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선재길은 일제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 선재길 입구 선재길은 일제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 이보환

관련사진보기


매년 이 맘때면 남녘부터 시작된 꽃소식이 경상도를 지나 충청, 강원도로 넘어간다. 피고 지고, 매년 반복되지만 그래도 자연이 전하는 안부에 설레는 날들이다. 지난 1일 만우절 오대산 월정사를 찾았다. 오늘은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시작해 오대산 등산로 입구인 상원사까지 선재길을 걸을 참이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월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다. 월정사는 문화재구역으로 입장료가 있다. 성인은 1인 5천 원이며 입구를 통과할 경우 주차비까지 별도로 5천 원을 지불해야 한다.

매표소를 통과하자마자 성보박물관이 나타났다. 월정사의 문화적 가치와 역사를 대변한다. 1999년 10월 개관하여 2000년 7월 제1종 불교전문박물관으로 등록했다. 월정사는 물론이고 강원 남부의 60여 개 사찰에서 간직해온 유물을 보존, 전시, 연구하고 있다.

유서 깊은 월정사와 아늑한 둘레길 

월정사의 역사는 깊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고 지었다고 한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산 전체가 불교 성지다.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중창한 상원사와 함께 왕실과 관련이 있는 원찰의 기능을 했다.

월정사에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팔각구층탑, 석조보살좌상이 남아 있다. 팔각구층석탑은 송나라 탑 양식이며 1962년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보수중으로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고려의 굳센 기상은 온몸으로 전해왔다.

차도를 피해 걷다보니 도로 아래 아늑한 둘레길이 나왔다. 차를 탔다면 이 둘레길은 그냥 스쳐지날 수 있겠다. 둘레길 곳곳 걸음을 멈추게 하는 질문이 나온다. "신라 성덕대왕과 오대산 상원사 동종과는 어떤 관계인가?" 답이 있는 장소를 힌트로 남겨 관광객이 직접 찾도록 하였다. 지난 시간 암기 위주 수동적인 수업에 익숙한 내게 자기주도학습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래도 문제를 되뇌이며 답을 찾아 기억 창고에 저장한다.

발걸음이 봄바람에 맞춰 속도를 낸다. 나무그늘 틈으로 들어온 봄볕은 주변 경관을 빛나게 한다. 징검다리를 연상케하는 길 양옆 경계석 돌다리에 잠시 걸터 앉았다. 물에 비친 햇볕과 나무를 감상했다.
 
무장애 탐방로인 이곳은 남녀노소 누구나 사시사철 걷기 좋은 길이다.
▲ 월정사 전나무숲길 무장애 탐방로인 이곳은 남녀노소 누구나 사시사철 걷기 좋은 길이다.
ⓒ 이보환

관련사진보기


바람을 타고 춤추는 물결이 봄볕과 어우러져 눈부시다. 조용한 숲에서 들리는 새소리, 물소리는 딱 자기 몫만 하니 시끄럽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전나무숲 표지판이 반겨준다. '천년의 숲'이라 불리는 오대산 국립공원 전나무 숲은 광릉 국립수목원의 전나무숲,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소사의 전나무숲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전나무숲이다. 전나무는 예로부터 사찰 주변에 흔히 심는 나무였는데, 곧고 빠르게 자라는 데다 방화의 역할도 담당했다.

월정사의 일주문부터 금강교까지 파란하늘이 전나무 꼭대기에 앉아 쉰다 . 피톤치드 향이 흙길과 짝을 이루니 몸과 마음이 가볍다. 오대산에 사는 식물부터 곤충이 아니라고 선언한 거미, 숲의 시작이 되는 이끼와 곰팡이까지 안내판에서 배웠다.

이끼는 나뭇잎처럼 이물질을 거르는 장치가 없어 많은 미세먼지를 정화한다고 한다. 쓰러진 나무를 뒤덮고 있는 푸른 이끼가 죽은 나무에 영혼을 불어 넣어주는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600년 수령을 자랑하다 쓰러진 할아버지 전나무의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텅 빈 나무 속은 숲속 작은 동물들의 놀이터가 되어주리라.

