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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모습.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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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이 서력 기원 918년 삼한을 통일하여 고려를 세운 이래 한민족은 배달의 겨레라는 동포의식을 갖게 되었다. 더 소급하면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면서 한민족이 형성되었다. 

그 사이 분열과 통합이 나타나고, 고려는 몽고의 지배를 받았고 조선왕조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겪었다. 본래 대륙국가이던 한민족이 고구려·발해의 멸망으로 대륙의 영토를 상실하고 반도국가로 쪼그라들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가 반도국가로 자리잡게 된 사력이다.

일제 식민통치를 자력으로 극복하지 못하면서 외세가 한반도를 그나마 둘로 쪼개어 남북 분단시대가 되어 어언 80여 년에 이르렀다. 민족의 분열을 질타한 선대들의 대표적 3인의 시문으로 이 연재의 마무리로 삼고자 한다. 

'삼국사기'를 읽고 ― 서거정

 삼한이 나날이 서로 싸우니
 백만 창생이 고통 속에 지세웠네
 신라·백제는 어찌 몰랐던고
 입술이 터지면 이빨이 시린 것을
 수·당이 방울새와 조개 모두를 노리는 어부인데도
 점점이 놓인 저 강산은 말이 없지만
 사서(史書)의 편간(編簡)에 역력하네 그 사실이
 그대들은 반 영웅이나 반은 흉역이요
 우러러 하릴 없는 눈물 소매를 적시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아버지 안주목사 미성과 양촌 권근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가 되고,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연경으로 사신 가는데 종사관으로 동행하였다. 

형조판서에 이어 성종대에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달성군(達成君)으로 봉해지고 우찬성으로 승진하여 <삼국사절요>와 <동문선> 130권을 편찬했으며 자신의 저술 <필원잡기>를 펴내었다. 69살에 사망, 조정에서는 문충(文忠)의 시호를 내렸다.
  
'3천만 동포에 읍고함' - 김구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칠십유삼(七十有三)인 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지하는 것도 한독당을 주지하는 것도 일체가 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민족의 이익을 위하여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전민족의 단결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삼천만 동포와 공동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도는 원귀(寃鬼)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김구(金九, 1876~1949)는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살 때에 동학에 입도하여 농민전쟁에 참여하고, 21살 때 일본인 밀정 스치다를 처단했다. 투옥되었다가 탈옥하여 마곡사에서 승려생활을 했다. 환속하여 최준례와 혼인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신민회에 참여, 안악사건으로 15년 형을 받고 투옥, 41살 적에 가석방되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부터 주석에 이르기까지 27년간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해방 후 환국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앞장서고, 앞에 소개한 내용은 1942년 남북협상을 위해 방북을 앞두고 발표한 성명(발췌)이다 74살이던 1949년 6월 이승만의 수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것이 아니다' - 박두진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이 붉은 선혈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중략…)
 철저한 민주정체, 
 철저한 사상의 자유,
 철저한 경제균등,
 철저한 인권평등의,
 우리들의 목표는 조국의 승리,
 우리들의 목표는 지상에서의  승리,
 우리들의 목표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 인간애의 승리인
 인민들의 승리인
 우리들의 혁명을 전취할 때까지,

 우리는 아직
 우리들의 피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우리들의 피불길,
 우리들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혁명이여!

박두진(朴斗鎭, 1916~1988)은 경기도 안성시 봉남동에서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묘지송>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 조지훈·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를 결성하고 <청록집>을 발간했다.

1949년에는 첫 개인 시집 <해>를 냈으며, 이화여자대학, 연세대학, 고려대학 등의 교수를 지내고, 1960년 고려대학 교수로서 4.19혁명 당시 교수단 데모 대열에 앞장서서 "이승만 퇴진"을 외쳤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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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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