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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 시절의 노회찬 의원
 경기고 시절의 노회찬 의원
ⓒ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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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의원은 1983년 노동운동 현장에 가기 위해 서울기계공고 부설 직업학교에서 전기용접을 배웠다.
 노회찬 의원은 1983년 노동운동 현장에 가기 위해 서울기계공고 부설 직업학교에서 전기용접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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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이 자신의 안위나 출세(입신양명)보다는 '운동'이든 '정치'든 공적 가치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던 시기는 언제쯤이고, 그 계기는 무엇이었다고 보나?
"노 의원이 한 말로 얘기하면 '1972년 10월 17일'이다. 그날은 유신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당시 노 의원은 고등학교 재수를 하던 때였다. 재수학원이 끝나고 여의도 37번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 안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발표가 뉴스로 나왔다. 집에 가서 사회책을 열어보고는 '이건 말도 안돼, 내각제도 아닌데 왜 국회를 해산하지? 왜 정치 활동을 금지하지?' 집에 갔다가 광화문으로 나오니까 탱크가 와 있었다. 그 다음날 4.19혁명 때처럼 뭐가 터지는 줄 알았는데 조용해서 사회에 대해 굉장히 배신감을 느꼈다. 

노 의원은 자기가 공적·정치적 관심을 갖기 시작한 기원을 그날로 잡았다. 딱 그날 돈오돈수(頓悟頓修, 단박에 깨닫는 것)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1972년에 <다리>나 <창비>, <씨알의 소리> 등을 보면서 굉장히 많이 바뀌었던 것 같다. '서울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박정희 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잡지를 읽고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초심이 안 바뀌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공적 행동의 기원을 그날로 잡았다.

자기는 서울에 오지 않았으면 정치를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노 의원의 어머니가 워낙에 강하고 그에게 영향을 많이 준 분인데 어머니로부터의 탈출, 부산으로부터의 탈출이 노 의원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했다. 어머니한테 큰 문제의식을 느껴서가 아니다. 어머니의 훈육은 빈틈이 없는 실천하는 훈육이어서 노 의원이 이견을 달 수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한테 압도당했던 것 같다. '오늘은 잠이 안 온다. 엄마한테 한 대도 안 맞았기 때문에'라고 쓴 일기도 있다. 그런 점에서 탈출해서 서울에 온 것이다. 서울에는 외삼촌이 있었지만 외삼촌은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이렇게 완전히 변화한 상황에서 유신을 만나고,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는) 잡지를 만나고, 고등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난 것이 결정적이었다. 

중학교 때는 그런 모습이 잘 안 보였다. 말 잘하고 재밌고, '노괴물'라는 별명으로 반장도 했는데 시사 문제 등에 눈을 떴다는 증거는 없다. 평범하고 진부한 얘기를 쓰는 소년이었는데 서울에 와서 확 바뀌었다. 내부적으로는 그런 심성이나 관심사가 있었지만 부산에서 마주치거나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서울에서는 자유 속에서 그런  것들(잡지, 친구 등)이 동시에 들어오니까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재수하던 시절인) 1972년에 쓴 일기를 보면 '14년 후의 세계 정세'를 전망한다고 해서 남미, 중미, 북미, 동유럽, 남유럽, 유럽, 소련, 일본 등에 대한 정세 전망을 길게 써놨다. 깜짝 놀랐다. 아마도 그 당시에 읽은 잡지와 책에 있는 정보에다 본인 생각을 덧붙인 것일 텐데, 그때부터 세계가 자기의 인식 대상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왜 14년 후의 세계정세 전망을 하는가? 미래를 알아야 내가 뭘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그런 노 의원이 14년 후에 뭘 했냐 하면 1986년에 '인천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을 만들었다. 레닌이 20대 중반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든 조직('노동자해방투쟁동맹')인데 그것을 본받아서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

