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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4세가 10004 세가 된 이야기
▲ 만 나이  만 4세가 10004 세가 된 이야기
ⓒ 한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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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유치원에서 가져온 교구에 '만 4세'라고 쓰여있다. 둘째는 2018년 11월생, 여섯 살 형님이지만, 아직 생일이 안 지났으니 만으로는 4세가 맞다. 유치원에서 쓰는 교구며 교재는 모두 만 4세용이다. 여섯 살 반이지만 전문용어(?)로는 만 4세 반이다. 하지만 아무도 만 4세 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섯 살 OO반, 아이는 몇 달 전 다섯 살 동생들을 맞이했고, 이제는 일곱 살, 유치원에서 가장 큰 형님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만 나이 정책이 시행된 지 몇 달이 지났다. 생일이 12월 생인 나는 아직 만 38세이다. 즉 한국나이로 마흔이라는 것,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마흔이라고 대답한다. 84년생이요,라고 덧붙이긴 하지만 그건 만 나이에 대한 추가 설명이 아니고 대충 우리 나이쯤 되면 내 나이가 몇 살인지도 관심이 없고 (일부러), 몇 살이면 몇 년생인가에 대한 감은 더더욱 없어지니 (외면) 이래저래 계산에 용이하시라고 첨가하는 말이다. 약국 봉지에 38세라고 쓰여있는 걸 볼 때 아직 일부 기관에서는 나를 30대로 봐주는구나, 하고 잠시 미소 짓는 정도, 나는 지금 그 나이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만 나이 정책이 시행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뜨악했다. 세상에, 우리나라처럼 만나자마자 호구조사, 민증부터 까고 보는 나라에서 만 나이 정책이라니 같은 년생인데 만 나이 따라 형님 동생 할 것도 아니고, 1월 1일에 떡국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문화가, 생일 케이크 먹어야 한 살 더 먹는 걸로 갑자기 바뀔 것도 아니고, 태중에서의 열 달로 생명이 살아 숨 쉰 기간으로 간주하여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되는 거라는 뿌리 깊은 생명 존중 문화의 자부심을 갑자기 없앨 것도 아닌데 단지 외국인과의 소통 문제 때문에? 나이를 깎아준다고? 굳이? 외국에는 가족이 아니면 언니 오빠 형님 호칭이 없이, 나이 상관없이 이름 부르는 문화에 나는 몇 월에 몇 살이 된다는 생일 중심 나이 먹는 문화가 확실하지만 우리나라는 나 12월에 서른아홉 살 된다고 말하면 'TMI'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이들에게는 만 나이 정책에 대해서 한두 번 흘리듯 설명해 주었다. 열성으로 말해봐야 어떻게 먹은 나이인데 도로 뺏어가냐는 원망만 들을 것이 뻔하고 같은 반 친구 중에 누구는 일곱 살, 누구는 여섯 살이라는 것, 하지만 모두 친구라는 것, 2학년 형님 중에도 누구는 일곱 살, 누구는 여덟 살이어도 형님은 형님이라는 것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은 나이를 먹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그걸 도로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생일이 늦은 둘째도 마찬가지이다. 너 아직 네 살이란 말을 한두 번 해 주긴 했는데 그는 나의 "네 살 발언"을 도로 튕겨 내었다. 나는 여섯 살이라며. 그러다가 최근에, 글씨를 배워서 읽을 줄 알게 된 아이가 만 4세라고 쓰인 자기 교재를 가지고 온다. 깔깔깔 웃으며, 나는 의아했다. 네 살 아닌데 네 살 거 주었다고 펄펄 뛰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왜 웃지? 

엄마! 이거 만 4세래, 만 살도 넘은 할아버지가 하는 거야!! 하며 깔깔 웃는다. 일 학년 큰아이가 쪼르르 달려가 교재를 보더니 같이 웃는다. 만 4세라고, 그러면 정말 만 살도 넘은 할아버지네, 할아버지가 이렇게 쉬운 걸 한다고? 하고 말이다. 

세상에, 생각도 못했다. 그 만을 그 만으로 이해할 줄이야. 가득 찰 滿 자가, 일만 萬자로 변신 한 순간이었다. 한글의 매력이기도 하고, 재미이기도 하고, 어쩌면 한계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말놀이에 나도 같이 웃어버린 날이다. 

웃다 웃다 아이들에게 만 나이를 다시 한 번 얘기해 주었다. 이번에는 말할 때마다 웃음바다가 된다. 뭐라고, 엄마는 만 서른여덟 살이라고? 아빠는 만 서른아홉 살이고? 우리 다 할머니 할아버지야? 아니, 한 두 살씩 깎아준다는 나이가 어느새 아이들 틈에서 무려 만 살이나 늙어버린 나이가 되었다. 만 나이 정책 이렇게 흘러가다니. 덕분에 아이들에게 만 나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조금은 용이했다. 나이를 깎는 것이 아니라 무려 만 살이나 올려주었으니, 하루빨리 나이 먹는 것이 소원인 아이들에게는 세상 고맙고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문득, 만 나이 정책은 어느 정도 잘 시행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나는 다시 출근을 하지만, 나의 나이를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은 없다. 대충 짐작은 하겠지만 학원이기에 호칭은 선생님으로 통일하여 서로 존대를 하며 부른다. 원어민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이다. 대충 나이가 나 보다 많이 어릴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몇 살이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그냥 서로 이름을 부르며 일을 할 뿐이다. 형님 동생 할 것 없는 일터이고, 형님 동생 하는 호칭이 아예 없는 외국인들과 일 하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일반 사석의 모임에서는 어떨까, 아직은 형님 동생 하는 호칭이 뚜렷이 남아있는데 만 나이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을까? 놀이터에 나가면서부터 엄마들이 놀고 있는 아이들의 나이를 물어보고, 아 형아네, 동생이네 하면서 놀기 시작하는데, 세상에, 여덟 살짜리가 일곱 살 동생이 자기에게 반말을 했다며 붉그락 푸르락 하며 열을 내는 사회에서 만 나이 정책, 과연 뿌리가 내릴 수 있으려나. 

그럴 때 만 살을 올려주는 방향으로 선회하며 한 번 같이 깔깔 웃었으면 좋겠다. 만 4세, 아이들의 눈은 어른이 생각지도 못한 것을 읽어내는 슈퍼파워가 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만 나이 , #만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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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아이 교육과 독서, 집밥, 육아에 관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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