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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 추억의 팔할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목욕탕. 어렸을 적엔 일요일 아침만 되면 온 식구가 목욕탕으로 총출동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결혼 전까지도 그 일상이 이어져 왔으니 가히 우리 가족의 목욕탕 사랑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런 내게 코로나가 한창 유행했던 지난 몇 년간은 인생의 암흑기와도 같았다. 다행히도 코로나가 조금 주춤해진 요사이, 나는 몇 년간 목욕탕을 못 간 한을 풀 듯 틈만 나면 찾곤 한다. 철없던 어린 시절 물놀이하던 재미로 따라다니던 목욕탕이 이젠 심신이 피로하고 지칠 때 찾는 더없이 가성비 좋은 힐링 장소가 되었으므로.

세월이 변해감에 따라 목욕탕 시설들도 예전에 비해 세련되어져 가고 있다. 다양한 탕을 갖추고, 사우나도 여러 개에, 각종 스파시설, 대형티비, 찜질방에 놀이시설까지 두루 갖춘 신식 목욕탕들. 우리 집 근처에도 최근 그런 목욕탕이 생겼다.

하지만 내 발걸음을 붙잡는 곳은 여전히 생긴 지 20여년 쯤 된 동네 목욕탕이다. 25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온탕 하나 냉탕 하나 건식사우나 한 개를 갖춘, 딸아이의 최애 동화책 <장수탕 선녀님>(백희나 저)에 나올 법한 오래된 목욕탕이다.
 
어렸을 적 자주 다녔던 목욕탕. 3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다.
 어렸을 적 자주 다녔던 목욕탕. 3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다.
ⓒ 이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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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내게 어린 시절 다녔던 목욕탕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오롯이 목욕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은 곳이다. 다양한 탕과 사우나가 많으면 그만큼 즐길거리는 많겠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집중력이 분산된다. 주어진 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런 곳이 목욕을 즐기기엔 더없이 좋다.

옷을 홀라당 벗고 가벼운 몸으로 목욕탕 내부로 입장할 때면 몸이 깃털을 단 것 마냥 가벼운 느낌이 든다. 밖에서 미처 마치지 못한 일들, 미처 보살피지 못한 아이들을 탈의실 옷장에 두고 나온 듯 오롯이 혼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중앙에 구멍이 뚫린 목욕탕 의자와 바가지를 들고 자리를 잡은 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온탕으로 직행한다. 38도 정도의 적당하게 뜨끈한 물에 몸을 푹 담가본다. 온탕물의 뜨거운 온기에 몸이 일순 노곤노곤해지며 기분 좋은 나른함이 찾아온다. 눈을 지긋이 감으며 목욕탕에 바로 오기 전 일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떼부림이 심해진 24개월 딸. 자기 성에 차지 않으면 자지러지는 울음과 고함소리로 온 식구의 진을 다 빼놓는다. 오늘 아침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든 리조또를 먹지 않겠다고 식판을 엎는 난동을 부렸다.

속으로 꾹꾹 삼키던 화가 아이의 과격한 행동에 일순 활화산처럼 터져버렸고 울부짖는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 정처없이 걷다 습관처럼 목욕탕이 생각났고 바로 지금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온도가 5도 정도 떨어진 채 이곳으로 왔는데 온탕의 온기가 내 몸의 온도를 서서히 올려주고 있었다. 반쯤 감은 눈을 떴는데 맞은 편의 모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바나나우유를 마시며 서로를 보며 웃고 있는 장면. 나는 한동안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장면을 보며 집에 있는 3살 딸이 생각났다.

속으로 '나도 몇 년 후면 탕에 앉아 저렇게 딸아이와 웃으며 바나나우유를 마실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녀처럼 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에 요즘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딸아이에 대한 고민들이 일순 가벼워짐을 느꼈다. '집에 갈 때 바나나 우유 두 개를 사가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가뿐한 몸으로 온탕을 빠져 나왔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목욕탕의 꽃 건식사우나.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열기에 푹 절여진 나무 냄새가 콧속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그곳에서는 늘 삼삼오오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옷을 벗은 채로 더 없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그날의 주제는 장마철이다.

비가 많이 와서 고추며 오이며 다 엉망이 되었다는 둥. 천장에 물이 새서 고생했다는 둥. 그들은 경쟁하듯 장마로 인한 피해를 늘어놓는다. 엄마와 동년배의 아주머니들이 나누는 얘기라 그런지 어느샌가부터 나는 더 귀를 쫑긋세워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중 한 아주머니께서 한 말이 내 귀를 오랫동안 붙잡았다.

"얼마 전 아들이 전화와서 엄마 비많이 왔는데 집은 괜찮냐고, 고추따러 밖에 나가지 마시라고 전화왔는데 기분이 참 좋드라고."

그 말을 전하는 아주머니의 주름진 눈 옆으로 옅은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면서 나는 불현듯 얼마 전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통화가 떠올라 가슴이 따끔거렸다.

무뚝뚝한 맏딸이라 전화는 고사하고 문자 한 통 보내는 것도 어려운 내게,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은 자식과 손주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전화를 한다. 긴 장마로 연일 비 피해가 보도되는 날들의 연속일 때, 뉴스에서 대전에서 비 피해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어린 목소리로 "대전 비 많이 온다던데 괜찮나, 애들데리고 절대 외출하지 말그라"는 내용의 전화를 걸어왔다. 늦은 퇴근 후 아이들 저녁을 챙기느라 분주했던 나는 그 전화가 귀찮게만 느껴져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서둘러 끊어버렸다.

그 아주머니의 얼굴에 핀 웃음꽃을 보며 며칠 전의 나를 반성했다. 통화 말미에 엄마의 안부도 물어줄 걸. 자식을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안위도 걱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텐데. 그 서운함도 자식에겐 맘껏 표현할 수 없는 엄마를 생각하며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러면서 목욕탕을 나가면 꼭 엄마에게 "비 많이 왔다는데 청도 집은 괜찮냐고, 방울토마토 따러 밖에 나가지 마시라"는 말을 전해줘야지 생각한다.

목욕탕을 나오며 5도쯤, 사우나에서 5도쯤 도합 10도 정도 높아진 마음의 온도를 지닌 채 개운한 표정으로 목욕탕 밖으로 나왔다. 오직 목욕탕에서만 볼 수 있는 솔직한 삶의 모습과 이야기들. 그것을 보고 들으며 나는 좀 더 좋은 엄마, 좋은 딸이 된 것 같다. 목욕탕 속에서 만난 진솔한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좀 더 다정스러운 사람이 된다.

옷을 입고 나오며 카운터에서 바나나우유 두 개를 산다. 그리고 한 시간여쯤 잠들어있던 휴대폰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목욕탕에서 받은 뜨끈해진 마음의 온기가 식기 전에.

몸과 마음이 또 다시 차가워지는 날, 이곳 목욕탕에 오게 될 것이다. 언제든 찾을 수 있게, 세월이 변함에도 20년 동안 묵묵히 한 자리를 지켜주는 목욕탕에 감사한 오늘이다.

덧붙이는 글 | 작가의 브런치계정에도 실립니다


태그:#목욕탕, #동네목욕탕, #목욕탕이주는온기, #목욕이주는치유의힘, #힐링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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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작은 소리에 귀기울이는 에세이작가가 되고 싶은 작가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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