- 공간으로는 서울, 시대로는 박정희 유신독재 등이 공적 가치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인 것 같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노 의원의 기본 가치관이 부산 시절에 많이 형성됐는데 그는 '교과서'와 '학교'를 항상 강조했다. 그(교과서나 학교에서 배운) 가치관이 유신과 부딪친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게 아니라 부딪친 부분에서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 노 의원이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 박정희'라고 얘기한 것이 이해된다. 
"노 의원은 정말 도저한 현실주의자더라. 보통 사람들은 이상을 현실과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노 의원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상이야말로 어려운 현실을 어머니로 두고 태어난 게 아닌가 싶다. '나의 모든 이상은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은 '망상'이 된다. '현실이 이런데 나는 이런 이상을 갖는다'는 게 아니라 현실과 이상의 변증이랄까. 그런 부분이 선거제도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게 하거나(2010년 7월 한정위헌 결정) 2010년대 이후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이어진 것 같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이상이나 목표를 한국적 현실에서 풀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부분에서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 노선을 걸었다.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때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노 의원을 두고 '실사구시'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도력의 일사불란함보다는 조직원들에게 상대적 자율성을 주는 조직적 특징이 있었다. 수령론 밑에 산다거나 위(지도부)에서 지시하면 들어야 하는 조직 문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특징이 인민노련이 대거 검거된 이후에도 망가지지 않았던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은수미(사노맹 출신의 전 성남시장)의 박사 논문을 보니까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등 많은 조직들의 수명이 1년 안팎이었다. 지도부를 한 번 후리가리(경찰의 일제 단속)하면 조직이 싹 없어졌는데 인민노련은 안 그랬다. 20년 가까이 활동했는데도 계속 남아 이 팀들이 한사노당(한국사회주의노동당), 한노당(한국노동당)을 만들고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민노당(민주노동당)까지 왔다. 그런 조직 문화를 가진 데에는 노 의원의 실사구시가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국회의원 된 이후에도 실사구시를 강조했다. 세계에서 성공한 좌파들은 이념의 선명성보다 현실적인 실사구시 노선 때문에 성공했다고 했다. 심상정은 그런 노 의원에 대해 '진보적 실용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그런 부분이 강해서 골방 정치인으로 안 빠진 것이다."

"부모님에게 그렇게 했으니... 다른 걸로는 흔들릴 수 없는 사람"
 
1992년 3월 25일 옥중에서 부모님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1992년 3월 25일 옥중에서 부모님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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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의원은 1981년 '참당암'(선운사에서 걸어서 1시간 떨어진 암자)에서 '노동운동 투신'을 선택했다. 그래서 '참당암의 결의'라고 부른다.
 노회찬 의원은 1981년 '참당암'(선운사에서 걸어서 1시간 떨어진 암자)에서 '노동운동 투신'을 선택했다. 그래서 '참당암의 결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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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은 노회찬 의원이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참당암(선운사에서 걸어서 1시간 떨어진 암자) 결의' 4년 뒤인 1985년 부모님 앞에서 "공장에 다니면서 노동운동을 하고있다, 사회변화를 위해 운동의 길을 가겠다"라고 고백하고 선언했다. 참 쉽지 않은 풍경이다.        
"어머니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학자로 남을 거라 끝까지 생각했고, 아버지는 자기 일을 물려받았으면 했다. 아버지가 제약회사를 다니다가 동업이지만 제법 큰 화학회사를 경영했으니까. 그런데 노 의원은 자기가 운동을 하면서 가족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얘기했다. 가족들이 들으면 서운할 것 같은데 물론 이것이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의 자기 목표가 너무 선명하고 변하지 않은 것이다.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를 하려면 진보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를 하면 집권해야 하는데 집권은 개인이 아니라 정당이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일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동지'라고 하는데, 노 의원 표현으로는 '길동무'라고 하는데 본인한테는 이들이 정말 중요했다. 가족보다 더 중요하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1981년 참당암에서 두 가지 고민을 했다. 외삼촌 두 분이 다 현대사에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운동을 할까 말까 하는 고민이 아니었다. 1981년 참당암의 결의는 출가하는 심정으로 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슨 수를 써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바윗돌 같았다. 세상을 떠날 때도 그것 때문에 떠난 것 아닌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라'고 (유서에서) 당부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당을 얘기한 것이다. 굉장히 놀랍다. 저는 노 의원과 개인적으로 가깝지도 않고 사적으로 술도 잘 안 마시는 사람인데 3~4년 동안 평전 작업을 하면서 보니까 굉장히 훌륭한 정치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갈수록 많이 들었다. 물론 나는 절대 위인전을 쓸 생각이 없었고, 위인전을 쓰지도 않았다." 

