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병원 복도.
 병원 복도.
ⓒ pexels

관련사진보기

 
"친절히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나가는 환자에게 종종 이런 인사를 들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무거워진다. 친절, 설명, 감사. 당연한 듯 연결되는 맥락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위화감이 있다.

여성 건강권을 화두로 활동해 오며,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착한 의사' '나쁜 의사'와 같은 이분법적 인식을 흔히 만나게 된다. '착한 의사' 프레임에 주요한 '친절'이란 항목은 의사의 말투나 표정 등 비언어적 요소에 적잖은 영향을 받고, 내원한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과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인식이 갖는 진짜 문제는 '착한 의사'에게 기대되는 의료서비스가 의사 개인의 선택적 수행으로 여겨지며, 의료시스템의 영역 혹은 환자 자신의 권리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환자가 의료를 '착한 의사'가 호의로 수행하는 '친절'의 영역으로 인식할 때, 이 친절은 매우 위험해진다. 전문지식을 가진 의사가 환자의 선택을 유도하거나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절을 앞세운, 착한 의사 이미지를 가진 의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상태라면 이러한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친절'이라 퉁쳐지는 영역에 대한 것이다. 환자들이 친절한 의사를 찾(아 헤매)는 가장 실질적인 이유는 '충분한 설명을 듣고 싶어서'다. 내 몸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고, 필요한 선택의 장단점과 선택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 내 몸에 어떤 의료적 행위가 행해질 것인지, 필요와 과정과 비용 전반을 충분히 인식하고 선택하고 동의하는 것. 의료인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묻고 듣고 상의해 결정할 수 있는 것. 환자들이 '친절'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내용이 충족되었다고 느끼는 진료실 안에서의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친절일까. 친절의 사전적 의미는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 고분함. 상대방을 만족하게 하는 자기표현'이다. 태도, 호의에 기반한 개인적 선택인 셈이다. 그러나 내원한 환자로서 의사에게 기대하는 친절의 내용은 충분한 설명과 상담이며, 곱씹어 볼수록 모든 의료인이 당연하게 수행해야 할 기본적 의무다. 감사할 대상이 아니라, 환자로서 응당 요구해야 할 당연한 권리다.

현 의료시스템 아래서의 장벽들
 
월경박람회에서 자궁 내 피임장치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월경박람회에서 자궁 내 피임장치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 박슬기

관련사진보기

 
여기까지 얘기한다면 '착한 의사'와 '나쁜 의사'에 대한 위험한 이분법을 공고히 하는 것에 그칠지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지극히 당연하고 기본적인 의료인의 설명 의무를 수행하기에는 현 의료시스템 속에서 매일 매 순간 넘어야 할 장벽이 몹시 버겁다.

첫째는 무엇보다 시간이다. 질경이나 초음파 등의 술기가 기본이고 탈의와 환복 시간도 진료 시간에 포함되는 산부인과의 특성도 있지만, 우선 예진부터 난관이다. 뿌리 깊고 오래된 여성혐오에 의해 여성의 몸에 대한 이해 자체가 현저히 부족한 현실에서, 내원한 여성 상당수는 자신의 증상에 대해 잘 알거나 설명하지 못한다.

외음부나 신체의 명칭을 에둘러 모두 '자궁'으로 통칭하는 경우나, 자궁이나 난소에 있는 종물의 경우 엄연히 다른 장기로서 진단과 예후가 전혀 다름에도 그저 '물혹'이라고만 뭉뚱그려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월경주기(월경 시작일부터 다음 시작일까지)와 월경 기간(실제 월경혈이 배출되는 기간)의 의미를 잘 모르거나, 월경혈은 더럽고 나쁜 피라서 많이 쏟아질수록 좋다는 왜곡된 인식 때문에 심각한 월경과다가 있어도 스스로 월경량이 '정상'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기존 병력과 현 상태를 하나하나 짚으며 확인하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진료 내용을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몸에 대한 깊은 편견과 몰이해로 인해 진료할 때마다 설명을 넘어 설득을 필요로 한다. 현재 내 몸은 어떤 상태인지, 왜 치료가 필요하고 왜 치료하지 않아도 좋은지, 환자가 자신의 몸에 대해 두려움과 혐오가 아닌 주체로서 인식할 수 있도록 단어를 골라내고 서사를 고심하며 설명하려 노력하다 보면, 주로 돌아오는 대답은 "나는 왜 이런 얘기를 처음 듣지요?"다. 이어 쏟아지는 질문들은 다음 재진 시에도 여러 번 반복되기도 한다.

이러다 보면 환자의 대기시간이 늘어나고, 하루에 감당할 수 있는 환자의 풀은 줄어든다. 설명과 상담은 진료의 기본으로 따로 수가가 책정되지 않기에 이는 병원 수익과도 직결된다. 의사가 개인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감당하더라도, 함께 일하는 의료인들의 노동강도 역시 묵과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병원에서도 쉽게 지지받기 어려운 것이 먹먹한 현실이다.

지금까지 봉직의로서 일해 온 나의 경험에서도 그랬다. 환자의 권리나 의사의 의무 등등은 입 밖에 꺼내기조차 힘들었고, 신기루처럼 서글프게 흩어졌다. 이런 진료를 '고집'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스타일' 정도로 여겨졌으며, 마음이 약해서, 환자 말을 적당히 끊어내는 스킬이 없어서, 환자를 잘 꼬드겨서 검사나 시술을 더 받게 만드는 능력이 없어서라는, 유약 혹은 무능한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감내해야 했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가장 무거운 장벽이었다.

"설명을 잘 못 들었어요"라는 말... 마음 한켠이 욱신

끝을 알 수 없는 터널 같았던 고민의 시간을 지나, 새로운 근무지에서 진료를 시작한 지 막 3개월이 됐다. 이곳에선 이러한 고민을 함께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선택의 이유였다.

"다른 병원에서 검사받았는데 결과 설명을 듣고 싶어요." "대학병원에서 수술하라고 했는데 설명을 잘 못 들었어요. 여기서 상담하고 싶어서 왔어요."

매일 이런 환자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 한켠이 욱신욱신한다. 왜 자신의 몸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위해 작은 마을 의원에까지 찾아와야 할까. 그러면서도 또다시 째깍째깍 시계소리가 들리고, 바깥의 대기 환자를 헤아려보고, 진료실 내 간호사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가슴이 쿵쿵 조급해진다.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충분한 설명'이란 친절과 호의가 아닌 환자의 정당 한 권리로서, 모든 의료인에게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되도록 지켜내고 싶다. 누군가의 희생이나 헌신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해도 괜찮은 지속 가능한 방식일 수 있도록, 새로운 동료들과 매일의 실체를 이곳에서 공고히 쌓아가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박슬기씨는 산부인과 전문의이자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후원회원입니다. 이 기사는 한노보연 월간 일터 5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진료_정보, #환자_설명받을권리
댓글24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