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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 국경검문소 가는 길
 아제르바이잔 국경검문소 가는 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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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을 보고 나서 우리는 국경을 넘어 조지아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발라칸(Balakan)주의 마짐차이 사르하드 국경검문소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방을 끌고 꽤나 긴 장벽을 올라가면 검문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여권과 짐 검사를 상당히 까다롭게 하는 편이다. 검문소를 통과하면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의 국경을 이루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 다리는 알라자니(Alazani) 강의 지류인 마치미 즈갈리강 위에 놓여 있다.

다리 건너로 조지아(Georgia)라는 영어 표기가 크게 보인다. 그리고 흰 바탕에 빨간 십자가가 다섯 개 있는 조지아 국기도 펄럭인다. 다리를 건너면 라고데키(Lagodekhi) 국경검문소가 있다. 이곳에서 다시 조지아 입국심사를 받는다.

그렇지만 아제르바이잔 출국심사처럼 까다롭지 않다. 비교적 간단하게 심사를 끝내고 대기소로 나가니 조지아 가이드인 다비드(David)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사까지 받은 지식인이다.
 
조지아 와이너리
 조지아 와이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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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까운 포도농장으로 가 점심식사를 한다. 농장과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는 샤토 키라말라(Kiramala)다. 농장 안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그 옆에 상당히 넓은 레스토랑이 있다.

여기서 처음 먹은 조지아 음식은 빵 안에 야채를 넣은 므흐르바니, 소고기, 스프, 힌칼리였다. 힌칼리는 일종의 고기만두로, 육즙이 쏟아지지 않게 먹는 게 요령이다. 식사 후 와이너리에 들러 크베브리가 있는 지하창고에도 들어가 조지아 와인에 대한 설명도 듣고 와인을 구입하기도 한다.

시그나기 성곽마을 살펴보기
 
성곽마을 시그나기
 성곽마을 시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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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찾아갈 곳은 보드베(Bodbe) 수도원과 시그나기다. 그런데 보드베 수도원은 진입로 공사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단다. 보드베 수도원은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Nino)가 묻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바로 시그나기로 향했다.

시그나기는 인구 1,500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역사성과 문화관광 자원 때문에 카헤티(Kakheti)주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시그나기는 주변의 평야지대보다는 높은 곳에 있어, 전쟁이 나면 피난지로 이용되었다. 1762년에 피난용 성곽마을이 조성되었고,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농민들은 알라자니강을 끼고 있는 평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고 전쟁 때만 이곳 성곽 안으로 피신했다. 알라자니 평원 너머로는 카프카스 산맥이 동서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언덕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알라자니 평원 그리고 카프카스 산맥을 조망할 수 있다.

시그나기 관광의 출발점은 버스 주차장이다. 이곳에서 차를 내려 시그나기 박물관 쪽으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 중간에 도자기 모양의 분수대가 있고 행정복지센터가 있다.
 
시그나기 행정복지센터
 시그나기 행정복지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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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시티센터 웨딩하우스는 결혼식 장소로 유명하고 많은 커플이 찾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그나기를 사랑의 도시라 부른다. 행정복지센터 옆은 솔로몬 도다슈빌리(Solomon Dodashvili) 공원으로, 조지아의 역사를 보여주는 부조가 만들어져 있다.

포도농장에 일하는 농부들이 보인다. 나라를 지키러 나가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평화를 바라는 염원을 올리브나무와 비둘기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들을 지나면 고갯마루가 나오고, 그곳에서부터 성곽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곽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레스토랑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마을을 조망하기로 한다. 시그나기에서 유명한 문화유산은 성곽과 성문 그리고 정교회 교회다. 성곽은 벽돌로 쌓았고, 아치형의 성문 양쪽으로는 원통형의 조망탑을 만들었다.

교회로는 성 조지 교회와 성 스테판 교회가 유명하다. 성 조지 교회는 1793년 아르메니아 교회로 만들어졌고, 1920년대 이후 조지아 정교회로 바뀌었다. 성 조지 교회는 시그나기의 랜드마크다. 성 스테판 교회는 성벽을 이용해 만든 오래된 교회다.

시그나기 박물관의 피로스마니 그림 감상하기
 
시그나기 박물관의 니코 피로스마니 동상
 시그나기 박물관의 니코 피로스마니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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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나기 박물관은 1947년 고고인류학박물관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1967년 미술관이 생기면서 작품 수집이 이루어져 1970년대 400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 2007년 시그나기 박물관으로 확장되면서 2층에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 1862~1918) 전시실이 만들어졌다.

현재 박물관 1층에는 고대 카르틀리(Kartli) 왕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 알라지니 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청동기와 도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2층에는 카헤티주 미르자니(Mirzaani) 출신의 화가 피로스마니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피로스마니는 무명의 화가로 간판, 초상화, 인테리어용 벽화 등을 그리며 살았다. 피로스마니에게 예술은 미적인 아름다움의 추구라기보다는 생계수단이었다. 그는 그림을 아주 빨리 그렸으며, 그림값도 비싸지 않았다.