- 감옥에 있던 1992년 3월 25일 부모님에게 쓴 장문의 편지는 노회찬 의원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고 탁월한 텍스트다. "단 한 순간도 후회하거나 신세를 한탄하는 일이 없이 꿋꿋하고 낙천적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제가 한 일에 대한 확신, 그 정당함에 대한 자부심, 이런 것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 모든 것들은 제가 국민학교에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개근상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면서 배운 내용이며 또 그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온 것들입니다. (중략) 비록 힘들 길이긴 하지만 그간의 노력으로 저는 일정한 역량을 쌓았고, 또 남달리 이런 일에 재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어린 학생들이 오직 정의감 하나 갖고 앞뒤 가리지 않고 화염병을 던지거나 밀가루를 뒤집어 씌우는 것과는 질이 다릅니다. (중략) 제가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불의와 타협하지는 않는지, 성실하게 일하는지 늘 관심을 갖고 채찍질해주시기 바랍니다." 1992년이면 나이가 서른 일곱인데 부모님한테 자기 얘기를 명확하게 해버렸다.
"서늘하기도 하고 단호하기도 하고. 당시 부모님이 출소하기 한달 전에 면회를 와서는 '출소하면 부산에서 같이 살자'고 하니까 좀더 분명하게 말씀드려야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부모님이 아직도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보기에 따라서 검찰이나 경찰에서 할 법한 애기를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느냐고 지적할 수 있는데, 매우 단호하고 서늘할 정도다. 본인은 출소해서도 부모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니까 단호하되 어머니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충분하게 설명하려고 한 것 같다. 여러 가지를 배려한 글이긴 한데 편지의 전체적 흐름에는 단호함과 서늘함이 있다. 부모님에게 그 정도로 했으니 다른 것으로 흔들릴 수 없는 사람이다. 노 의원의 여러 가지를 설명해주는 편지다. 노 의원의 20대 때 일기, 1992년  3월 25일 감옥에서 부모님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 이런 것들이 이 평전을 가장 중요하게 살려주는 것들이다. 그래서 본인이 썼어야 하는데 내가 쓴 것이 제일 안타깝다(웃음). 평전을 쓰면서 그것을 너무 많이 느꼈다."

- 이 장문의 편지는 왜 노회찬 의원이 노동운동가, 혁명가, 진보 정치인이 되었는지, 왜 평생 그 어려운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 그 동력이 무엇인지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노 의원이 왜 일관된 삶을 살았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텍스트 같다. 
"덧붙이면 노 의원이 몇 차례 한 얘기인데,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물어봤을 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가져라'라고 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거기에서도 눈에 띄는 표현이 '직업'이었다. 노 의원에게 혁명이나 정치를 하는 것은 젊었을 때 한때 잘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이 행복한 것인데 그런 차원에서 보면 노 의원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으면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정치를 잘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타고난 게 있었지만 어렸을 때 얼마나 노력했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운동선수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타고남에다 일상의 훈련이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도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연습하지 않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없다. 직업이 그런 것이다. 노 의원도 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노 의원이 노원, 동작, 창원 등 어디를 가도 전국구적인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지연이나 학연 없이 가는데 왜 유권자들이 지지했겠나? 자신들의 대표로서 괜찮겠다는 신뢰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정치인으로서 쌓아온 것에 대한 평가라고 본다. 노 의원은 자기의 '직업'에 충실했다.  

