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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조용수 사장
 조용수 사장
ⓒ 진실위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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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미국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일이었다. 국내는 계엄령과 중앙정보부, 반공법 제정 등으로 다스리면 되는데 문제는 미국이었다. 그는 군에서 오랫동안 정보업무에 종사했기에 한국 정치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훤히 꿰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은 과거 좌익에서 활동을 했던 전력이 있었다.

박정희는 민주당 정부 각료와, 군부의 이른바 반혁명세력 그리고 혁신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구속했다. 민주당 각료들과 군부내 라이벌을 제거한 것은 이들의 재기를 막기 위한 조처였지만, 혁신계의 일망타진은 다분히 미국을 겨냥한 처사였다. '쿠데타공약' 제1항에 '반공국시'를 내건 것도 박정희의 좌익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박정희 군부는 5월 16일 거사 직후부터 혁신계 인사들의 체포작전에 돌입하여 19일에는 '용공분자 930명', 22일에는 '용공분자 2천 14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미 국무성은 그때에야 "한국의 사태는 고무적"이라며 쿠데타에 사실상의 지지를 표명했다. 미국의 지지에 고무된 쿠데타측은 이어서 4천여 명에 이르는 혁신계 인사들을 검거했다고 '전과'를 속속 발표했다. 그럴수록 미국의 신뢰는 도타워져갔다.

쿠데타 세력이 구속한 5천여 명 중에는 진짜 간첩이나 용공분자가 섞여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4월혁명 공간에서 진보·혁신의 기치를 내걸고 활동을 했거나 과거 남북협상 또는 평화통일운동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6·25 전쟁기에 용케 살아남은 보도연맹 관계자들도 포함되었다.

박정희는 미국도 놀랄 수준의 '빨갱이 사냥'으로 미국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진짜 빨갱이를 때려잡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을 빨갱이로 때려잡는다면 더욱 좋은 일이었다.

순전히 박정희의 빨갱이 경력을 세탁시켜주는 용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해야만 했다. 그 어이없는 게임의 최대 희생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였다.(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 1960년대 편 1권>)

박정희 군부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구속하고, 결국 사형까지 집행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하나는 물론 미국에 보이기 위한 희생양이고, 다음은 언론인들에게 공포·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의도였다.

이승만 시대에 잔뜩 움츠렸던 언론이 4월혁명에 무임승차하면서 기세를 올리고, 자유화 바람을 타고 유명 무명의 각종 언론사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여 사이비 기자들의 민폐가 심각한 형편이었다. 조용수의 처형은 이런 상황에서 선택된 '스케이프 고오트'였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4일 만인 5월 19일 계엄사령부는 <민족일보>에 폐간을 통보함과 함께 조용수 사장을 비롯한 8명의 간부를 구속했다. 조총련계에서 1억 환의 불법자금을 들여와 신문사를 만들고 북한 괴뢰집단에 동조해왔다는 혐의였다.

조용수는 자유당 때 국회 부의장을 지낸 조경구의 조카이며, 대구 출신으로 대륜중학을 거쳐 연세대학 재학 중 6·25전쟁 와중에 중퇴하고 삼촌의 비서관으로 국회에서 근무했다. 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한 다음 재일거류민단 조직부 차장으로 활약, 조총련계와는 무관하고 오히려 재일교포 북송 때는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했다.

4월혁명을 맞아 귀국한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으로 경북 청송에서 7·29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서상일·윤길중·고정훈·김달호·이동화·송지영·이종률·안신규 등 혁신계 및 진보적 인사들과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신문은 4대 사시를 내걸었다.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르키는 신문
민족일보는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창간 때부터 시련이 따랐다. 진보적 논조 때문이었다. 장면 민주당 정부가 인쇄소 계약을 해지시켜 3일간 휴간한 뒤 3월 6일자로 속간할 수 있었다. 신문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고, 민주당 정부의 2대 악법제정과 부정선거 원흉 등의 재판 지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신문은 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혁신계의 주장과 논리를 대변했으나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민족일보>의 독특한 편집과 진보적인 주장으로 창간 초기부터 국민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갓 창간한 신문이 동아·조선과 비슷한 수준의 5만부를 발행하고, 가판에서는 단연 1위를 달렸다. 군사정권의 사병이 된 검찰이 조용수 등을 구속하면서 밝힌 혐의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용수는 그가 일본에 있을 당시인 59년 8월 중순경, 대남 간첩인 이영근과 접선하여 소위 혁신세력의 규합 및 위장평화통일 주장의 지령을 받고 귀국한 후, 이(李)로부터 전후 1억 6백만 환의 공작금을 받아 윤길중·서상일·고정훈·최근우 등 혁신계 인물들과 활동하는 동시에,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북한 괴뢰의 주장과 동일한 언론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조용수 외의 피고 12명은 모두 <민족일보>의 사시결정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자이거나, 조와 이영근 간의 자료 수수를 담당한 자들이다.

검찰이 제기한 <민족일보>의 창간 자금은 조총련이 아니라 국내 혁신계 인사들로부터 지국설치 보증금 형식으로 모은 것이었다. 훗날 노태우 정부가 간첩이었다는 이영근에게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문화장을 줄 만큼, 이영근을 통한 조총련계의 불순자금 유입설은 날조된 기소장이었다.

8월 28일 열린 혁명재판 2심판부 김홍규 대령은 "민족일보가 평화통일, 남북협상 등 반국가단체 북한괴뢰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주장에 고무·동조했다"는 등의 혐의로 조용수·안신규·송지영에게 사형, 그외의 간부들에게는 무기 등 중형을 선고했다.

조용수는 장문의 상고이유서를 냈으나, 10월 31일 열린 상고심은 문석해·선우주·정기순·양회경·이존웅·계철순 재판관이 배석한 가운데 전우영 재판장은 상고를 기각, 사형을 확정했다. 변호인의 변론도 없이 진행된 재판이었다.

조용수는 61년 12월 21일 오후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32살의 짧은 나이에 이 땅에서 처음으로 진보 정론지를 발행하다가 창간한 지 100일도 못되어 쿠데타를 맞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언론사상 언론인이 재판에 의해 처형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조용수는 "민족을 위해 할 일을 못하고 가는 것이 억울하고, 신문을 만들기 위해 동지에게 꾼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겼다.

형이 집행되기 전 국제펜클럽과 국제신문인협회 등의 항의전문이 발표되고 일본에서는 구명운동이 제기되었으나 다수의 국내 언론이 침묵한 가운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2월 20일 사형을 확인한 다음날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61년 1월 13일 국제저널리스트협회는 61년도 국제기자상을 추서했다.

민주화의 진척과 더불어 1998년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가 발족된데 이어 조용수 40주기를 맞아 2001년 학술대회가 열리고,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요청했다.

유족과 '위원회'는 2008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고, 2008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무죄를 선언했다. 그리고 2011년 11월 대법원은 조용수 유족 등에 손해배상 확정 판결을 했다.

민족 언론인 조용수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세력에 목숨을 빼앗긴 지 47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한없이 '지체된 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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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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