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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동 경성제대 본관 전면으로, 흡사 덕수궁 언덕에 남아있는 경성재판소(서울시립미술관)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 경성제대 본관 전면 동숭동 경성제대 본관 전면으로, 흡사 덕수궁 언덕에 남아있는 경성재판소(서울시립미술관)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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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이 일제의 무력으로 짓밟힌 조선사회는 거대한 해일이 스쳐간 쓰나미 상태였다.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850명, 체포된 사람 46,306명, 불탄 민가 715채 등 참혹한 희생을 치렀다. 정신적 피해는 가히 공황상태였다. 자주독립을 바랐다가 혹심한 연옥으로 굴러 떨어진 형국이었다.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럴수록 국내에서 압제는 심해졌다. 일제는 형식상으로는 문화정치를 내걸었으나 실제는 더욱 조이고 촘촘히 엮었다. 청년 셋이 함께 걸어도 경찰이 달려오고 종교집회나 일가의 집단성묘에도 감시병이 따랐다. 그러면서 완전히 억눌러 다시 터지는 것을 막고자 숨쉬는 구멍을 텄다. 

두 민간신문 발행을 허용하고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다. 그동안 조선에는 대학설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여기서도 '숨구멍트기'의 일환으로 허용한 것이다. 

경성제국대학에 조선어학 및 문학과가 설치되었다. 이희승은 이같은 소식에 모처럼 다시 공부할 수 있다는 데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일상 곳곳에 스며드는 일본어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직장생활에서 모아둔 학자금도 넉넉했다. 학문연구의 길은 여전히 멀었다. 입학시험에 낙방한 것이다. 학교 문을 떠난 지 6년이 지나고, 3.1혁명의 쓰나미를 겪고, 나이 만 29살의 만학도에게 대학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반도인'(당시 조선인에 대한 호칭)이라는 겹겹의 장벽이었다. 그는 집념이 강한 성격이다. 아직 어릴적에 주시경선생의 정신적 세례를 받은 이래 한시도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는 미래의 꿈인 조선어학이었다. 재수를 하고자 작심하고 입시준비를 단단히 하면서 임시방편으로 연희전문에 들어갔다. 3학기에 휴학원을 내고 본격적으로 입시공부에 돌입했다. 1925년 4월 관립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예과에 입학하였다. 30살 나이의 만학도가 되었다. 

법문학부 예과는 문과 A반 40명, 문과 B반 40명 등 모두 80명을 뽑았다. A반은 법학을 전공할 학생들이었고, B반은 인문 계통이었다.

문과 A반에는 소설가 이효석 군, 국회의원을 지낸 박용익 군 등이 있었고, 이강국·최용달 등 뒤에 월북한 문인들도 있었다. 내가 속한 문과 B반에는 한국인이라고는 몇명 되지 않았는데 미국 워싱턴주립대학 교수를 지낸 서두수 군, 수리조합연합회 이사장을 지낸 변정국 군, 여주고교 교장을 지낸 성낙서 군 등이 있었다. (주석 1)

'반도인'(조선인)이 경성제국대학에 들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당대의 수재들이다. 1년 선배 중에 유진오·이재학·조윤제·채관석·최창규 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이었다.

"본과 즉 조선서학급 문학과에 들어가서 제1회생인 조윤제 군이 혼자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는 내가 조선문학과에 들어간 것을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몰랐다. 나중에 그는 문학 전공이고 나는 어학전공으로 각각 갈렸지만, 우리는 줄곧 강의를 같이 들었다. 맨 처음 조군과 만난 강의 시간은 다까하시 선생의 연습시간이었다." (주석 2)

소수의 한인 학생들은 각기 출신 성분이 다르고 개성도 각각이었지만 학우로서의 일체감은 갖고 있었다.

"각급 내의 다수파인 일본인 학생들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두 나라 학생들은 교실 안에 있는 두 개의 스팀 난로에 따로 모여 얘기를 주고받을 뿐 함께 어울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주석 3)

경성제국대학에서 이희승은 일본인학생들의 폐악을 지켜봐야 했다.

"총독부 관리나 상인들의 자식인 이들에게 민족적인 자존심을 상하기 싫었던 우리는 숫자로는 훨씬 열세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빼앗긴 나라의 운명을 어깨에 지고 있는, 무엇인가 소명의식 같은 것을 지닌 엘리트였기 때문에 그들의 철없는 퇴폐성에 물들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주석 4)

예과 1학년 겨울방학 때 첫 아들이 태어났다. 13살에 한 살 연상의 부인과 결혼하여 17년 만에 얻은 소생이었다. 부인과는 떨어져 사는 세월이 훨씬 많았다. 공부하느라, 직장 다니라, 부인은 향리에서 부모님 모시느라 아들의 몫까지 다하여 가사를 돌본 여성이었다. 그래서 더욱 유행이다시피 한 자유연애의 풍조에서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경성제대에서 나는 우리 국어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인접 학문의 필요성을 느껴 교육학·철학·조선사 등의 강의도 받았다. 또한 국어를 하다 보면 자연 느끼게 되는 외국어와의 깊은 연관성 때문에 욕심을 부려가며 중국어·프랑스어·독일어·영어·라틴어·그리스어까지도 강의를 들었다. 영어시간에 너세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를 읽은 기억이 난다. 30대에 예과에 들어갔으니까 공부가 힘이 들었다.

특히 어학에는 욕심이 앞서서 한꺼번에 여러나라 말을 배우려고 덤비다가 결국 한 가지로 철저하게 하지 못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내 학교 공부의 커다란 실패가 아닐 수 없다. (주석 5)

1927년 봄 예과를 수료하고 학부생이 되었다. 이듬해 조선어문학과에 김재철·이재욱 두 명이 들어왔다. 후배들과 어울려 카페에도 다니는 등 늦깎이 학창생활을 보냈다. 학부에 올라와서는 한인 학생들끼리 '낙산구락부'를 조직하고 <신흥>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학생들의 어려운 주머니를 털어 만든 잡지여서 조잡한 형태였지만 얼이 담겼다. 이어서 '조선어문학회'라는 이름의 학회를 조직하고 <조선어문학회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회원이 고작 4명뿐이어서 각자 돈을 대고 논문 1편씩을 싣는 화보였지만 학교 내외에서 좋은 반응을 받았다. 위당 정인보의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이희승은 <표준어에 대하여>와 <신언(新言)에 대한 연구>를 실었다. 그가 최초로 발표한 논문에 속한다.

그의 관심분야는 넓어져서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서울시내 사립 중학교 조선어교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국어에 대한 연구·발표·토론하는 단체였다. 그는 아직 재학 중이어서 정회원은 못 되었고 경성제대를 졸업한 1930년 정회원이 되었다. 이 단체는 몇 년 뒤 조선어학회사건의 모태가 되었다.  


주석
1> <회고록>, 77쪽.
2> 이희승, <자전적 교우록>, <한 개의 돌이로다>, 33쪽.
3> <회고록>, 77쪽.
4> 앞의 책, 78쪽.
5> 앞의 책, 8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조선어학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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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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