노 의원을 잘 아는 분 중 한 명이 이금희(아나운서)씨다. 이금희씨는 '저 사람은 진짜 정치인이다'라고 했다. 모든 가수나 배우가 '노래 정말 잘하네', '연기 정말 잘하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다. 정말 노래를 잘하고 연기를 잘하는 사람을 '진짜 가수', '진짜 배우'라고 하는데 이금희씨가 노 의원을 진짜 정치인이라고 한 것도 그런 측면에서다. 정치를 잘한다는데 그럼 정치를 잘한다는 게 뭐냐? 앞뒤가 다르지 않고, 말과 실천이 다르지 않고, 전후가 다르지 않고, 초지일관하면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서 사는 것이다. 이금희씨 본인도 많은 프로그램에서 많은 정치인들을 만났는데 '진짜 정치인'이라는 표현이 나온 사람은 노회찬뿐이라고 얘기했다. 인상이 좋아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운동, 진보정치, 동지들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은 진심"
 
1992년 민주노동당 창당 대회
 1992년 민주노동당 창당 대회
ⓒ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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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정치가 '공적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가장 가까운 정치인이 노회찬이지 않을까 싶다
"맞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폴리스(polis, 국가의 원형으로서의 정치체)에 관한 일이다. 노 의원은 정치적 삶 속에서 '슬기로운 이중생활'을 통해 숨통을 텄다. 노 의원이 정치 같은 공적인 일을 하는 자아와 다른 자아를 따로 두지 않고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의 구분 없이 하나가 된 것인지, 원래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의 갈등이) 있었는데 그것을 한 번도 (밖으로) 꺼내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데, 본인이 정치한 것을 후회했다거나 하고싶지 않다고 한 공식 기록은 딱 한 번 있다. 2012년 통합진보당을 나올 때 정치를그만둘까도 생각했다. (통합진보당의 분열로) 자기 인생의 의미가 거의 없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은 삶에 가깝도록 살려고 노력했고, 비교적 자기 기준에서 어긋나지 않게 산 사람이다.

노 의원이 얘기하길 '남이 못 알아주는 것은 어떻게 버틸 수 있지만 내가 나를 못 알아주면 존재가 흔들린다'고 했다. 마지막에도 존재가 흔들려서 떠나가 버리지 않았나? 내가 노 의원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말을 잘해서가 아니다. 흔들림 속에서도 일관성 있게 산 것은 대단하다. 결혼할 때 김지선 선배랑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가 이 상태에서 더 잘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 돈을 벌어서 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은 소중하고 중요하다. 노 의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일상이 유지되고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혁명이 별건가? 일상을 바꾸는 것이 혁명이다. 사람들은 권력을 바꾸는 것이 혁명이라지만 지난번 촛불혁명으로 권력이 바뀌었는데 일상이 안 바뀌지 않았나? 노 의원은 노동해서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삶을 원했는데, 본인은 그런 부분을 많이 제치고 살았다. 집 한 채 없이 떠나지 않았나?"

