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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부드러운 것에 위안을 얻는다. 소위 애착 담요가 된 양털 담요부터 나른한 오후에 만나곤 했던 길냥이들의 털. 그것들의 부드러움에 힘입어 오늘을 지탱한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양털(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폴리에스테르인) 담요, 양털 후드, 양털 집업에 유독 눈이 돌아가는 건 아마도 어릴 적 입었던 분홍 양털 자켓 때문인 것 같다.
 
이 이불과는 좀 더 성숙하고 은밀한 20대의 추억을 쌓지 않을까 싶다.
▲ 양털 이불 이 이불과는 좀 더 성숙하고 은밀한 20대의 추억을 쌓지 않을까 싶다.
ⓒ 황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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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엄마가 사주셨던 그 자켓은 겉감과 안감 모두 복실복실, 동글동글한 양털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팔꿈치에는 진분홍색 패치가 덧대어 있었다. 지금 떠올려봐도 꽤나 귀여운 생김새가 아닐 수 없는데, 이전까지 반질반질한 패딩이나 빳빳한 외투만 있는 줄 알았던 내게 그 부들부들하고 몽글몽글한 질감은 잊지 못할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 옷이 너무 좋았던 나는 학교에 갈 때도, 친구들과 놀 때도, 늦게까지 놀고 집에 들어가 부모님께 혼날 때도 분홍 양털 자켓과 한몸이 되어 다녔다. 외투의 풍성한 부피감이 납작해질 때까지 입었던 그 옷은 그야말로 어린 나의 눈물과 콧물을 모두 머금은 추억이자 내 보호자였다. 그 기억 덕분일까. 겨울 외투를 고를 때면 빵실한 털옷에 먼저 손이 가고, 겉감 뿐 아니라 안감도 확인한다. 

그리고 앵두. 약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심신이 고단한 고시생이었던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이었던 게 앵두다. 앵두는 나만의 애칭이다.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그가 앵두가 된 건 순전히 보드라운 털 때문이었다. 부드럽고 달콤하니까. 넌 이제부터 앵두야.
방만한 앵두
▲ 앵두 사진 방만한 앵두
ⓒ 황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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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두와는 점심과 저녁에 한번씩, 기숙사 식당으로 가는 길에 만났다. 사람보다 약속을 더 잘 지키던 녀석. 그는 고양이에 어울리지 않게(?) 나를 보면 도도도- 달려와 배를 까고 누운 다음 내 무릎에 발을 올려 '어서 쓰다듬으라'는 듯이 방만한 자세를 취했다.

요 작은 털뭉치는 배를 간지럽혀 주는 것과 엉덩이를 두드려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마침 동물애호가였던 나는 녀석이 주는 기회를 덥석 물어챘고, 그렇게 반년간의 기숙사 생활 동안 앵두의 부드러운 배 안쪽 털과 약간 더 빳빳한 엉덩이 털을 여한이 없이 누릴 수 있었다.

고시생 때 썼던 글과 일기를 보면, 참 힘들었구나 싶다. 그땐 몰랐는데 글에 음영이라도 넣은 것처럼 짙고 어둡다. 마음도 강팍해져서 독서실에서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주변을 경계하거나, 일부러 다른 사람들을 피해가거나, 있지도 않은 어떤 시선을 의식해 위축되기도 했다.
앵두와 만났던 묵시의 길
▲ 숲길 앵두와 만났던 묵시의 길
ⓒ 황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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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기를 무탈히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앵두 덕분이다. 근처 흙밭에서 뒹굴다가 정해진 시간에 귀신같이 걸어나오던 앵두의 보드라운 털은 서늘한 종이와 연필로 굳어진 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다음에 이 길을 걸을 땐 츄르(고양이 간식)라도 몇 개 챙겨 가야지.

부드러운 이불, 말랑한 인형 등으로 가득 찬 침대에서 위안을 느끼는 나와 달리 우리 엄마는 내 침대를 아주 질색한다. '보기만 해도 좁고 답답해!' 엄마는 고양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빼쪽한 눈이 무섭다나.

어렸을 적엔 나와 다른 엄마의 취향이 조금 야속했다. 내가 그렇듯, 엄마도 푹신한 이불과 인형과 동물들에게 위로를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준 선물들이 생각만큼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때, 좀 많이 서운했던 것 같다.

엄마와 동거한 지 2n년차. 이제는 엄마를 위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소독액을 뿌려 끈적이지 않는 마루, 깔끔한 이부자리와 야채가 많이 들어간 맛있는 식사. 아, 우리 엄마는 정갈함에서 위로를 얻는구나.

각자의 위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애써 그 방식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다른 취향에 서글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서로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수만가지나 된다는 사실이 기껍다.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태그:#나를 위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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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사랑이 이긴다고 믿는 낭만파 현실주의자입니다. 반건조 복숭아처럼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구석이 있는 반전있는 삶을 좋아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모순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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