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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병! 잘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스스로 그만 두고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훗날의 국제나그네는 그렇게 어머니 곁을 처음으로 떠났다. 떠돌이 병의 초기 증세요 수십 년간 질기게 이어지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에 치유할 수 없는 대못을 쾅쾅 박은 불효의 시작이었다. 

말이 없고 어른 말이라면 꼬박꼬박 잘 듣는, 착하기만 했던 아들이 스스로 학교를 그만 둘 줄은 상상도 못하셨으리라. 태어나서 한번도 '엄니' 곁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셋째 놈이 어머니의 눈물을 뿌리치고 뼈도 아직 채 여물지 않은 17세의 나이에 철근을 자르는 공사장 중노동판에 뛰어들어 전국을 떠돌줄은 상상조차 못했으리라.

1970년대 중반, 당시만 해도 서울 여의도는 이제 막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허허 벌판이었다. 나그네는 그때 여의도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철근을 잘랐다. 임예진이 최초의 고교생 하이틴스타로서 한창 주가를 날리던 때였다.

어린 나그네는 중구 정동의 MBC문화방송에 동아일보를 배달하면서 태어날 때부터 화려했을 이른바 '스타'들과 그들에게 꾀죄죄한 몰골로 껌을 팔고 있는 어린 계집아이들을 자주 목격하고는 했다. 나그네는 밤이면 종종 공원 벤치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쪽잠을 자면서 스스로 자문을 하고는 했다.

'화려한 조명 가운데의 스타들은 무엇이며 그들에게 때낀 손을 내미는 어린 아이들은 또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가. 10년 후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사춘기 소년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 사진은 예전 기사에 써 먹었는지라 재탕하기도 뭐해서 어설프지만 적당히 그려보았다. 어머니! 부디 강녕하소서.
▲ 길신을 따라가기에 앞서 어머니께 하직인사 하는 나그네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 사진은 예전 기사에 써 먹었는지라 재탕하기도 뭐해서 어설프지만 적당히 그려보았다. 어머니! 부디 강녕하소서.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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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는 오월 광주를 최전방 155마일 전선에서 군복무할 때 겪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온 후배들에게 이해할 수도 없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참상을 듣고 제대 후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내 귀를 의심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세상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판단으로 제대 후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세상을 다 얻은양 기뻐하셨다. 겉돌기만 했던 자식이 '이젠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겠구나' 하셨을 게다.

훗날, 이인모 선생과 함께 한 이른바 '남북고위급회담 진입사건'으로 사랑하던 아들이 처음으로 '전과자'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당신의 가슴을 쥐어 뜯으시며 울부짖었다.

"어이구우! 내아들아. 차라리 니가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너를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면 니가 이렇게 창살 안에 갇혀서 에미 애간장을 태우지 않았을 텐디 이를 어쩔 거나. 배운게 한이로구나. 법이 없어도 살 내자식이 전과자라니, 이를 어째야 할 거나, 아이구우우…."

자식을 내리사랑하는 우리나라 전형적인 어머니들의 표본이요, 당시 칠순에 근접해 있던 어머니에게서 민가협 어머니들과 이소선 여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나그네의 너무 큰 과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그네가 만기 출소한 날, 부산에서 먼 길을 에돌아 안양교도소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꼬박 뜬 눈으로 새우신 어머니! 아직 여명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교도소 정문 앞에서 차가운 새벽비를 맞고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나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시던   어머니의 처연한 모습을 나그네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들아! 당장 집으로 가자. 이 에미가 징역살이 하느라고 축이 났을 니 몸보신 하라구 한약도 좀 지어놨다. 그리구 집에서 에미가 해 주는 밥 묵으면서 큰 형이 있는 아르헨티나로 갈 준비를 하거라. 니가 이곳을 떠나는 것이 이 에미에게 효도하는 길이다. 이젠 니도 장가도 가고 형님과 사업하면서 돈도 벌어야지. 형님이 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았단다. 니는 아르헨티나에서 형 말만 잘 들으면 만사 형통이다."

