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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사진의 왼쪽 배우 최병모가 연기한 2공수여단장 도희철은 박희도 준장을 모델로 해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사진의 왼쪽 배우 최병모가 연기한 2공수여단장 도희철은 박희도 준장을 모델로 해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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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역대 대통령 중에 누굴 가장 존경하시나요?"

수업 시간 아이들이 종종 던지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대답한다. 재임 기간에 이룬 업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아이들에게도 귀감이 되리라는 확신에서다.

그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찬하면서도 그의 '결정적 실책'도 잊지 않고 꼬집는다.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학살의 수괴인 전두환의 사면을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는 사실. 만시지탄이지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범죄자를 미리 용서한다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국민 통합'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의 사면으로 우리 사회의 갈등이 완화됐다고 여기는 국민은 단 한 명도 없다. 되레 우리 국민의 가치관을 물구나무서게 한 사건 중 하나였다는 평가가 많다. 피해자는 여전히 숨죽여 지내는데 사면받은 범죄자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다.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군인, 박희도
 
전두환 2주기 추모식이 11월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네거리 동화면세점앞에서 육사총구국동지회, 전국구국동지연합회 주최로 열렸다. 12.12군사반란 핵심이었던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이 참석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전두환 2주기 추모식이 11월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네거리 동화면세점앞에서 육사총구국동지회, 전국구국동지연합회 주최로 열렸다. 12.12군사반란 핵심이었던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이 참석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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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3일 뉴스를 보다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서거 2주기 구국 추모제'를 열었다는 소식이다. '서거'와 '구국 추모'라는 글귀를 버젓이 내거는 망동에, 또다시 사면을 건의한 김대중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절망스럽다.

그 자리에 유독 눈에 거슬리는 인물이 등장했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1공수 여단장이었던 박희도. 그는 단상에 올라 "전두환 대통령이 남긴 위업을 받들어 역사 바로잡기에 정진하겠다"며 목청을 높였다. 이는 역사적 평가와 대법원의 판결을 모두 부정하는 극우적 망언이다. 최근 개봉해 5일 현재 48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울의 봄> 속 2공수 여단장 도희철(최병모 분)은 박희도를 모델로 만든 인물이다. 

그는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군인으로도 악명이 높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지시에 항명하고 체포에 앞장선 자다. 1년 전인 1978년 말, 지휘하는 부대의 작전 실패로 인해 강제 전역당할 위기에 내몰렸을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나서서 그를 구해주었다.

이후 그는 반란의 1등 공신으로 승승장구하며 과거 은인의 자리였던 특전사령관을 꿰찼고, 급기야 육군참모총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전두환 정권 내내 군부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며 호가호위했다. 혹자는 그를 두고 '줄 잘 서야 성공한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박희도의 1공수 여단이 저지른 만행, 그리고 정선엽

박희도는 대한민국지키기 불교도 총연합 상임회장과 서북청년단 상임고문이라는 직함을 달고 극우 집회의 단골손님으로 활약 중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다. 12.12 당시 그가 지휘한 반란군의 총에 맞아 숨진 국방부의 초병 정선엽 병장.

12월 12일 자정을 갓 넘긴 시각, 무력으로 육군본부를 제압한 박희도의 1공수 여단은 곧장 국방부 점령을 시도한다. 두 곳만 수중에 들어오면 반란군의 최종 승리로 끝나게 될 판이었다. 당시 정선엽 병장은 국방부 정문을 지키며 상관의 지시 없이는 무장 해제할 수 없다고 버티다 반란군의 총격에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지금껏 '순직'으로 기록됐다 무려 43년이 지난 작년에 와서야 진상이 밝혀졌다. 작년 초 대통령 직속의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 위원회는 군 작전일지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전사'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고, 결국 국방부는 수용했다. '적에 맞서 싸우다 사망했다'는 사실을 공인받은 셈이다.

당시 박희도의 1공수 여단은 그의 사망 원인을 계엄군 간의 오인에 의한 총기사고로 왜곡하고 은폐했다. 심지어 총에 맞아 쓰러진 그를 확인 사살하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는 반란군에 맞선 의로운 군인이었으나, 신군부에 의해 '반혁명군'으로 낙인찍혀 한때 현충원 안장이 거부되기도 했다. 그의 가족이 풍비박산 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1995년 검찰은 신군부의 수괴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기소했다. 검찰의 흑역사로 기록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망언이 나온 직후다. 국민의 비난 여론이 들끓자 김영삼 대통령은 검찰에 특별 지시를 내렸고, 국회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나섰다.

