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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조금은 낯선 이름의 풍패지관(豊沛之館)은 전주 객사다. 한(漢)나라를 창건한 유방(劉邦)의 고향인 중국 장쑤성 패군(沛郡) 풍현(豊縣)에서 이름을 빌려왔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주로 빈객을 맞았고 정기적으로 임금을 향해 예를 올렸으니 분명 귀히 여겼을 것이다. 전주가 왕조시대 주요 도시이긴 하나, 객사에까지 중국 황제의 고향을 들먹인 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터이다.
 
왕조시대 빈객을 맞고, 매월 한양 임금을 향해 예를 올린 전주 객사. 한고조 유방의 고향 패군(沛郡) 풍현(豊縣)에서 음절을 빌어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부른다.
▲ 전주 객사 왕조시대 빈객을 맞고, 매월 한양 임금을 향해 예를 올린 전주 객사. 한고조 유방의 고향 패군(沛郡) 풍현(豊縣)에서 음절을 빌어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부른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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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창건한 이성계 뿌리가 전주다. 성 남문 근처엔 궁궐로 예우하는 경기전(慶基殿)이 있다. 이곳 정전에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의 어진이 있다. 그 북쪽 깊숙한 곳엔,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李翰)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 조경묘(肇慶廟)가 있다. 이런 이유로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주를 전라도 수부(首府)로 세웠다. 한마디로 전주는 조선왕조의 탯줄인 셈이다. 그만큼 다른 도시보다 더 소중히 여겼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하마비가 있는 경기전 문 앞. 작년 가을 조경묘와 경기전 대제가 있었음을 사진은 보여 주고 있다.
▲ 경기전 하마비가 있는 경기전 문 앞. 작년 가을 조경묘와 경기전 대제가 있었음을 사진은 보여 주고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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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전주성이 무지렁이 농민군 손에 함락당해버렸다. 왕조 창건 이래 초유의 참사다. 고종을 비롯한, 왕후 민씨가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 훤하다. 살아날 궁리에 몰두하다 어리석은 판단에 이르고 만다.

전주성 함락 와중 판관(=전주시장)이란 자는 제 한 몸 안위를 보장받으려 경기전 이성계 어진을 들고 완주 위봉산성으로 도망가는 민첩함을 보였으니, 나라 꼴이 대체로 이 모양이었다.

전주성을 향하여

기세가 오른 혁명군이 엄청난 속도로 전주로 진군한다. 하루만인 4월 24일 원평에 이르자 백성들 환호성이 대단하다. 전주성 턱밑까지 진군했으니, 이제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한편, 생쥐처럼 법성포에 웅크리고 있던 홍계훈은 패전 소식에 반나마 넋을 잃고 그 밤을 법성포에서 보낸다. 그와 동시에 증원군이 당도한다. 혁명군이 갈재를 넘었다는 정탐 보고에 25일에서야 법성포를 출발한다. 증원군을 합해 1500명 군사에 보급품 수레가 엄청나다. 군량보다도 탄약, 포탄, 총탄이 주를 이룬다. 학정에 시달리는 선량한 백성을 죽이라고, 나라님께서 친히 내어 주신 물건이다.

원평 혁명군 진영에, 고종이 이효응과 배은환을 종사관으로 보낸다. 왕의 윤음(=왕이 신하와 백성에게 내리는 말로 법령과 같은 위력을 지님)을 전달한다는 명분이다. 아울러 왕의 재산인 내탕금을 건네며, 전쟁을 멈추라는 뜻을 전한다. 무기를 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기치로, 그 척결대상인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반란군에게 왕이 보인 태도다.
 
전주성 풍남문에 오른 혁명군을 묘사한 박홍규 화백의 작품.
▲ 전주성 함락 전주성 풍남문에 오른 혁명군을 묘사한 박홍규 화백의 작품.
ⓒ 이영천(대뫼마을 현장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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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라도 혁명군의 요구를 전격 수용하며 힘의 바탕으로 삼아 강력한 개혁을 추동했다면, 우리 역사는 어찌 흘렀을까?

