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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횡단 때에 중국에서.
▲ 켄의 자전거 세계일주 아시아 횡단 때에 중국에서.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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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 온도가 40도를 넘은지는 이미 오래다. 다행히 오후에 잠깐 소나기가 내린다. 시원한 물벼락에 푹푹 찌는 더위가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잠시 뒤 가눌 수 없는 끈적끈적함이 엄습해 온다. 높은 습도 때문에 온 몸이 물을 흠뻑 빨아들인 솜처럼 무거워졌다. 옷이 하얗게 일도록 땀까지 배출되었으니 어떤 곳은 쓰리기도 했다. 게다가 산모기까지 극성이다. 정신없이 달라붙는 모기떼로부터 제대로 방어할 수도 없을뿐더러 아침에 챙겨두었던 마실 물까지 거의 떨어졌다. 길은 이미 진흙 밭이 되었고, 동시에 자전거도 애물단지가 되었다. 대항력이 없는 일본산 혈액체가 만만했는지 모기떼는 더욱 더 극성이다. 이런 낭패감이 없다. 총체적 난국이다. 나는 지쳤고, 한시 바삐 쉴 곳이 필요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와 행복지수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아이러니함을 이해하기엔 아직 낯이 설었다. 평소에는 주로 와일드 캠핑을 하지만 오늘은 심신이 고달픈 나에게 보상을 해주어야 마땅하다. 말이 숙소지 룸은 하나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도 외우기 쉽지 않은 작은 도시는 외국인 방랑객이 올만한 여행지가 아니다. 방은 오랫동안 손님을 받지 않은 듯 빛바래 있었고, 창틀엔 훅 불면 어지럽게 날리는 먼지가 수북했다. 그래도 씻을 수 있고, 편히 쉴 공간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짐을 풀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저녁은 숙소 근처 로컬 식당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기분 좋게 샤워하고 밖에 나오니 웬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고가 난건가, 생각하며 갈아 신은 슬리퍼를 끌고 이동했다. 그런데 숲 속의 샘처럼 마음을 끄는 깊고 맑은 눈동자들의 초점이 유독 한 곳에 집중적으로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맙소사, 그들은 좀비처럼 멍하니 서서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대관절 무슨 일인거야?

북미 대륙 횡단 중에 사우스 다코다에서.
▲ 켄의 자전거 세계일주 북미 대륙 횡단 중에 사우스 다코다에서.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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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한 대가에 비해 저녁 메뉴는 평범하다. 날리는 밥과 질감이 썩 좋지 않은 고기, 그리고 야채볶음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의 단출한 식단이다. 아마도 맥주가 없었다면 밥을 넘기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라이딩이 끝난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의 여유가 자전거 세계일주를 결심하게끔 만든 동기부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는데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보니 50여명은 너끈히 되어 보였다. 환영인파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으나 마냥 적극적으로 대하기도 데면데면했다. 나는 피곤했고, 또 다음에 일어날 상황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눈이 마주치면 웃는 낯을 보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내가 반응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인파는 점점 더 모여들었고, 급기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나를 보기 위해 사람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봐, 밀지 마. 내가 먼저 선점한 자리야!""뒤에서 미는데 난들 어떡하나?"

처음에는 애써 질서를 잡아보려던 식당 주인의 표정도 점점 붉게 상기되어 갔다. 때론 호통도 쳐보고, 애걸도 해보았지만 군중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내가 한 수저 들 때마다 연신 환호하거나 웃으며 자기네들끼리 떠들어댔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영업이 불가능해진 주인이 참을 수 없었는지 대뜸 내게로 와서 하소연하듯 큰소리를 쳤다.

"당신 때문에 손님을 받을 수가 없소. 미안하지만 어서 나가주시오!"

