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임여부를 막론하고, 주말 내 기대했던 쌍용차 노사 협상

 

컨테이너 안, 교섭장에서 수차례나 협상이 진행되었다 했다. 몇 시간이 지나면 휴지기가 찾아오고, 또 몇 시간이 지나면 협상이 재개되었단다. 근래 들어 어떤 협상이 이보다 더 긴장되었던가. 신문이 배달되지 않는 일요일, 가슴 졸이며 하루 종일 월요일 신문을 기대했다. 이미 70여일을 끌어온 쌍용자동차 노사 간 갈등은 세간의 우려를 뒤로하고 해소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8월 3일 현재, 사측은 유급휴직 신청자 수를 두고 노조와 지난한 싸움을 벌이던 끝에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이대로 쌍용차는 파산하고야 마는가.

 

합의할 수 없는 양측의 논리

 

현재 사측이 주장하는 '구조조정 관련 인원 확정' 원칙과 노조가 요구하는 '유동적, 노동자 선택에 따른 인원조정'은 근본적으로 논의의 지점이 다르다. 회사 입장에서야 "채권단이 요구하는 회생방안을 충족시키고 추후 경영 일반에 가해질 부담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구조조정을 확실히 해 두고 싶을 것이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최대한 빨리 회사를 정상화 할 방법을 찾고 있다.

 

반면 노조는 노동자의 희생 없이 약간의 비용으로 노동자 전체를 끌어안고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원하는 사람들은 유급휴직을 신청하고 희망퇴직 또한 다시 신청 받으며, 소속된 노동자 모두를 고용상태로 두는 데에는 7~80억 정도의 비용밖에 들지 않는다. 그간 공장의 손실은 공장 가동 재개와 동시에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의 주장은 이율배반적이다. "떠안고 가야하는 예비인력이 몇 명인가, 이들이 가진 파업권과 경영일반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새로운 투자자가 나타나겠는가?"라는 사측의 실질명목과 "아무도 희생되지 않고 함께 가야 한다"는 노조의 도덕적 명목이 과연 양립할 수 있겠나. 양측의 논리는 합의의 지점을 형성하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여론도 잘잘못을 수이 판단하지 못하고 있음은 당연지사. 다수의 노동자는 물론이요, 그 가족들까지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슬프고 애통한 마음이 듬과 동시에 사태의 끝이 보이지 않아 더욱 답답할 따름이다. 

 

전체 노동자가 고용상태에 있다 한들 새로운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쌍용차는 고사한다. 슬그머니 '노조 기피증'을 들어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려는 보도들도 등장하고 있다. 반면 쌍용차가 살아남는다 한들 무고한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생계를 이어나가지 못할 바에는 회사가 유명무실하다. 상황이 이러하니 누군가가 해고되고 남은 자리에서 노-사간 공생이 이루어질리 없다. 게다가 사정이 어려워질 때마다 해고 노동자는 계속 발생하지 않겠나.

 

쌍용차의 문제? 구조적인 문제?

 

이번 사태는 쌍용차 개별 사업장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르면 쌍용차는 파산해야 한다. 취약해진 회사 구조 탓에 상하이차에 매각된 것이 2005년, 그리고 2008년 상하이차는 불법적인 기술이전 의혹을 남기고 쌍용차를 포기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경쟁력이 소진된 쌍용차는 시장에서 도태되어야 한다. 정부는 기업의 생존경쟁에 굳이 공적자금을 투입할 필요가 없고, 새로운 투자자는 쌍용차의 매력도에 따라 투자여부를 선택하면 그만이다. 또한 회사가 망했으니 노동자가 실직하는 것은 당연하다. 맞나?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하 사회 구성원들이 처한 딜레마다. 현재의 시장구조는 기업과 시장의 역학관계만 고려하도록 설계되었을 뿐, 그 안의 '사람'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회생을 돕거나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실업자를 부양한다 한들 제 2, 제 3의 쌍용차는 등장하게 마련이다. 시장 내 경쟁은 항상 패자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한계와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의심해봐야 한다. 게다가 이때, 패배의 결과는 특히나 노동자에게 가학적이다.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이 70여일이나 공장 안에서 끼니도 거른채 투쟁을 할 때에는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바로 지금, 방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한 사람의 열 걸음이냐, 열 사람의 한 걸음이냐를 따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단연, 우리사회는 쌍용자동차 노조의 편에 서야 한다. 회사와 노조의 싸움에서 노조가 한 번이라도 강자였던 적이 있는가를 고려하면 이는 자명하다. 아무리 양측 모두가 엄청난 진통을 겪고 있다 한들 회사는 그들의 한 쪽 손에 '공권력'을 쥐고 있고 노조는 한 쪽 손에 '목숨'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하루 삼시세끼를 제대로 다 먹지 못하고 경찰에 둘러싸여 외로운 투쟁을 진행중이다. 공장 밖의 천막에서 "안에 계신 분들 생각하면 이정도는 고생도 아니"라고 말한다고 할 정도라 한다. 노동자들은 가장 마지막에 내 놓아야 할 '생존의 가치'를 내 놓고 있다. 시시비비를 가릴 때가 아니다. 모두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때다.

 

쌍용차 사태는 시장논리의 맹점에 따라 예견되어 왔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당사자 간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나. 쌍용자동차 사태는 이제 우리 사회가 품어내야 할 공공의 문제가 됐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빠른 협상을 위해 자칫 노동자에게 '희생의 미덕'을 종용하게 될까 우려하는 바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은 다수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생명을 손에 든 자가 이를 놓아버리기 전에 시민사회와 정부의 관심 하에 쌍용차 노사의 협상은 재개되어야 한다. 그 어떤 '합법적인 폭력' 없이 노사 모두가 상생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제 3자의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한다.


태그:#쌍용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