두 종사관의 태도가 어떠하였는지는 불명확하다. 혁명군을 하대하며 중앙 관리로써 권위를 앞세웠을 수 있다. 양반의 눈에, 상것들인 혁명군은 하찮고 하찮은 무지렁이로 보였을 수 있다. 천길만길 밑바닥에서 매양 굽실거리는 종자로 여겼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목은 남아나지 못한다. 와중에 고종이 홍계훈에게 보낸 선전관 이주호 일행 셋도 붙잡혀, 목이 잘리고 만다.

함락되는 전주성

전주성 서문 10리 밖에서 동태를 살피며 4월 26일 하루를 보냈다. 용머리 고개를 넘어 천천히 진군하며 공격을 개시한 27일은 전주 장날이다. 며칠 전부터 혁명군을 장돌림으로 위장시켜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밖에서 공격하면 안에서 성문을 열어젖힐 군사다. 감영 구실아치들만이 성문을 꼭꼭 잠그고 공격에 대비할 뿐이다.
 
전주 서문이 있었던 현 차이나 거리 입구에서 바라 본 다가교 방향. 차이나 거리 등 인근 좁은 골목은 헐린 성벽 자리이다.
▲ 서문터 전주 서문이 있었던 현 차이나 거리 입구에서 바라 본 다가교 방향. 차이나 거리 등 인근 좁은 골목은 헐린 성벽 자리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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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들이 장성 싸움에서 얻은 대포와 양총으로 무장하고, 그 자취를 감춰 가면서 전주를 향하여 들어왔다. 이때는 4월 27일 전주 서문 밖 장날이다. 무장, 영광 등지로부터 사잇길로 사방으로 흩어져 오던 동학군들은 장꾼들과 함께 섞여 미리 약속된 날, 수천의 사람들이 이미 다 시장 속에 들어와 있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석각. 1973. p218 의역 인용)
 
이때 서문 밖에서 시뻘건 불길이 무서운 기세로 타오른다. 서문 밖은 저잣거리를 중심으로 상가와 여염집 일천여 채가 몰려있는 전라도에서 가장 큰 시장이다. 성 밖이라 하나 성안과 능히 견줄만한 곳이다. 바로 이곳이 감사 김문현의 명령으로 불태워진 것이다. 상인들은 길길이 날뛰며 반나마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서문 밖 집들이 다 재가 되어버리자, 혁명군과 상인들 모두 망연자실해진다.
 
김문현은 서문을 닫아걸고 서문 밖에 있는 민가 수천 채를 불 질러 적이 성을 타고 넘어와 공격할 것에 대비하였다. (번역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4, 수필 p94)
 
이때 성안에 잠입해 있던 혁명군이 징을 울리며 서문을 공격해 문을 열어젖힌다. 전주성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다. 아전들이 동문 쪽 성벽을 넘어 도망친다. 원한에 찬 서문 밖 상인과 백성들이 도망치는 이들을 살육한다. 감사 김문현은 홀몸으로 성을 벗어나 겨우 도망했다.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키려 진군하며 대포를 쏘았다는 용머리 고개. 완산칠봉과 다가산 사이에 있다.
▲ 용머리 고개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키려 진군하며 대포를 쏘았다는 용머리 고개. 완산칠봉과 다가산 사이에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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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오시(午時)에 이르자 장터 건너편 용머리 고개에서 한줄기 대포 소리가 터져 나오며 수천 방의 총소리가 일시에 장판을 뒤엎었다. 별안간 엄청난 총소리에 놀란 장꾼들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뒤죽박죽으로 헤어져 달아났다. 서문으로 남문으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은 장꾼들과 같이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침착하게 총을 쏘았다. 서문에서 파수를 보던 병정들은 어찌 된 까닭을 몰라 엎어지며 자빠지며 도망치고 말았다. 삽시간에 성안에서도 모두 동학군의 소리요, 성 밖에도 또한 동학군 소리뿐이다.