- 물론 저자는 평전에서 "오히려 노회찬은 다른 누구보다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았다"라고 평가했는데, 공적 가치와 온전한 자신의 삶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었을까? 물론 '슬기로운 이중생활'을 통해 그 양립을 어느 정도 해결한 것 같지만.  
"나는 노 의원이 운동이나 정치를 하면서 자신이 보상받은 것도 있다고 본다. 노 의원이 돌아간 지 1년 뒤에 장조카가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했는데, 노 의원이 어느 날 술을 거나하게 마신 다음에 조카에게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아냐? 진짜 재미있어서 그래'라고 했단다. 그때는 동작 보궐선거에서 떨어져 굉장히 힘들 때였다. 옛날 운동을 한 사람 중에 보상 심리를 가지고 '내가 이 고생하려고 운동했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노 의원은 이런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민주화운동 유공자 신청도 안 했다. 노 의원은 이미 자기 자신이 이 일을 함으로써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평전을 쓰면서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노 의원이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만나서 자기는 구원받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 이해가 안 됐다. 좀 잘난 척하는 것 같고, 자기를 과대포장하는 것 같았다. 종교적 언어까지 쓰면서 그러나 싶어서 이해가 안 되더라. 그래도 평전을 쓰면서 그 얘기를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이런 삶을 살기로 선택하면서 강력한 에너지가 된 것들이 있어서 '내가 잘 선택했구나, 내 인생에서 고뇌하고 흔들리고 하지 않고 이런 목표로 세상을 살 수 있겠구나' 이것을 확인하는 순간 구원이나 깨달음을 얻어서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 제가 여러 차례 한 인터뷰에서도 "왜 민주화운동 유공자 신청을 안 했나?"라고 물으니까 "오히려 내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신청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답변했다. 
"그게 노 의원의 진심이다. 김지선 선배도 '우리 남편은 정말 동지들 사랑했다'고 모란공원(장례식)에서 얘기했다. 사랑의 표현이 수줍음과 과묵으로 나온 것인지 모르지만, 즐거운 일이었고 그로 인해 자기한테 보상이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했다."

"평생 진보정당의 집권을 생각하며 살았다"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 고 노회찬 전 의원의 생애에 중요한 순간들을 그린 이창우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 고 노회찬 전 의원의 생애에 중요한 순간들을 그린 이창우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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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31일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 소속 의원 10명이 국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2004년 5월 31일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 소속 의원 10명이 국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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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의원은 노동운동을 거쳐 진보정당으로 나아간 첫 세대이고, 그 진보정당을 대중화해 원내 진출까지 성공시킨 첫 세대라고 본다. 
"노 의원은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만들고, 그 정당을 대중에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집권을 위해서 평생을 살았다. 앉으나 서나 집권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이다. 일부에서는 철딱서니 없는 얘기라든가, 너무 성급한 얘기라고 했는데, 진보정당 창당은 노 의원이 한 일이고, 집권은 노 의원이 하려고 한 일이었다. 정치인으로서 노 의원은 성공적이었는데 노 의원이 키우려고 했던 집권 주체인 정당은 과연 성공했는가? 이것은 다르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좌지우지할 문제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 정당은 지금까지만 보면 객관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2008년 분당되고(민주노동당), 2012년 다시 분당되고(통합진보당), 지금의 정의당은 세 번째 위기 상황이다. 당을 그만두니 마니 쪼개니 마니 그런 얘기가 나오고 있지 않나? 노 의원 본인이 가장 가슴 아파할 부분이다. 당이 커야 하고, 정당 리더십을 키워야 한다. 개개인의 리더십이 크다고 자동으로 정당 리더십이 커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10명의 국회의원(민주노동당)이 있었던 2004년에 이미 증명됐다. 개별 의원들 중에 크게 잘못한 사람은 없었지만, 정당으로서는 전국 단위 투표에서 2004년에 얻은 13.1%를 한 번도 상회한 적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뿌리내리는 게 어렵다는 현실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왜 어려운가? 1992년 민중당이 선거에서 실패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해체하자, 앞으로 전망이 없다고 하고, 빨리 당을 새로 만들자는 사람도 있었다. 노 의원은 진정추 시절에 당을 해체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당장 당을 만드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민중당이 왜 실패한지를 봐야 한다고 했다. 노 의원은 정파, 노동자 조직의 공식 지지가 없는 점, 선거법과 같은 제도의 문제 등 세 가지를 지적했다(그는 201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그런 지적이 유효하다고 봤다). 

