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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데카는 '독립'이라는 뜻이다
▲ 메르데카 광장 메르데카는 '독립'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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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권유로 방문한 말레이시아. 자정이 훨씬 지나 호텔에 도착한 탓에 다음날엔 늦잠을 잤다. 비 오는 아침, 말레이시아 택시 어플인 '그랩'을 통해 차를 타고 메르데카 광장으로 향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랩 기사는 이동하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영어로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와 앞 뒤 좌석 사이의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제법 막히는 도로 위에서 밖을 내다보다 영어 가사 사이 한국어가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듣는 노래다.

"저 노래는 뭐지? 우리말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자신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한 친구를 둔 탓에 할 수 없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까지 함께 끌려와 버린 동행(관련 기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구분을 못해서 벌어진 일). 그가 창 밖에 시선을 둔 채 담담하게 말했다. 

"피프티 피프티."

영어와 한국어가 50대 50으로 섞여 있다는 소리인가? 내가 대꾸를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동행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프티 피프티. 요즘 잘 나가는 케이팝 그룹인데 몰라? 이거 큐피드란 노래잖아. 좀 세상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

나도 모르게 입술이 반쯤 튀어나왔다. 뭔가 억울하다. 내 표정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쓰던 동행은 창 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저건 누군지 알아?"

차는 거대한 건물들이 늘어선 부킷 빈땅 거리를 걷듯이 움직이고 있었고, 동행의 손 끝이 가리키는 쇼핑몰 입구에는 내 눈에도 익숙한 여성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알아. 블랙핑크. 저건 리사."

"(리사 아니고) 지수. 바보야, 어디 가서 한국사람이라고 하지도 마."

 
독립 이전 이곳은 영국인을 위한 크리켓 경기장으로 이용되었다
▲ 메르데카 광장 독립 이전 이곳은 영국인을 위한 크리켓 경기장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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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넓은 광장 앞에 멈췄다. 비 때문에 말레이시아 국기가 휘날려야 할 거대한 깃대는 비어 있었다. '메르데카 광장'이다.

'메르데카'는 말레이어로 '자유' 또는 '독립'을 의미한다. 독립 전, 이 광장은 영국 군대와 정부에 소속된 인사들이 사용하는 크리켓 경기장이었다고 한다.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이 서 있는 잔디 위에서, 크리켓 경기가 열렸던 것이다.

1957년 8월 31일 자정, 영국의 국기인 유니언 잭이 내려가고 말레이시아의 국기가 올라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이로써 말레이시아는 1511년 포르투갈의 침략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일본 점령기를 거쳐 다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대를 마감하고 독립국으로 태어난다.

말레이시아와 북한 
 
95M 높이의 국기 게양대는 핸드폰으로 담기에는 너무 컸다
▲ 메르데카 광장의 게양대 95M 높이의 국기 게양대는 핸드폰으로 담기에는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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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큰 게양대의 높이가 95미터입니다. 아래 다른 깃대들에 비해 월등히 높죠? 프랑스가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에 선물한 것처럼 저 깃대는 북한이 만들어 줬다는 소문이 있어요. 말레이시아는 북한과 엄청 친하거든요."

쿠알라룸푸르에서 30년째 거주하고 있다는 한국인 가이드가 이렇게 알려 주었다.

말레이시아는 대한민국과 1960년에, 북한과는 1973년에 수교했다. 기간만으로 따지면 한국과의 관계가 더 친밀할 것 같지만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동남아시아 특유의 외교정책 때문인지 북한과 줄곧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전 세계를 통틀어 50여 개뿐인 북한의 대사관 중 하나가 말레이시아에 존재했고, 말레이시아 국민은 무비자로 북한을 관광할 수도 있었다. 북한산 석탄과 철광이 말레이시아에 도착했고 말레이시아산 팜유가 북한으로 건너갔다. 북한의 노동자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외화를 벌었고 학생들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말레이시아에서 주석(광물)이 많이 났다는 건 아시죠? 그런데 지금은 채굴량이 많이 줄었어요. 그래서 주석을 수입해서 가공하는 일을 많이 합니다. 그 주석도 북한에서 들여와요."

친밀하던 양국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은 2017년 2월이다. 북한 김정은의 이복 형인 김정남이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단교 상태긴 해요. 그런데 테러에 관계됐던 여자들도 다 풀려났고, 그냥 유야무야 조용히 넘어가는 분위기입니다."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 형인 김정남이 죽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공항 CCTV 화면이 당시 전 세계인의 안방까지 전달되었다. 암살에 동원된 사람들은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Siti Aisyah)와 베트남 국적의 도안 티 흐엉(Doan Thi Huong)이라는 두 명의 여성으로 보도됐지만(이들은 당시 TV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는 줄로만 알았다고 주장해왔다), 이후 다수의 북한 공작원들이 암살 직후 공항을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소재로나 어울릴 법한 '암살'이라는 행위가 벌건 대낮에 벌어진 것도 자극적이었지만, 수만 명이 이용하는 공항에서 대량 살상무기로 분류되는 'VX(맹독성 신경작용제)'가 사용됐다는 사실에 전 세계는 경악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공항에 왔던 사람들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생화학, 방사능 및 핵물질 대응팀을 파견해 공항을 청소하는 한편 북한 대사를 추방해 버렸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은 자국에 들어와 있던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출국을 금지했다.
 
1897년 영국 식민시대에 지어진 건축물. 시계탑 때문에 '쿠알라룸푸르의 빅벤'이라는 별명이 있다
▲ 술탄 압둘 사마드 빌딩 1897년 영국 식민시대에 지어진 건축물. 시계탑 때문에 '쿠알라룸푸르의 빅벤'이라는 별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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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양국의 관계는 곧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불과 일주일 후 말레이시아 정부는 김정남의 시신을 북한에 인도하는 대가로 자국 국민들을 무사히 데려온다. 겉으로는 화를 내고 분노를 표시했지만, 그 와중에도 수면 아래로는 치열한 외교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살인죄로 기소되었던 시티 아이샤는 구금 2년 뒤 공식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석방된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힘이었다. 3년 형을 받았던 도안 티 흐엉 역시 몇 달 후 풀려난다. 북한은 베트남에 비공식으로 사과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북한은 베트남과의 협력이 필요했다.

2019년 당시 총리였던 마하티르 모하마드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암살과 후계구도, 백두혈통과 장막 속 왕국의 일은 그렇게 잊히는 중이다. 이전의 좋았던 관계로 복원되기까지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지만, 자국 공항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이용해 테러를 벌인 나라에 보이는 분노치고는 냉정하고 차갑다.

외교에는 감정이 없다 

비 오는 메르데카 광장에서 외교에 대해 생각했다. 외교에는 감정이 없다. 자국의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상대에게 얻어낼 것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웃으며 손잡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외교의 현장이다.

참여정부 시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으로 한미 FTA협상단을 이끌었던 김현종 전 국가안보실 2차장은 외교관을 가리켜 "양복 입은 글래디에이터", 즉 검투사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자연인으로서 인간은 눈앞의 이익보다 감정이나 이념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외교는 무엇보다 자국민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자국민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하는 외교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양복을 입고 우아하게 손을 내밀지만, 글래디에이터가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 그 어려운 일을 지금 우리는 얼마나 잘 해내고 있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안의 브런치(https://brunch.co.kr/@zian/330)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동남아여행, #메르데카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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