나그네가 동네 나그네에서 국제 나그네로 첫 발을 디디기 위해 정든 조국산하를 마지막으로 떠나던 날, 어머니는 못내 미덥지가 않은 듯 다시 한 번 단도리를 하셨다.

"아들아! 부디 형 말 잘 듣으려무나, 이 에미의 간절한 부탁이다. 그리구 아르헨티나에서 니가 장가 갈 때 느그 아부지랑 이 에미가 며느리와 니를 보러 가마. 에미 말 허투루 듣지 말구 명심하거래이."

그랬다. 눈물을 흩뿌리시며 불효막심한 아들의 장도를 염려하고 염려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새겨 듣고 이젠 정말 형님과 오손도손 사업하면서 여우 같은 마누라 만나 토끼 같은 자식 낳아 진짜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돈도 좀 벌어 자식들을 위해 너덧 시간 밖에 잠을 못 주무시며 부드럽던 손이 솥뚜껑 손이 되도록 헌신하신 어머니께 효도도 좀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그네는 애시당초 효도와는 거리가 먼 불효자의 길을 걸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 났나 보다.

국제 길신의 여정을 따라 안데스를 넘고

아르헨티나에서 한창 일에 열중해 있을 때 이인모 선생으로부터 죽기 전에 나를 만나고 싶다는 엽서가 날아왔다. 나그네는 당시 비록 한국 땅은 아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표가 찍힌 엽서가 날아올 줄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이인모 선생이 송환되기 전부터 이 선생과 평양의 이인모 선생 가족과의 중계 역할을 했던 간호사 출신 독일 교포가 평양의 이인모 선생 집을 방문해서 이인모 선생의 의향을 이북의 우표가 붙은 엽서로 나그네에게 전달한 것이다.

엽서를 접한 형님은 노발대발했다. 혹시나 결행할지도 모를 대형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형님의 애정이 깃든 노여움이었다고 나그네는 지금도 믿고 싶다. 나그네는 장고에 들어갔다. 이인모 선생의 사상과 이념이 아닌 신념을 존경해서 맺은 인연으로 2년 가까운 징역도 기꺼이 살았던 나, 우리들의 마지막 헤어짐은 너무나 비참했었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를 보고 싶단다. 어찌 할 것인가. 이른바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 이적단체'인 북한을 당국의 허가 없이 방문한다는 것은 아무리 자의로 인도주의적인 행동이라고 해석한다고 해도 분단체제 하에서의 실정법상으로는 개인에게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금단의 행위였다.

형님의 노발대발도, 그동안 쌓아온 나름의 기득권(?)도 포기할 수 있다. 나는 젊고 건강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선생은 그렇지 못하다. 마지막 헤어질 때도 저승 꽃이 만발했던 양반이다. 한 번만 보고 오자. 그러나 나그네가 떠나 올 때 부디 형님 말 잘 들으라며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던 어머니의 슬픈 모습은 나그네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락가락 하는 자신에게 끝 간데 없는 실망과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 나그네는 거의 10kg이 빠지는 장고 끝에 또 다시 불효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체 게바라의 발자취를 역으로 거슬러 험준한 안데스를 넘고 독일을 거쳐 금단의 땅 평양에서 이인모 선생을 만나 뼈만 앙상한 그의 손을 잡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왔다. 그리고 독일에서의 망명 이후 오갈 데 없는 국제 나그네 되어 '동가식 서가숙' 할 때도 감히 어머니께 안부 전화 한 통 드리지 못했다. 국제 전화할 돈도 없었지만, 두려웠던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이!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빵 한 조각 사먹을 돈이 없어서 하루 한 끼로 때우던 어느 날, 그동안 아끼고 아꼈던 푼돈으로 아르헨티나를 떠난 후 처음으로 어머니께 국제전화를 걸었을 때 차가운 전화선으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슬프디 슬픈 목소리는 아직도 나그네의 가슴 한 곳에 못이 되어 단단히 박혀 있다. 어머니는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아들의 상황을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아이구우.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객지에서 어찌 지내냐. 지발 끼니 거르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묵어야 한다. 에미는 잘 모르것다만, 좋은 시상 오거들랑 다시 만자자꾸나. 내 아들아, 부디 건강하거라. 에미가 바라는 것은 니가 건강하게 잘 있다가 다시 만나는 것이다. 어이구우! 장가도 못 보내고, 어이구우우!"

