼촌>기념비 앞에서.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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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3번이었다. 발췌된 지문만 보면 "이런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의 실체 규명"은 이 작품의 중심이 아니라고 할 수는 있으나, 실제 작품 전체를 읽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작품 전체에는 물론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에 대한 사실적 재현과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 대하나 비판까지 다양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70년대에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점들을 수업시간에 다 일러줄 수는 없는 일이다. 진도 나가기에도 바쁜 판에 그 복잡다단한 단독선거 과정과 좌우대립 문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국사가 필수과목이 아닌 현재의 2, 3학년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역사에 무지한 아이들이 많다. 그날도 문제만 풀고 대충 넘어가려는 녀석들을 설득하여 결국은 <순이 삼촌> 전문을 읽는 숙제를 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서도 여전히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누군가 말했다.

"저는 처음에 집단 학살이라고 해서 당연히 일제 때 일어난 일인 줄 알았어요."

이 점은 초등학생인 아들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놈들이 다 죽인 거지? 그치?"
"아니야.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그렇게 된 거야."
"왜?"
"말하자면 길어. 아니, 설명하기 힘들어."

그나마 학력평가에 일부분이라도 <순이 삼촌>이 실린 것이 다행이다. 학력평가에서라도 언급이 되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이 사건을 모르고 사는 아이들도 있지 않았을까. 국가에 의한 죽음, 국가가 살리지 못한 죽음,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살지 못한 사람들. 과거와 현재의 죽음에 직선이 그어진다.

덧붙이는 글 | 제주 여행은 4월 20일부터 26일까지 했습니다.



태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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