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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하 새사연)의 대학생모임은 2009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새로운 사회의 민주주의, 그리고 한국 현대사>를 주제로 다섯 차례의 세미나를 가질 계획이다. 새사연 대학생 모임에 모인 사람들은 "시청 앞 광장에서 유모차를 끌고 나와도 안심하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이야기할 수 있"고 "인터넷에서, 방송에서 정권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했다고 해서 감옥에 가지 않"으며, "전경들의 방패에 지나가는 시민의 갈비뼈가 부스러지지 않는 나라"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보며 새사연 대학생모임은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이들은 해방 이후 한국사를 '민주주의'라는 큰 줄기에 근거하여 살펴보고 '새로운 사회의 민주주의는 어떤 것일까'를 고민해보려 시도한다. 평범한 대학생들이 진단하는 '파행'의 근본 원인과 2009년 이후의 민주주의, 그 첫 번째 세미나가 지난 11일 새사연 사무실에서 열렸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대학생 모임 <여름방학 세미나>
1. 7월 11일 [한국 현대사 정리1] 박정희 정권 이전
세부주제 :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국민직접정치의 경험, 친일파의 권력 장악 과정, 반민특위 사건
2. 7월 18일 [한국 현대사 정리2] 박정희 정권 이후
3. 8월 1일 [우리 민주주의의 현재] 정당 정치, 의회 정치, 대의민주주의
4. 8월 8일 [우리 민주주의의 대안] 새로운 사회의 민주주의
5. 8월 15일 [2008 촛불 항쟁과 앞으로의 전망]

홍대 새사연 사무실에서 열린 '새사연 대학생모임 <여름방학 세미나>'
 홍대 새사연 사무실에서 열린 '새사연 대학생모임 <여름방학 세미나>'
ⓒ 새사연 대학생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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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 수연(새사연 경제센터 연구원)/ 성진(성균관대 국문과 04)/ 도년(새사연 운영위원)/ 하나(새사연 회원)/ 민우(성균관대 국문과 03)/ 재희(연세대 경제학과 02)/ 연진(고려대 생명과학과 05)/ 미선(고려대 생명과학과 06)/ 민수(고려대 경영학과 02)/ 성환(숭실대 컴퓨터학부 09)

발제문 중에서...

지금의 20대를 부르는 말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슬픈 말은 '트라우마 세대'라는 말이다. 80년대에 출생한 이 세대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한 이후에 태어나 직접 승리의 경험을 가져본 적이 없고, 97년 외환위기 당시 부모세대의 경제적 무기력함을 목격하면서 '성공하려면 공부해라'는 독촉을 받은, 입시지옥 세대이기도 하단다. (중략) 고사한 학생운동, 취업압박을 정면으로 대하면서 '괜히 나서면 다친다'는 생각을 내재화 한 무기력한 세대... (중략) ...하지만 2009년 지금, 나는 20대에 붙여진 '트라우마 세대'라는 말을 거부한다. 작년 초여름, 청계광장에 모인 사람들과 지난 5월, 광화문에 모여 가는 이를 배웅하던 사람들을 봤기 때문이다... (중략) ...어떤 세대든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획득하는 데에 무기력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 과거의 경험을 되짚어보려 한다. 총과 최루탄으로 위협받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역사와 신기하리만치 이상한 권력자들을 분석해야 한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알 수 있으리라.

#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와 인민위원회
해방 직후 좌·우 막론하고 국가 재건을 위해 모두가 협력했던 것이 건준이었다면 인민위원회는 전국에 걸쳐 지역단위로 형성된 민주적 조직이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건준과 인민위원회의 경험을 바라보며 현재의 파행적 민주주의가 아닌, 사람들이 직접 국정을 결정할 수 있는 국가가 가능하지 않을까?

건준과 인민위원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

연진 : 처음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접했을 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인민위원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럼 혹시 빨갱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공부를 더 해보면서 용어가 생소할 뿐이지 이것이 좌익이나 우익으로 나눌만한 성격이 아니며 민주주의와 국민에 의한 정치, 대동단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이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이들의 노력을 좌절시킨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는 것이 안타깝다.

성진 : 우리들에게는 '인민'이란 말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수업 과제로 여운형에 대한 레포트를 쓴 적이 있는데, 용어에 거부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좌우합작을 주장했던 것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미선 : 학교 수업에서 김대중 정부는 행정적 기술이 없어서 원하는 바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은 적이 있다. 건준에서도 행정적 기술의 아쉬움을 느낀다. 친일파나 여타 이기적 세력은 어떻게든 목표를 이루어내고 마는데, 진짜 애국세력은 열정은 높지만 실현능력은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직접 민주주의, 실패의 이유?