그 세 가지 문제가 풀려서 1997년 권영길 후보가 대선 후보가 됐고, 정파들이 다 연합했고, 대중조직(민주노총 등)의 지지를 받아서 2000년 민노당 창당까지 갔다. 당을 만들자마자 선거제도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해서 성공했다. 이런 것을 만들어 놨는데 분당하니까(민주노동당) 노 의원은 자기 프로젝트가 다 끝났다고 했다. 그래서 2012년 다시 (통합진보당으로) 모였는데 다시 또 분당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 생존의 어려움, 분단, 강한 보수성 등을 따질 게 아니라, 내적역량의 문제, 리더십의 문제다.

노 의원도 2010년대 진보정의당에서 정의당으로 갈 때 당의 이름을 사민당(사회민주당)으로 바꾸고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자고 했던 데에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당 안에 있는 엔엘(NL, 자주파)과 피디(PD, 평등파)에다 유시민의 국참당(국민참여당) 계열까지 와서 진보 다원성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최소한 합의할 수 있는 강령적 측면이 사민주의라고 했는데 그것이 안 됐다. 아쉬운 대목이다. 

이런 통합적 리더십이 당 안에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실패한 것이다. 정의당에서 유시민, 천호선 등 국참당 계열 인사들이 대부분 나가고 정의당에 젊은 여성 정치인들이 새롭게 들어왔는데 이들이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아니지만 여성주의 가치들이 당에 들어왔으면 당 안에서 통합 리더십이 발휘돼야 한다. 

한국 사회가 분단돼 있는 한 엔엘과 피디의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다. 태극기부대가 미국 국기 성조기 들고 시위하는 것도 분단과 연관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갈등 구조다. 당 안에 분단, 자본, 젠더 등과 관련된 그룹들이 있고, 그 안에서 통합 리더십이 발휘돼야 하는데 구심이 없어졌다. 구심은 개인도 개인이지만 당을 구심으로 삼아야 원심력이 많이 발휘된다. 

정파 중심이라는데 모든 정당에 정파는 있다. 정파 입장에서 보면, 선거에서 자기 정파 사람들 찍어주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의 입장에서 보면 정파의 이해 관계와 다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이었다. 특정 정파가 박홍 신부와 연결된 비디오를 만들어서 '노회찬은 주사파 때려잡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것은 노선의 문제가 아니다. 대선을 통해서 2008년으로 도약해야 하는 시점에 정파 이익을 앞세운 것이다.

2012년도 마찬가지였다. 제 정파들이 다 자기 정파 이익을 앞세웠으니 부정 선거가 나온 것이다. 엔엘만 부정 선거했나? 그건 아니었다. (각 정파들이) 전국에서 똑같은 짓을 했다. 정당의 리더십을 세우고, 당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킬 것은 지켜야 했는데 그것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노 의원은 굉장히 쓸쓸하고 고독했을 것이다."

-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없었다면, 다시 모였던 통합진보당의 분당이 없었다면 지금 진보정당은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꿈꾸기가 어렵다. 정당이 선거를 앞두고 다시 정파들을 중심으로 공학적 이합집산을 하려고 한다. 일상에서 국민들을 살리려고 하는 노력을 많이 하지 않은 정당이 선거를 앞두고 당을 살리려고 노력해 봤자 효과가 없다. 일상에서 국민을 걱정하는 정당이 돼야 하는데 선거를 앞두고 당을 걱정하는 정당을 어떤 국민이 걱정해주겠나? 