겨우내 꼼짝 않던 나무가 봄을 맞아 싹을 내는데 다 같은 것이 아니었다. 꽃눈, 잎눈, 혼합눈으로 구분되는 새싹의 종류를 배웠다. 싹틔운 나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꽃이 되는 꽃눈, 잎이 되는 잎눈, 꽂과 잎이 함께나는 혼합눈을 구분해 본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것이 자연 생태계다.

선재길의 다섯 가지 테마 속으로 

자연과 발맞추니 걸음마를 막 뗀 아기처럼 더디게 걷는다. 상원사로 향하는 선재길과 가까워진다.

'깨달음, 치유의 천년 옛길'

선재길 시작을 알리는 대문이 활짝 열려있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을 뚜벅뚜벅 발걸음이 달래준다. 선재길은 우통수가 흐르는 오대천 계곡을 따라 월정사~상원사 9km에 걸쳐있다.

우통수는 달천수, 삼타수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수(名水)로 한강의 발원지이다. 물의 빛깔이 곱고 맛 또한 다른 물보다 훌륭하다는 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선재길은 시대를 반영한 다섯 개의 테마로 구분됐다. 산림철길, 조선사고길, 거제수나무길, 화전민길, 왕의 길! 그 시절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문수보살의 지혜와 깨달음을 얻기위해 길을 떠난 <화엄경>의 선재동자를 뒤따라 걷는다. 오솔길에 퍼져있는 진한 숲향기에 정신이 맑아졌다. 시공의 조화속에 빛바랜 데크길은 어머니의 손 때 묻은 유품을 떠올리게 한다. 맑고 고운 새소리가 그리움을 달래준다. 
 
일제 강점기 오대산 산림을 벌채하던 협궤 레일이 있던 곳이다.
▲ 산림철길 일제 강점기 오대산 산림을 벌채하던 협궤 레일이 있던 곳이다.
ⓒ 이보환

관련사진보기


첫번째 관문 산림철길은 일제 강점기 오대산의 울창한 산림을 벌채하기 위해 상원사까지 협궤레일을 깔아 놓았던 곳이다. 소나무, 박달나무, 참나무 등 27종의 나무를 1927년부터 해방전까지 주문진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해 갔단다. 그 기록에 가슴이 먹먹하다.

이렇게 깊고 깊은 산골마을까지 일제 잔재가 남아있다니. 일제 강점기 우리 선조들이 겪었을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널찍한 일제강점기 제재소 터가 산림철길 마무리 장소다. 제재소터 주변에 유물은 없으나, 기록과 증언을 통해 노동자와 화전민의 생활 터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가 조선왕조실록 등을 반출해갔던 오대산사고가 있던 터다.
▲ 조선사고길 일제가 조선왕조실록 등을 반출해갔던 오대산사고가 있던 터다.
ⓒ 이보환

관련사진보기


두번째 테마길은 조선사고길이다. 조선왕족실록과 의궤를 보관하던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의 하나인 오대산 사고 터가 있다. 오대산 사고는 조선왕조실록 788책이 있었으나 일제가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했다. 간도 대지진 때 대부분 불탔고 27책만 1932년 우리나라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왔다. 일본은 2006년 또 다른 47책을 우리나라에 넘겨 오대산 사고본은 현재 74책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걸어가는데 멀리 특이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강원도 영월 주천강에서 본 섶다리다. 낮은 강에 임시로 만든 목교다. 요즘 말로 시즌 상품이라 할 수 있겠다. 물에 잘 썩지 않는 물푸레나무와 버드나무로 기둥을 세운다. 소나무 또는 참나무로 상판을 만들어 솔가지나 잎이 달린 잔가지를 엮어 깔고 그 위를 흙으로 다진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들어있다.

푹신푹신한 섶다리를 걸으니 맘이 좀 풀린다. 계곡 물소리까지 기분좋다. 졸졸졸, 콸콸콸. 어느 때는 작고 나즈막했다가 걸음이 뒤쳐지면 우렁찬 소리로 이끌어준다.
 