도년 : 좌우합작 자체가 양날의 칼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분단을 앞둔 상황에서 친일잔재 청산에 대한 입장은 좌우간의 극명한 쟁점이었을 것이다. 민족주의 우파도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고, 이 문제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좌우 합작이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중앙과 지방간의 괴리 역시 문제다. 당시와 같이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는 조직력을 발휘할 수 없다. 지도부의 좌우합작이라는 타협적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여운형 선생 조차도 "지난 날의 아픈 것을 묻어두자, 쓸데없이 거리를 돌아다니지 말아라"라고 말하며 민중들의 자생적 에너지를 막은 것 같다. 결과적으로 건준은 사상과 조직을 모두 놓쳤다 볼 수 있다.

연진 : 좌우합작에서 합의할 수 없던 지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충분한 논의가 있었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충분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은 것이 바로 미군이다. 또한 도년 선배의 지적은 지도부의 역량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둔 것이라 본다. 개별 단위의 자발적 조직들이 서로 연계할 역량이 있었다면 건준의 성공은 가능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9월 6일에 인공이 수립되었는데, 이는 해방 후 20일 만에 국가를 세운 것이다. 미군이 들어온다는 통보를 받은 직후다. 이는 외세에 의해 겪을 위기를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 국가를 세우려던 것으로 보인다.

민수 : 지방의 각 지역에까지 인민위원회 같은 조직이 건설된 동기는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거창한 목표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었겠나? 일제 강점기 끝에서 무기력했던 민중들이 갑자기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토지개혁 등의 실제적 문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중앙 지도부는 민중들의 열망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 때 좌우합작에 집착하는 대신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을 빨리 했었다면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 같다.

도년 : 건준 실패의 가장 큰 이유가 미군정 때문이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다만 인민위원회가 인기를 얻을 수 있고, 여운형이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남한사회 좌파가 민중들의 삶에 대한 열망, 즉 토지개혁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가장 부합하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인민위원회 강령에 의하면 남녀평등,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 등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이 빠진 좌우합작을 시도한 것은 전술적 오류다. 민족주의 우파는 친일문제에 대해 단호하지 못했음. 김구 선생도 "친일파를 민족으로서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중 입장에서 이 부분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재희 : 발언 하나로 친일파 문제에 소극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제 생각에는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권력을 만들어내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야 하는 상황적 요인이 실패의 원인일 것 같다. 건준은 권력을 만들어 내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좌우합작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도년 : 단순히 권력을 만들고,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누구를 위한 권력,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피착취계급으로부터 나오는 국가권력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단순히 권력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는 않다.

성환 : 미군정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건준과 인공은 조급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건준일 때에는 치안유지와 건국에 중점을 두면서 정치적 색이 없었으나 우파를 흡수하지 못한 인공은 좌파적 색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이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민우 : 좌우합작의 오류에 대해 평가할 때, 실패했다고 평가하기보다는 이런 노력이 있었다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이런 역사조차 없었다면 더 안타까웠을 것이다. 좌우합작을 평가하는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주 교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서중석 지음
 주 교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서중석 지음
ⓒ 새사연 대학생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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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해결되지 않은 과제, 친일청산
대중적 지지를 받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형성하고 있던 인민위원회가 단기간에 붕괴된 것은 미군의 남한진입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게다가 남한의 정치행정조직을 장악하려는 미국과 살길을 필사적으로 모색하는 친일파는 손을 잡기에 너무도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권력을 다시금 독차지한 친일파들은 친일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사태를 무마시키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친일파 처단하자는 놈들은 모두 빨갱이!'라며 핏대를 세웠다. 게다가 이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교체당한 적이 없으니, 어찌 보면 한국 정치의 뿌리 깊은 부패의 근원이자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오가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친일파는?