이때 전봉준은 느긋하게 대군을 거느리고 전주성 서문을 밀고 들어와 지휘소를 선화당(宣化堂)에 정하니 이때 이르러 전주성이 함락되었다. 전봉준 등이 지휘소를 정한 후 바로 영을 내리어 백성들을 위무하여 왈 "우리는 보국안민을 주장하는 자라 백성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노력함이오, 결코 타의가 없으니 동포들은 각기 안심하라" 하였고, 또 영을 내려 왈 "비록 관리라도 죄 없는 자는 물론이요, 설사 죄가 있다 할지라도 앞의 잘못을 고치고 우리 의거에 기꺼이 따르는 자는 특히 용서할 것이오, 반대하면 목을 베라" 하였고 또 옥문을 열어 죄인을 방면 석방하고 또 군기를 거두며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휼하였다.

사영문(四營門=전라감영)의 높고 낮은 관리를 점고하니 감사 김문현과 중군 임태두, 판관 민영승 등은 이미 도망하였고 다만 사영문 내 낮은 직급의 사령, 군노 등은 유무죄를 막론하고 다 동학에 들기를 허락하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석각. 1973. p218~219 의역 인용)
 
전라 감영의 중심 전각으로 동학혁명 과정에서 상징적 이정표를 남긴 곳이기도 하다.
▲ 선화당 전라 감영의 중심 전각으로 동학혁명 과정에서 상징적 이정표를 남긴 곳이기도 하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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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을 함락시킨 뒤 피해당한 상인을 먼저 위무한다. 빠르게 성 내부 치안을 확립하는 동시에 살육과 보복 엄단 조치를 단행한다.

완산 7봉

한편, 조정은 봉기를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4월 18일 전라감사 김문현을 해임하고 김학진을 임명한다. 홍계훈은 황룡강 패전 책임을 물어 파면하고 27일 양호순변사로 이원회를 임명 관군을 거느리게 한다.
  
완산칠봉에 서 있는 동학혁명군 전주성 입성 기념비.
▲ 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 완산칠봉에 서 있는 동학혁명군 전주성 입성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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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훈은 그제야 동학군의 계책에 빠진 줄을 알았다. 홍계훈은 오백 리나 되는 먼 길을 돌고 돌며 유인당한 걸 탄식하며, 여러 날 만에 전주 인근에서 성내 사정을 수소문해 본즉 전주성은 이미 동학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홍계훈은 할 수 없이 완산 7봉에 진을 치고 …(하략)… (앞의 책. p220 의역 인용)
 
홍계훈은 4월 28일에서야 전주천 건너 완산 7봉에 참호를 파고 진을 친다. 부대를 나누어 서쪽 다가산은 물론 동쪽과 북쪽에도 진지를 둔다. 전주성을 대포와 기관총의 사거리에 넣어, 다음날부터 무차별 공격을 감행한다. 성안으로 폭탄과 기관총 탄환이 무수히 떨어진다.

성내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이에 화가 치민, 전주 동학군 1천여 명이 완산 7봉을 공격하였다가 도리어 큰 피해만 보고 퇴각해야 했다.
 
완산칠봉 중 하나인 곤지산에서 바라 본 전주성. 왼쪽 중앙의 풍남문에서 부터 오른 쪽으로 전동성당, 경기전의 모습이 차례로 보인다.
▲ 전주성 전경 완산칠봉 중 하나인 곤지산에서 바라 본 전주성. 왼쪽 중앙의 풍남문에서 부터 오른 쪽으로 전동성당, 경기전의 모습이 차례로 보인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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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남문 밖에서도 불길이 인다. 구실아치들이 지른 불에 1천여 채 집들이 모조리 재로 변해 버렸으니, 그 분함이 오죽했을까. 겨우 목숨만 건진 백성들이 선화당에 몰려와 통곡한다. 전쟁판에 내 놓인 전주가 앞으로 어떤 피해를 받을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우선 백성을 안심시켜야 한다. 시나브로 다가온 농사철에 마음도 급하다. 여하한 빨리 전투를 끝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전주성 함락 소식에, 어리석으나 표독스러웠음이 분명한 왕후 민씨와 그 척당 대표하수인 민영준이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을 관철하려 분주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암울한 나라에 불행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다.

태그:#동학농민혁명, #전주성함락, #경기전, #조경묘, #풍패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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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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