거제수 수액이 물 가운데 으뜸이라고 친다. 봄철 이물을 마시면 건강에 좋다고 알려졌다.
▲ 거제수나무길 거제수 수액이 물 가운데 으뜸이라고 친다. 봄철 이물을 마시면 건강에 좋다고 알려졌다.
ⓒ 이보환

관련사진보기


세번째 거제수나무길에 도착했다. 우리 조상들은 '곡우' 전후로 '곡우물'을 마시면 잔병 없이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거제수 수액이 으뜸이었다. 자작나무과 거제수나무 수액은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전해진다. 양이 너무 적은 데다 상하기 쉬워 대단히 귀한 존재였다.

수북히 쌓인 돌탑이 오가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서있다. 봄볕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산 속 폭포는 한겨울 그대로 모습이다. 저 얼음 폭포도 며칠만 지나면 그 자취를 감추리라. 갈골교를 건너 숲길을 벗어나자 상원사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4.3km 남았다고 알려준다. 이제 중간지점까지 왔다.
 
화전민의 역사도 아프다.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반출할 벌목공들이 살던 화전민촌이 있다
▲ 화전민길 화전민의 역사도 아프다.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반출할 벌목공들이 살던 화전민촌이 있다
ⓒ 이보환

관련사진보기


이어지는 곳이 화전민길이다. 일제는 오대산의 울창한 산림을 벌채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150여 가구 300여 명의 일꾼들은 여름이면 화전을 일구고 겨울에는 벌목으로 생활했다. 해방이 되고 1975년 오대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을때도 화전민 마을은 일부가 존재했다. 1968년 화전민정리법이 공포됐으나 실제 화전민 이전 정착사업이 끝난 것은 1976년이었다.

나무그늘에 가려져 있던 파란하늘이 반겨준다. 화전민길은 다른 구간보다 울퉁불퉁한 돌길이 많다. 흔들다리를 건너자 당시의 화전마을 흔적이 나온다. 집 한 채가 남아있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건지 빈집인지 알 수가 없다. 통나무로 만든 시소를 보고 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반대편에서 오던  중년 부부가 멈춰섰다. 아내가 시소에 앉으며 남편에게 건너편에 앉으라고 권하니 반응이 시큰둥하다.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툭하고 웃음이 나왔다.
 
오대산은 세조와 연관이 깊다. 월정사와 상원사는 수호사찰의 기능을 한 만큼 다양한 설화가 존재한다.
▲ 왕의길 오대산은 세조와 연관이 깊다. 월정사와 상원사는 수호사찰의 기능을 한 만큼 다양한 설화가 존재한다.
ⓒ 이보환

관련사진보기


오대산 선재길 마지막인 왕의 길과 마주한다. 상원사는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유명하다. 

'오대산사기'에 따르면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1418~41)의 저주 때문에 세조는 피부병(창병)을 얻었다. 강원도 순행 2년 전인 1464년(세조10년) 백일기도를 마치고 상원사 앞 계곡에서 혼자 목욕을 하던 중 동자를 만나 등을 밀어달라고 한다. 세조는 동자에게 "어디가서 왕의 등을 밀었다고 얘기하지 마라"고 했다. 동자 역시  "왕께서도 문수보살이 등을 밀어주었다고 하지 마십시오" 했단다. 

세조는 병을 고쳤고 화공에게 문수동자를 그리게 하여 상원사에 봉안토록 했다. 상원사 입구에는 세조가 목욕할 때 어의를 걸었다는 '관대(冠帶)걸이'가 있다.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여유롭게 걸어서인지 상원사입구까지 3시간 30분 가량 소요되었다. 걷는 내내 일제 36년 등 우리의 역사를 생각하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경주 최부자의 자손인 중년 남성의 인터뷰였다. 전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쾌척한 최부자의 후손은 "당시 살기 힘든 기층민들까지도 국채보상운동에 힘을 보탰다"면서 "그런 분들이 계셨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지만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역사는 몇몇 사람이 단시간에 바꾸거나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천단양뉴스(http://www.jdnews.kr/)에 실립니다.


태그:#제천단양뉴스, #이보환, #걷기, #김영환충북지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청권 신문에서 25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2020년 12월부터 인터넷신문 '제천단양뉴스'를 운영합니다.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다짐합니다. 언론-시민사회-의회가 함께 지역자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