수연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8월 15일에 친일인명사전이 나오는데, 그 작업의 일환으로 제일 처음 발표된 친일파 예정 명단이 3090명이었고 그 명단에 박정희와 사립대학교 초대 총장, 장․차관, 문화계인물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특히 예술계에 있는 사람들에 관심이 간다. 다른 분야보다 많이 안 알려지지 않았나? 특히 홍난파, 현제명 등 교과서에 나오는 사람들의 친일행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 때 불려진 '희망의 나라'라는 노래는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을 찬양하는 친일음악이다. (모두 경악) 이들은 본격적 친일 행위 이전부터 민족음악계량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음악이 서양음악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퍼뜨렸다. 미술가 중에서는 운보 김기창을 꼽고 싶은데 그는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다. 자신이 뛰어났기 때문에 친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김경승이라는 조각가 역시 친일파인데 김구, 안창호, 안중근, 국회 내 이순신, 세종대왕 등 국가 기념적 동상의 대부분을 세웠으며 국가에서 문화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예술가들의 친일 행위가 다른 것보다 악질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조선인들의 희망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여전히 이들의 작품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심지어 국회에도 친일파의 작품이 들어가 있는 현실아닌가.

민수 : 친일파 중에서도 현재 사회에서까지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다. 이들의 친일행위는 현재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알게 된 백선엽이라는 사람은 미국인들에게도 한국군대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의 선배이며 한국군에서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다. 박정희를 인정하고 살려준 인물, 이런 사람이 아직까지 공식적인 외교 채널을 통해서 인정을 받는 것이 씁쓸하다.

미선 : 인촌 김성수 역시 친일파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친일행적은 표면적인 것일 뿐 실제로는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친일행적과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들을 모두 교과서에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조건 친일파라고 배척하기보다는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연진 : '레드 콤플렉스'라는 책에서 조선, 동아일보를 친일파로 꼽은 손석춘 새사연원장님의 주장에 동감한다. 이들은 해방 후 친일행위에 대해서 반성해야 했다. 전 국민을 호도했던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 반성을 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를 민족지로 여기고 있다. 친일행적이 너무 컸기 때문에 민중들의 여론이 두려워서, 해방 이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신속하게 복간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

재희 : 저는 유인촌 장관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인 유치진, 유치환을 조사했다. 유치진은 연극계의 거두이고, 유치환은 유명한 시인. 유인촌 장관이 자기 할아버지가 친일이라는 잘못된 행적을 저질렀다고 제대로 이야기하고 반성할까?

민우 : 유치진, 유치환에 대한 논쟁은 여전하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근대문학은 이광수에서 시작한다. 그는 근대문학의 기틀을 모두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친일행위를 했다. 최남선의 북계문화론 역시 마찬가지다. 친일은 친일일 뿐. 혹여 그들의 친일에 악질적인 면이 없었다 해도 친일행위 그 자체는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하나 : 하지만 그 시대의 말단 공무원, 순사, 교사는 친일파로 분류해서는 안된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정말 대단한 의지를 가졌던 사람들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만을 있을지언정 당시 사회에 순응해서 살았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어쩔 수 없었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너그러움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도년 :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 선생 역시 친일파였다 하더라. 애국가를 만든 작가마저 친일파인 사회다. 이는 우리의 굴절된 근대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개개인의 친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악질적 친일은 자본인 것 같다.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서 착취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에 조응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자본의 세계적 팽창 과정에서 친일도 자연스럽게 등장했다고 본다. 자본가 이익에 기반하는 우익 민족주의자는 어찌 보면 친일파와 종이 한 장 차이다.

친일파의 기준과 처단에 대한 기준

수연 : 모든 친일 행위를 평가함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본인 스스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필수적이다.

연진 : 나는 한홍구 선생의 시각에 찬성한다. 남을 해하면서까지 자신의 영달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진짜 악질 친일파 아닌가. 또한 현재까지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평가가 필요하다.

민우 : 민중은 제외. 일제하에서 살았건, 이승만, 박정희 아래에서 살았건 민중의 처지는 마찬가지다. 친일파라는 말보다 일제부역세력이라고 명확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본다.

도년 : 친일여부에 대해서 관료적 위치가 얼마나 높았느냐 혹은 낮았느냐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수연 : 반민특위가 세웠던 친일파의 기준에는 작위를 받거나 중추원이나 군경 등의 기관에서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 독립운동 방해했던 사람들이 포함된다.

민우 : 친일파로 꼽히기도 하면서 민족자본가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김성수나 박흥식 등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고 하더라.

수연 : 현정은, 홍라희씨의 할아버지도 독립자금을 지원했다고도 하고 친일을 했다고도 하는 등 평가가 엇갈리긴 한다.

미선 : 때문에 친일파라고 규정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행적 자체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한게 아닌가.