나그네는 그날, 아무도 반기는 이 없는 이녘의 외진 공원 벤치에 앉아 깡소주를 마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 속에 사무쳐 오는 갈라진 이세상에….'

방랑은 아직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이 '보헤미아의 진주'라는 희망을 찾아 떠나는 희망의 여정이라는 길신의 유혹(?)에 홀려 길신 들린 나그네 되어 세상의 주변부를 방랑했던 젊은 날의 초상들, 언제부터인가 독일 마인 강변의 한적한 곳에 똬리를 틀고 눌러 앉은 이후로 고달프고 간고한 육신의 방랑은 슬그머니 내려 놓았다. 그러나 나그네의 여정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어머니의 가슴에 서리서리 아픔을 쌓아 놓으면서 대못을 쾅쾅 박아왔던 지난한 세월도 어언 20년이 가까워 온다.

국제나그네의 공개적 '커밍아웃'

18년 동안 단 한번도 그리운 어머니를 뵙지 못했다. 요즘 나그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안부 전화다. 올해 아버지는 여든 여덟이요, 어머니도 그 뒤를 바짝 따르고 계신다. 어머니는 목소리만으로는 아직 건강하신 듯싶다. 연세에 비해 훨씬 젊게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접하면 순간 안심을 하다가도 저녁 무렵에는 어김없이 긴장을 한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네들의 내일 일을 어찌 알겠는가. 아버지는 그 연세에 걸맞은 지병이 많은 듯하다. 구체적으로 나그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말씀은 안 하시지만, 나그네도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지천명의 나이를 진작에 훌쩍 넘었음에랴. 그리고 '눈치가 백단'임을 스스로 자부(?)하고 있음에랴.

전화상으로 들려 오는 어머니의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끼니 거르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묵거라. 아들아!"

아! 변한 게 있다.

"아들아! 언제 돌아오느냐. 지발, 돌아 오그라. 시상도 좋아졌다는디, 니는 왜 못 돌아 오느냐. 죽기 전에 느그 세 식구 오손도손 사는 것을 보고 잡다. 돌아오니라. 내 아들아."

그리고 거짓말 같은 사실이 하나 더 추가된다. 미국의 형님이 교통사고로 타계한 이후로 지금까지 어머니와 나그네는 매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안부 전화를 함에도 불구하고 형님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실상의 기둥이었던 큰아들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고 하늘이 내려앉은 절망감 속에서도 나그네가 충격을 받을까 염려되어 형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단다.

나그네도 형님이 이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하물며 어머니야 말해 무엇하랴. 어머니는 큰아들의 주검을 부정하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그네는 이심전심의 합의하에 애써 큰아들과 큰형 이야기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나그네도 오랜 방랑 생활을 내려놓고 싶다. '땅나라 소풍' 끝나시기 전에 돌아가서 가난하더라도 두 분 모시고 그동안의 불효를 용서 받고 싶다. 분단 비극의 극히 작은 한 조각을 감내하며 세상의 주변부에서 나그네 되어 살아온 나, 야속한 세월은 오래 전에 나그네의 청춘을 앗아가 버렸지만 회한은 있을지언정 치열했던 시대의 한 부분을 비껴가지 않았다는 것에 후회는 없다. 다만 오랜 세월 불효자식을 애타게 기다려온 아버지와 어머니께 죄송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끝으로 나그네를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분들께 읍소하며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합니다. 나그네가 오랜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내나라 내 땅'으로 돌아가 그동안의 불효를 조금이라도 속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제가 제일 불효자 입니다' 응모글 입니다.



태그:#어머니의 눈물, #불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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