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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즐겨 읽는 일간지에서 간만에 반가운 기사를 만났다. '10대 미혼모들 "학교에서 다시 공부하고 싶어요"'라는 표제의 기사가 여성 섹션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문에 여성 관련 기사가 흔치 않은지라 냉큼 읽어내려가다 보니 이게 웬걸, 내용도 마음에 쏙 들었다.

성인 이전의 '미혼모'들은 출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이들 중의 또 다수가 학교로 다시 돌아가 교육과정을 끝마치고 직업활동에도 나서고 싶어 한단다. 이들이 공부를 계속 하려는 이유도 설문조사를 이용해 잘 드러내 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싶어서', '학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 때문에' 등의 이유는 그간 '미혼모'들에게 가혹했던 우리 사회의 차가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결혼 이전의 청소년이 출산하는 것을 더 이상 범죄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까지 담고 있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사람들이 하도 쉬쉬하니까 말할 수 없었던 그녀들의 속마음, 이제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될 때가 도래하는 것 같다. 쌍수 들어 반길 일은 아니더라도, 나름 용기있는 그녀들에게 그동안 우리 사회가 보냈던 것은 '정신머리 없는 인간' 따위의 모멸 찬 말이었다.

그녀들이 '감히' 공부하고 싶은 욕구를 분출하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니 화는 더욱 치밀어 오른다. 선심 쓰듯 '미혼모 문제, 우리 사회가 안고 가야 한다'는 말도 사절이다. '미혼모'의 삶을 선택한 것 자체는 문제다 아니다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녀들이 아이를 양육하며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안전망이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제 '바른' 눈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일이 가능해진 모양이다. 아니, 적어도 시작은 한 모양이다. 신문지상의 '개념 찬' 기사들이 여성을 존중하는 나의 마음에 소소한 즐거움을 가져다주니 말이다. 이렇게 하나, 둘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전달해주면서 신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가능케해주지 않겠는가.

별로 '날라리' 같지 않은 내 친구들 중에도 '미혼모'들이 몇 있다. 많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들었을 때 대경실색할 만큼 희귀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들이 '어쩔 수 없이', '대책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미혼모'의 삶을 택한 것은 절대 아니다. 봄바람이 불면 예쁜 꽃치마든 후줄근한 '추리닝'이든 입고 나들이를 가는데, 단지 귀엽고 작은 꼬마와 동행한다는 것이 다른 여인들과 다르다.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그녀들에게 '미혼모'라는 낙인은 가당치 않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친구들도 반길 이 기사를 따로 오려내어 보관해두었다. 아차, 그런데 그저 고이 넣어두자니 조금 걸리는 게 있다. 이 반갑고 기특한 기사에 계속 거슬리는 표현이 바로 '미혼모'였다.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사실을 전달해주는 신문에 고마움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기엔 나의 기대가 조금 과한 가보다. '이왕이면 '미혼모'가 아니라 '비혼모'라 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하는 아쉬운 마음이 남아 기어이 다된 칭찬에 볼멘소리를 쏟아붓게 된다. 이건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가 사람의 사고를 일정부분 결정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에서 비롯된 '사회적 인식'의 문제다.

한국말은 '아'다르고 '어'다르다 한다. 아직은 생소할지언정, 듣는 비혼모 입장에서야 '미'혼모보다 '비'혼모가 낫지 않겠는가. 그녀들이 결혼을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결혼 '못'한 여자 따위의 사회적 낙인도 호칭의 변화와 함께 날려버린다는 의미도 함께. 신문(新聞)에게서 신문(新問)의 역할까지 기대해서 죄송하긴 하지만. 역시, 되잖은 볼멘소리인 건가?


태그:#여성, #비혼모, #미혼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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