#3. 4.19혁명
미국의 등장과 친'미'세력의 득세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10여 년간의 침묵을 겪었다. 그래서 터져 나온 것이 4·19혁명이다. 4·19는 '투표'라는 절차 민주주의의 핵심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분노를 대변한다. 그러나 4·19에 대해서는 생각할 것이 많다. 이승만이 하야하기는 했지만 뒤이어 들어선 정권은 사람들의 열망을 충족시켜주기에 부족한 것이 많았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희대의 독재자 박정희가 등장했다. 4·19를 온전히 성공했다 말할 수 있을까?

4.19가 미완의 혁명이며, 학생과 지식인만의 혁명이라는 평에 대해서

연진 : 보면서 놀랐던 점이 초․중․고등학생이 먼저 시위에 나서면서 대학생들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4.19를 지식인만의 혁명이라고 볼 수는 없다.

민우 : 4.19가 미완의 혁명이라 해도 4.19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 것이다. 4.19의 경험이 80년 5.18 민주화항쟁,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재희 : 이승만 하야의 결정적 요인은 미군일지도 모른다.

성진 : 미군이 만약 이승만을 밀어줬다면 4.19는 실패하지 않았을까?

하나 : 설령 미군이 밀어줘서 4·19가 실패했을지라도 민중이 정부에 분노를 표출하며 뛰쳐나왔다는 점에서 의미는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도년 : 미국이 이승만의 하야를 방관했던 이유는 독재타도를 넘어서 체제변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해석도 있다.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는데 정부가 버티게 되면 민중의 요구가 더욱 확대될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 아닐까. 게다가 이승만의 반일주의로 인해 미국이 추진하려 하는 한․미․일 동맹이 어려웠다고 한다.

수연 : 4.19가 학생들의 혁명이었다는 비판에 대해 4.19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었던 부산대학교 이대우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겉으로 보기에 4.19는 학생 혁명이지만 본질은 농민혁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쟁과 원조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국가는 농산물을 저가로 공급했고, 당연히 농민들의 빈곤은 다른 계층보다 심화되었다. 불만이 쌓이고 있던 상태에서 이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해왔다. 이들이 이농 1세대인데, 이들의 자식들이 이농2세대다. 바로 이 이농2세대가 4.19의 주역이라 불리는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농촌을 떠나 온, 한 때 농민이었던 부모들의 불만과 원망을 잘 알고 있기에 문제의식이 형성되어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이렇듯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불만이 농촌과 도시 빈민가에 가득 찬 상태에서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가 분출된 것이 4.19다.

4.19를 통해서 우리가 얻은 것

하나 : 미완의 혁명인 이유는 혁명 이후가 잘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이후를 수습하기 위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개혁세력이 분출된 민중의 열망에 부흥해 스스로 조직화, 정치세력화 해야 했는데, 전쟁 이후였던 탓에 이를 이룰만한 역량이 없었다고 본다.

연진 : 지금도 같은 상황 아닌가.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의 퇴행에 분노해서 정권에 저항한다고 해도 그 이후의 무언가가 없다면 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다. 때문에 우리도 이후의 상황을 준비해야 한다. 대안과 대안세력이 있어야 한다.

민우 : 지금도 죽 쒀서 개 줄판.

재희 : MB가 그만둬도 박근혜 의원이 대통령?

성진 : 목표는 대통령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그림이어야 할 것이다.

하나 : 베네수엘라 혁명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인터뷰를 본 적 있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차베스를 영웅이 아니라 혁명에서 하나의 역할 즉, '정부 침투'라는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쉽게 말해 민중이 차베스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영웅이 필요하다기보다는 결집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까.

민수 : 국가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제대로 민의를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건준 역시 국가에 대해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주의에 대한 경계도 필요하다.

연진 :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차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 : 누군가의 죽음으로 혁명이 촉발되는 역사적 경험이 많다. 그런데 지금은 왜 안 그럴까? 용산참사 등은 왜 잊혀지고 있을까...

7월 11일 세미나는 4.19를 평가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다음 세미나(7월 18일)에서는 박정희 정권 이후 오늘날까지를 기준으로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룬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대학생 모임 <여름방학 세미나>
1. 7월 11일 [한국 현대사 정리1] 박정희 정권 이전
2. 7월 18일 [한국 현대사 정리2] 박정희 정권 이후
세부주제 : 군사정권 시대의 간첩 사건,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반공 이데올로기,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3. 8월 1일 [우리 민주주의의 현재] 정당 정치, 의회 정치, 대의민주주의
4. 8월 8일 [우리 민주주의의 대안] 새로운 사회의 민주주의
5. 8월 15일 [2008 촛불 항쟁과 앞으로의 전망]


태그:#새사연, #대학생 모임, #민주주의,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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