이 얘기는 노 의원이 (민주노동당) 분당할 때 했던 얘기와 맥락이 같다. 그때 권영길 후보를 선거 패배의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노 의원이 공식적으로 얘기한 것은 '이것은 4년의 성과인데 왜 후보 요인으로 가느냐, 2004년에 예고편을 보고 지지했던 국민들이 4년 동안 본편을 본 후에 지지를 철회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정의당도 지금까지 한 것에 대한 평가인데 선거를 앞두고 이리저리 이합집산하면 어느 국민이 그 진정성을 알아주겠나? '지들 살려고 저러는 거지, 니네들이 우리를 살리려고 한 적 있어?' 노 의원이 '국민 살리려고 정치하지 않고 팔자 고치려고 정치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 노회찬 의원이 살아있었더라면 그에게 물어봤을 질문인데, 무엇이 현재 진보정당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고 보나? 
"노 의원의 대답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대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전에 한 얘기가 그에 대한 답일 것이다. 일상에서 국민을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이 축적된 것이다. 물론 정의당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노력했다고 (항변)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에게는 정치적으로 그렇게 안 보였으니까 그 결과에는 책임져야 한다. 노 의원은 강한 정당은 지지를 많이 받는 정당이지 노선이 선명한 정당이 아니라고 했다. 민족주의든 페미니즘이든 노선이 선명하지 않아서 안 된 게 아니다. 지지를 못 받았다는 것은 국민의 마음을 못 얻었다는 것이고,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것이다."

- 진보정당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17대 국회 개원 첫날인 2004년 5월 31일 10명의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함께 국회의사당에 들어서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아쉬움이 크다.
"내가 노 의원의 입장으로 돌아간다면 '그런 일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너무 좋겠다, 그러나 그 일은 단시간에 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진보정당들이 자기 혁신과 쇄신의 노력을 하고, 그것을 공동 실천해가면서 길게 봐서 할 일이다'라고 얘기했을 것 같다. 정의당 재창당 얘기가 나오지만 재창당 얘기는 2008년 진보신당 때부터 계속한 얘기다. 당시 노 의원도 '진보통합이 필요하지만 이대로 합쳐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헤어질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건데 그런 부분들(헤어진 이유)을 어느 정도 줄이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 없이는 무망하고 의미가 없다'고 얘기했다."

- 생전에 노회찬도 진보정당 위기의 원인으로 '진보정당의 분열과 무능'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맞다. 정치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민노당 초기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열성을 가지고 했지만 지금은 일할 만한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갔다. 그런 시대는 역사로는 기억하지만 잊어야 한다. 2004년에는(헌법소원 심판 청구로 얻어낸) 1인 2표제라는 제도가 상호작용했고, 민주노총과 전농의 확실한 조직적 지지가 있었고, 정파들이 연합했다. 새로운 시대에는 어떤 과제를 어떻게 풀 것이냐는 노 의원이 살아 있어도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공유할 수 있는 공집합을 끄집어내서 정치적 힘으로 만들어 내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사실 노 의원도 진보정당 안에서 이것을 제대로 못 했다. 진보정당에서 통합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구나 싶다. 노 의원이 팔로우십(followship)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진보정당에서도 리더들을 살려주고 세워주는 일이 필요한데 지나치게 흔들고, 명망가라는 것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본다. 돈으로 딴 명망도 아니고 대중투쟁을 하거나 대중과 함께해서 대중한테 얻은 명망인데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가? 노 의원은 명망이라는 단어 하나로 유명한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라고 본다. 집권의 주체는 당이고, 당도 사람이 하고, 정파가 하지만, 이해관계에서 정당을 우선에 둬야 한다는 것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안 해서 두 번(민노당과 통합진보당 분당)이나 분열한 것이다."
 
<노회찬 평전>을 집필한 이광호 작가가 6월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노회찬 의원의 삶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노회찬 평전>을 집필한 이광호 작가가 6월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노회찬 의원의 삶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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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①] "나는 '노회찬 위인전'을 쓰지 않았다" https://omn.kr/24mgg
 - [인터뷰③] "노회찬, 죽음이라기보다 자기 삶을 그렇게 정리했다" https://omn.kr/24ny6

태그:#노회찬 평전, #이광호, #노회찬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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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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