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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사진엔 슬픈 반전이 있다.
▲ 땡 잡았다! 하지만 이 사진엔 슬픈 반전이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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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심봤다!"

고대하던 누군가와 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 도전 골든벨을 울린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호흡부터 가라앉히고 차분히 살펴본다.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겨울 하늘 아래 영롱한 빛을 내뿜는 그것은…, 아, 필시 돈이었다. 다시 한 번 "나이스!" 동전은 1m 간격으로 흩어져 있었다. 총 5개. 언뜻 보니 100엔짜리 세 개에 5엔짜리·1엔짜리 한 개다.

며칠 전, 겨울 자전거 여행을 위한 캠핑용품을 구입하기 위해 100엔 숍에 들른 적이 있다. 그곳에서 먹음직스러운 컵라면이 100엔(세금 5% 별도)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걸 기억해냈다. 뜻밖의 행운에 거친 포말을 만들어 내는 겨울 바닷바람으로 얼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 어느 새 얼굴에는 봄꽃이 피었다. 다음 도시에서 100엔 숍이 나오면 컵라면 3개를 사 먹는 거다!

경사 급한 해변과 거친 포말, 세찬 파도 소리는 낭만보단 공포에 더 어울리는 풍경.
▲ 북해도의 텅 빈 겨울 바다 경사 급한 해변과 거친 포말, 세찬 파도 소리는 낭만보단 공포에 더 어울리는 풍경.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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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를 것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도로,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북해도의 추위, 토마코마이에서 하코다테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페달을 돌려 전진하기엔 쉬이 지치는 구간이다. 그렇다고 업 앤 다운힐의 즐거움을 위해 마운틴 로드를 달릴 수는 없었다. 막차로 겨울잠을 자려는 허기진 곰들의 출몰 위험과 제대로 된 겨울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발목까지 쌓인 눈 소식에 조용히 객기를 거뒀다.

오전에 맑았던 푸른 하늘은 오후가 되자 두터운 먹구름을 끌어와 간헐적으로 묵직한 눈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퇴근길 회사원들의 온기로 북적북적한 라멘 가게에 들어가 고단한 하루들 틈에 섞여 미소라멘 한 그릇 들이키고픈 날씨다. 11월에는 오후 4시 30분, 12월에는 오후 4시에 일몰이 찾아오니 잠자리를 생각하면 서둘러야 한다. 다행히 오늘은 부담이 덜하다. 조그만 항구도시 무로란에 지인을 통해 현지 교회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동전 몇 개가 남긴 환상... 땅만 보고 달렸네

자전거 여행자에겐 마음으로 사모해도 주머니를 생각하면 사치스런 곳이다. 입맛만 다시고 자나쳐야만 했다.
▲ 해산물 레스토랑 자전거 여행자에겐 마음으로 사모해도 주머니를 생각하면 사치스런 곳이다. 입맛만 다시고 자나쳐야만 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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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카이도는 목장으로도 유명하다. 텍사스의 목장을 꿈꾸며 이곳으로 이주해 온 일본 청년도 있다.
▲ 말 훗카이도는 목장으로도 유명하다. 텍사스의 목장을 꿈꾸며 이곳으로 이주해 온 일본 청년도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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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고맙고 반가운 마음이 추위를 뚫고 달리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다가 동전들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이때부터 욕심에 눈이 멀었던 모양이다. 늘상 허기진 자전거 여행자가 라면 세 개 값을 거저 얻었으니 요행수에 마음을 그만 홀딱 뺏기고 말았다. 이후로는 풍경을 감상하는 여유가 사치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땅바닥에 온 시신경을 집중했다. 별안간 시야에서 바다도, 산도, 북해도의 삶들도 사라져 버렸다.

욕망이 지나쳐 광기가 됐는지 모른다. 해가 넘어갈 때까지 꺾일 줄 모르는 고집으로 나만의 보물찾기는 계속됐다. 하지만 운은 이미 다한 듯했다. 더 이상의 환희는 없었다.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고 테이블에 앉았다가 마지막 칩마저 잃어버린 도박자의 심정이었다랄까. 자전거는 어느 새 목적지에 날 데려다줬지만, 기억은 무엇 하나 내게 남겨준 게 없었다.

불과 두어 시간만에 발등 높이까지 쌓인 눈. 겨울바람은 참 추웠다.
▲ 훗카이도의 눈 불과 두어 시간만에 발등 높이까지 쌓인 눈. 겨울바람은 참 추웠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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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훗카이도의 날 선 바람이다. 오후 4시부터 굳기 시작한 몸은 오후 6시가 되자 살아있는 송장 신세가 됐다. 눈발을 헤치며 수소문 끝에 겨우 만난 후지야마 상 부부가 얼른 들어오라며 반갑게 맞는다. 그녀는 가끔 한국인을 접대해 본 적이 있다며 완벽하게 구현된 비빔밥을 내줬다. 한 수저 떠보니 나그네를 울리는 맛의 감동이 있다. 밥에 꿀을 비볐는지, 침샘에서 꿀이 샘솟는지 허기진 뒤에 먹는 밥이 그렇게 맛날 수가 없다. 식사를 마치고 차 한 잔 하는 시간에 나는 불현 듯 후지마야 부부에게 오늘의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싶었다.

"문 상, 그러니까 자전거를 타다가 돈을 주웠단 말씀이죠? 그것 참 흥미롭네요."
"그렇죠! 맞바람에 힘들어서 고개를 숙였는데 글쎄 동전들이 보이지 뭐에요? 자, 이것 좀 보세요."

후지야마 상은 주머니에게 꺼낸 동전을 보고 다시 로봇 장난감을 선물로 받은 사내아이처럼 들떠 있는 내 표정을 보더니 살짝 미간을 모았다.

"어쩌나요? 이 돈의 정체는 바로..."

이렇게 완벽하게 재현하다니! 정성이 들어가서인지 한국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진심으로 더 맛있었다.
▲ 비빔밥 이렇게 완벽하게 재현하다니! 정성이 들어가서인지 한국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진심으로 더 맛있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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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문 상, 이걸 어쩌나요? 유감스럽게도 이건 일본 돈이 아니에요."
"네? 돈이 아니라니요?"
"음, 동전 두 개는 일본 돈이 맞아요. 하지만 나머지 세 개는 아니에요. 동전들이 그럴 듯 해보이죠? 훗카이도가 관광지역이라 많은 카지노 시설들이 있어요. 안 됐지만 이건 '빠징코' 게임 머니에요."

속 쓰려 헛웃음이 나오는 나를 달래준다며 후지야마 상은 너털웃음을 짓고서는 온천에 데려갔다. 따뜻한 염수에 몸을 푹 담그고 탐스레 익은 노란 달빛을 보고서야 경솔했던 하루에 대한 반성이 가슴에 올라왔다. 라이딩을 하면서 동전을 줍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동전을 줍고서는 삿된 마음으로 얼룩져 하루 여행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 동전이 쓸모없는 경우가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환상적이었던 내 컵라면은 그렇게 환상 속으로 사라졌다.

덧붙이는 글 | http://blog.naver.com/miracle_mate
현재 위치 : 아키타



태그:#일본여행, #자전거여행,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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