아마도 궁여지책이었으리라.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급히 식사를 마치고 재빨리 숙소로 돌아왔다. 맥주 한 잔을 더하고 싶었지만 나에게서 좀처럼 뗄 줄 모르는 수많은 시선들은 생각보다 꽤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노곤해진 몸을 침대에 뉘이며 쉬려는 찰나, 창문 밖에서 유난히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창으로 다가가 덕지덕지 때가 낀 유리창을 보았을 때, 맙소사, 망했다는 생각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유럽 대륙 횡단 중에 오스트리아에서.
▲ 켄의 자전거 세계일주 유럽 대륙 횡단 중에 오스트리아에서.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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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머문 방은 길 가에 있었고 때문에 창 하나를 두고 밖과 소통할 수 있는 열악한 프라이버시 보호지대였다. 더구나 그 창이란 게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듬성듬성 여러 겹으로 포개어져 있는 구조다. 유리 층마다 보이는 모기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빈틈은 나를 하염없이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사이로 마주치는 수많은 눈빛들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창 앞을 서성거리는데 몇몇은 까치발을 들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상하건대 그들은 밤늦게까지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나와 시선이 닿으면 환호를 하며 박수를 쳤다. 나는 '그만하라'는 의미로 손을 들어 점잖게 흔들었는데 반응은 더욱 열광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사에 답한 걸로 오해하며 깔깔깔 웃더니 몹시도 행복해 했다. 반면 자유가 박탈당한 기분에 나는 솔직히 불편함을 느꼈다. 별다른 대응은 하지 않았다. 따져봐야 나에게 득이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일기를 쓰고는 얼른 불을 끄고 누웠다. 불을 켤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지니 불을 켜면 밖에서 안이 다 보이는 것이다. 낡은 커튼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떠날 줄 몰랐고, 동네 다른 공터는 죄다 놔둔 채 유독 내 방 앞에서 떠들어 댔다. 다행히 나를 부르는 이들은 없었다.

켄과 딸 아키, 그의 아내 슈샤. 모든 대륙을 여행한 부부는 이제 마지막 남은 남미 여행을 꿈꾸고 있다.
▲ 켄의 가족 켄과 딸 아키, 그의 아내 슈샤. 모든 대륙을 여행한 부부는 이제 마지막 남은 남미 여행을 꿈꾸고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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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피곤함에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밖에서 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 창으로 가니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질렀다.

"봐, 그가 일어났어!"
"하이, 굿모닝!"
"저기요, 나 좀 봐 봐요. 나하고도 인사해요, 하이!"

고작 7시도 되지 않은 시각에 이렇게 활기찰 수 있다니. 마을은 이미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장면이 펼쳐졌다. 아침에는 어젯밤보다 더 많은 100명 정도가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인 나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의 몸싸움은 어제보다 더 격렬해져 있었다. 서로 밀고 밀리는 혼잡 속에 그들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이름을 크게 외쳤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가 누구에게 가장 먼저 인사할지 내기하자!"
"이봐, 좀 비키라고. 나 저 사람과 얘기할 테니까!"
"쪽지에다 싸인 좀 해주세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 격앙되어 설전을 벌였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던 중에, 자전거 짐 정리가 끝난 나는 밖으로 나왔다. 숙소를 빠져나온 내 모습에 사람들의 다툼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홍해바다가 갈라지듯 조용히 양쪽으로 나뉘어 길을 내주었다. 나는 다만 과잉관심이 부담스러운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떠난다는 걸 감지했던 걸까? 분위기는 상당히 차분해져 있었다. 다들 순박한 표정으로 쭈뼛쭈뼛 미소만 보이는 것이었다. 내가 쑥스럽게 인사를 하자 그들도 머뭇거리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 몇몇은 분명 어젯밤에도 보았던 인물이다.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해 늘 남들과 거리를 두었던 나다. 때문에 극성스럽게 살가운 현지인들을 대하는 게 매우 서투르다. 그들은 분명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 앞에서 요란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사라질 때까지 수줍음 가득한 표정으로 조용히 인사를 전한다. 일본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누군가를 향한 무조건적인 관심, 더없이 순수했기에 내가 감당할 수 없었던, 2003년의 방글라데시의 맑은 웃음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켄의 자전거 세계일주 : '2001.8.8. - '2005. 9.25, 26개국 주행거리 55753.4km>

덧붙이는 글 | http://blog.naver.com/miracle_mate
삿포로에서 초대해 준 켄의 이야기를 듣고 작성한 1인칭 시점의 여행기.



태그:#세계일주, #일본여행,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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