트빌리시 지역의 풍속화가로 알려지기는 했지만,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피로스마니의 예술성을 알아본 사람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서클에 속한 일리야 즈다네비치(Ilya Zdanevich: 1894~1975)였다. 당시 아방가르드는 입체파, 표현파, 미래파, 다다이즘 같은 전위적인 미술사조를 말한다.
 
피카소가 그린 피로스마니 초상(에칭)
 피카소가 그린 피로스마니 초상(에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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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일리야 즈다네비치는 트빌리시에서 피로스마니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1913년 2월 신문에 그를 천부적인 예술가로 평가하는 글을 실었다. 1914년에는 피로스마니의 작품 4점을 모스크바 아방가르드 전시 <타겟(Target)>에 전시했다. 그리고 <보스톡>(Vostok)이라는 잡지에 니코 피로스마니 전기를 써 그의 예술성을 알렸다.

그를 통해 피로스마니의 이름은 러시아를 거쳐 파리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916년 새로 창립된 조지아 미술협회는 피로스마니를 초빙해 함께 작업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삶 속에서 예술을 찾으려 했다. 예술은 실제 세계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그가 죽었고, 1920년대 그에 대한 관심이 잠깐 생겼으나 곧 잊혀져 갔다. 그의 예술이 부활한 것은 50년 지난 1960년대 말이다. 1968년 바르샤바를 시작으로, 1969년 파리(루브르 박물관), 빈, 1980년대 니스와 도쿄, 1990년대 취리히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그리고 1972년 일리야 즈다네비치가 니코 피로스마니에 관한 책을 발간했다. 이 책 속에 피로스마니 초상이 나오는데, 그것을 피카소가 에칭으로 만들었다.
 
몰로칸파의 파티
 몰로칸파의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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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코 피로스마니는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고, 전 세계 박물관에 소장되기 시작했다. 현재 남아 있는 피로스마니의 그림은 200점 정도다. 그 중 146점이 트빌리시에 있는 조지아 국립미술관에 있다. 이곳 시그나기 박물관에는 그의 그림이 14점 있다. 그리고 피카소가 그린 피로스마니 에칭 스케치가 4점 있다. 이 스케치는 1985년 즈다네비치의 부인에 의해 이곳에 기증되었다.

이곳에 전시된 그림을 보면 피로스마니는 일상생활에서 그림의 소재를 취했다. 도시와 시골 풍경, 역사적인 인물과 평범한 인물, 동물, 정물(still life) 등이다. 과일가게는 서민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타작마당은 시골 농부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의자에 기대앉은 여인은 부유하고 여유 있는 모습이다.

몰로칸(Molokan)파의 파티는 조지아 중산층 사람들이 예배가 끝난 후 술 마시며 즐겁게 담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그림은 전체적으로 검은색이 많이 들어간다. 그 때문에 어두운 느낌이 든다.
 
타마라 여왕(위)과 쇼타 루스타벨리(아래)
 타마라 여왕(위)과 쇼타 루스타벨리(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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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타마라(Tamara) 여왕과 쇼타 루스타벨리(Shota Rustaveli) 그림은 배경 색깔도 밝고, 인물의 얼굴 표정도 아주 밝은 편이다. 이를 통해 역사상 중요한 인물은 아주 밝고 긍정적으로 표현했을 알 수 있다.

풍선을 든 소녀는 아주 재미있다. 전통의상을 입고 고깔모자를 쓴 것으로 보아 서커스단원으로도 보인다. 새끼를 돌보는 곰도 인상적이다.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가는 곰 가족의 모습이다. 피로스마니는 사슴과 소 같은 동물 그림도 여럿 그렸다.
 
피로스마니의 그림: 과일가게, 타작마당, 곰가족, 포도농장(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피로스마니의 그림: 과일가게, 타작마당, 곰가족, 포도농장(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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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포도 농장과 포도주 제조를 보여주는 그림도 그렸다. 포도를 수확하는 사람, 포도를 옮기는 사람, 포도를 크베브리에 넣는 사람들이 보인다. 커다란 화면에 다양한 자연과 인간군상, 소와 말 같은 동물들을 표현했다. 저 멀리 원경으로 교회와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포도농장은 검푸른 색이 그림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크베브리, 오크통, 포도송이를 통해 포도주의 숙성을 보여주려는 그림도 있다. 황갈색이 그림의 기본 톤을 이루고 있다. 피로스마니는 세기전환기 조지아의 풍속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사실성과 전통성, 그것이 그를 유명한 화가로 만들었다.

태그:#시그나기, #시그나기 박물관, #니코 피로스마니, #고고인류학 박물관, #미술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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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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