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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사용하던 태극기와 장구 등 소중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태극기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사용하던 태극기와 장구 등 소중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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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강제적인 개항(1876년)에서 강제적인 병탄(1910년)에 34년, 병탄에서 해방(1945년)이 35년 걸렸다. 분단(1945년)으로 민족이 두동강난 지 80여 년에 이르렀다. 개항과 식민지 기간을 합친 것보다 더 긴 세월이 지났다. 유엔회원국가 중 유일한 분단 상태이다. 그동안 동족간의 전쟁과 냉전을 거쳐 한 때 화해무드가 조성되기도 했으나, 윤석열 정권 이후 남북간의 적대와 대치, 위기가 더욱 심화되었다. 통일의 기대는 점점 멀어지고 분단의 장벽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해방 후 동족간의 전쟁을 막고자, 분단을 해결하고 더 이상 타율에 의한 대리전쟁터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념에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주창해 온 사람이 있었다. 

김용중(金龍中, 1898~1975)은 인삼농사를 하는 아버지 김일택과 어머니 박순화 사이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전북 금산(현 충남)에서 태어났다. 15살에 1년 연상의 김현성과 혼인하였다. 

향리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8살 되는 해(1916년)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을 만나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좀 더 신학문을 하고자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1917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한인노동자들이 일하는 농장과 철도부설 공사에 종사하면서 외국인 어학교인 센츄럴 주니어 하이스쿨에 다녔다. 졸업 후 인문계 고등학교인 LA고등학교를 다니고 이어 컬럼비아·조지 워싱턴·남가주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동향 선배이자 어학학교 동기인 송철과 채소·과일·위탁 판매업을 시작하여 돈을 모아 하버드대학에 입학,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졸업 후 송철과 함께 위탁판매업과 도매상을 하는 등 사업에 수완을 보여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교민사회와 조국의 현실에 관심을 가졌다. 국민회와 재미한족연합회 등에 참여하고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독선 독주를 일삼는 이승만 노선이 아닌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였다. 

1943년 <더 보이스 오브 코리아>를 창간하여 조선의 참담한 실정과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같은 이름의 라디오 방송국을 세워 역량을 키웠다. 

1943년 창간호부터 1961년 3월호까지 통일관련 목차를 보면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 남북 연석회의, 하나의 조국, 유엔의 통일지원, 한반도의 총체적 해결, 적극적 통일조국 건설 등을 강조한 논설이 많이 눈에 띈다.

1948년 12월 남한 단독정권 수립을 승인한 유엔 파리총회 때 업저버 자격으로 참석했던 그는 <더 보이스 오브 코리아>(122호, 1949년 1월 15일자)에 전 페이지에 걸쳐(4쪽) 분석 기사를 싣고 유엔결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번 총회를 통해 조선이 독립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느낀 것은 남북의 싸움이 아니라 미·소간의 전쟁이었다."

해방 이후 미·소의 군대가 남과 북에 주둔하는 바람에 조선의 독립이 늦어지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죽을 때까지 일관된다.(김도형, <김용중>, <발굴 한국현대사인물③>)

김용중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대척점에 있는 한반도의 영구평화와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영세중립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면서 눈을 감을 때 까지 이를 위해 매진했다. 해방 후 그는 미·소 양국의 의견 불일치로 인하여 조선은 희생이 되고 있다.(중략) 조선은 적성국가보다도 악질로 취급되고 있다.

 (미-소 공위) 결렬의 결과로 고통을 받는 곳은 미국도 아니고 소련도 아니고 오로지 조선  자체다. 그러나 그들의 적국이었던 일본은 분할되지 않고 자국민의 정부유지가 허용되고 있다. 

그는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1951년 3월 이승만과 김일성에게 공개호소문을 보내 평화회담과 휴전을 요구하며 내전의 책임이 있는 두 사람의 동시 사퇴를 주장하고, 1958년에는 미국정부 요인들에게 독재정권으로 미국 위신을 추락시키는 이승만 정부와의 관계를 재고하라고 촉구했다.(정병준, <김용중의 생애와 통일·독립운동>)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고국을 찾은 것은 1946년 6월이다. 하지와 여운형을 만났다. 여운형과 만나 시국문제를 상의하고 돌아가던 차 속에서 여운형은 흉탄에 맞아 절명했다. 남북의 독재자들을 맹렬히 비판함으로써 남쪽에서는 '반한 인물'로, 북쪽에서는 '수정주의자'로 낙인 되었지만 개의치 않고 활동을 계속하였다.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비판하고, 직접 그에게 편지를 써서 북한대표를 서울로 초청, 통일문제를 논의할 것을 제안했으며, 김일성에게도 편지를 보내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김일성의 답신도 받았다. 그가 1964년 12월 박정희와 김일성에게 공개편지를 통해 재차 촉구한 <중립평화통일방안>이다. 

1. 불가분의 조국을 그 본래의 상태로 복구시키기 위한 협상을 위하여 11명으로 구성되는 통일위원회(이하 위원회)를 수립할 것. 위원은 남북에서 각각 5명씩 선출, 11번째 위원은 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할 것.

2. 정치적 해결의 서막으로서 다음과 같은 일련의 긴급한 인도주의적 조치를 즉시 실시할 것.

ㄱ. 이산가족이 다시 합치도록 하고 그들의 거주지는 희망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ㄴ. 나라의 양 부분 간에 무역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
ㄷ. 남북간 이주 및 여행의 자유.
ㄹ. 나라의 양 부분간의 우편·전화·전신·수송 및 전력의 재개.
ㅁ. 전국을 통한 학술 및 체육활동에의 참가.

3. 위원회의 지도 아래 한반도로부터 모든 외국군을 동시에 철수하고 남북의 병력을 국내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대의 수준까지 축소시킬 것.

4. 위원회는 38선에 있는 '외국의 장벽'을 철폐하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해체시키는 권한을 가질 것.

5. 전국적인 정부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제헌의회 선거를 위하여 위원회의 지도와 감시 아래 비례대표제에 기초하여 실시되는 자유로운 전한국선거를 준비할 것.

6. 현재의 양 정권이 체결한 모든 협정, 조약, 공약을 무효화함으로써 미국과 유엔 및 인접 제국에 의해 보장되는 통일조국의 중립적 지위를 확보할 것.(<해외한민보>제5호, 1975년 10월 15일자)

김용중 선생은 1975년 9월 6일 LA 남가주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엔에 따라 유골 일부가 수년 후 휴전선 일대에 뿌려졌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8월 독립유공자로 예우하고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선생의 인간됨과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 사람으로서의 주인의 입장을 견지한 것이었다. 내 문제를 내 머리와 내 힘으로 처리한다는 정신을 고수하였다. 내 땅, 내 나라 문제가 남에 의해서 좌우됨을 거부하셨으며, 남과 북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내정문제라고 생각하셨다. 선생이 남북대화를 계속해서 종용한 것도 '우리'인 당사자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덜레스, 매카시 등이 설치던 그 당시에도 선생은 동족간의 화해와 자결을 주장하셨다.(로광욱, <찬 김용중 선생>)

태그:#겨레의인물100선, #김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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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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