검찰이 기소한 혐의는 12.12 군사 반란 수괴, 상관 살해 미수, 초병 살해 등 총 6개다. 이 중 초병 살해 혐의는 정선엽 병장의 사망과 관련된 것이다. 대법원이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 정선엽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천신만고 끝에 국방부로부터 그의 '전사 확인서'는 발급됐지만, 정선엽 병장의 온전한 명예 회복을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 그의 죽음이 '순직'에서 '전사'로 바뀐 건 첫걸음을 내디딘 것일 뿐이다. 그의 이름이 정의로운 대한민국 군인의 표상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의 행적이 존경받을수록 그를 학살하고 직속상관을 배신한 박희도와 같은 자들의 만행이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물구나무선 가치관을 바루는 일이기도 하다. 평생 "반란군에 순순히 항복했다면 살아남았을 텐데"를 되뇌다 돌아가셨다는 정선엽 병장의 어머니께 적어도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참군인"이라는 위로라도 건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동신고 운동장에 자리한 '정선엽 추모 나무'
 
나무에 견줘 팻말이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진 않는다. 전언에 따르면, 조만간 12.12 당시 그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한 안내판을 세울 것이라고 한다.
 나무에 견줘 팻말이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진 않는다. 전언에 따르면, 조만간 12.12 당시 그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한 안내판을 세울 것이라고 한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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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나이 구순에도 극우 집회마다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박희도를 떠올리며 정선엽 병장의 학창 시절 자취를 더듬어봤다. 전남 영암군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줄곧 타지에서 생활했다. 광주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고, 대학 재학 중 입대했다.

그가 졸업한 광주 동신고등학교와 조선대학교는 동문인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국방부가 '전사 확인서'를 발급하기 전부터 그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줄곧 이어져 왔다. 지난 2017년 고교 동문회에서 모교 운동장 곁에 추모하는 나무를 심었고, 대학에서는 명예졸업장을 수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지금은 나무 곁에 '의로운 동문'이라고만 표기해두었지만, 조만간 그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한 안내판을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조선대학교의 경우, 아직 그를 기리는 추모 기념물은 없는 상태다. 교정이 워낙 넓어, 대학 측과 동문회가 마음만 먹는다면, 기념물 세우는 건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닐 성싶다.
 
조선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5.18 사적지 표지석. 뒤로 보이는 높은 건물은 지금의 공과대학이다. 정선엽 병장의 재학 당시에는 없었던 건물이다.
 조선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5.18 사적지 표지석. 뒤로 보이는 높은 건물은 지금의 공과대학이다. 정선엽 병장의 재학 당시에는 없었던 건물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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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그가 다녔던 공과대학이 뒤로 보이는 곳에 5.18 사적지 표지석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조선대학교는 5.18 당시 신군부의 계엄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당시 숱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끌려와 매를 맞고 고문당했던 현장으로, 현재 5.18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약 정선엽 병장이 무사히 전역했다면, 복학 후 대학생으로서 5.18을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12.12 당시 그는 전역을 채 3개월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유난히 의협심이 강했다는 그가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무참히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고 나 몰라라 했을 리 없다.

지금의 공과대학 건물은 5.18을 보지 못했다. 물어물어 그가 다녔을 옛 공과대학 건물을 찾아 나섰다. 당시의 건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흔적은 남았다. 건물이 있던 자리엔 1967년에 지어진 후 2005년 호남 지역 최초로 폭파 공법으로 철거됐다는 점을 뽐내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영화 <서울의 봄>은 정선엽 병장의 숭고한 희생을 알리는 데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지만,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놓치진 않을 것이다. 지하실에 숨어 있다 붙잡힌 국방부 장관의 몰골과 대조되는 장면이어서다.

지금도 박희도를 비롯한 12.12 군사 반란의 주동자들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서울 도심을 활보하고 있다. 목불인견이지만, 또다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탓할 수밖에 없다. 허망한 바람일지언정 박희도가 '자연사'한 전두환을 대신해 진심 어린 참회와 사과를 할 때라야 정선엽 병장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선엽 병장이 공부했던 옛 공과대학 건물은 2005년 철거됐고, 그 자리에 연혁을 적은 안내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그는 조선대학교 전기공학과 재학 중에 입대했다.
 정선엽 병장이 공부했던 옛 공과대학 건물은 2005년 철거됐고, 그 자리에 연혁을 적은 안내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그는 조선대학교 전기공학과 재학 중에 입대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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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선엽병장, #1212군사반란, #박희도, #1공수특전여단, #서울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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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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