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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4월, 유후공원에서 중국 공작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1939년 4월, 유후공원에서 중국 공작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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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이 가족과 함께 충칭에 도착한 것은 열한 살 때인 1939년 4월이다. 이후 귀국 때까지 7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중학교를 다닌 곳도 충칭이었다. 처음에는 시내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중리런(立人) 중학교여서 기숙사에 들어가 1학년을 마치기 전에 그만 학질에 걸리고 말았다. 시험을 보지 못해 낙제의 위기였다. 

그때 행운이 다가왔다. 우리 집 앞에 새 중학교가 문을 연 것이다. 청화(淸華)중학교였다. 병세가 호전되자 나는 2학년으로 편입해 다시 학업을 계속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학교는 베이징에 있는 명문 칭화대(淸華大)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칭화중학 설립에 나섰던 사람들이 전부 칭화대 출신들이라고 했다. 당시 국공합작을 위해 충칭에 머물고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도 학교 개교에 관여했다고 들었다. (주석 5)

일제 강점기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인들로부터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왕궈누(亡國奴)' 즉 "망한 나라의 노예"란 뜻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을 두고 한 말이었다. 김자동이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중국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말다툼을 하게되면 어김없이 '왕궈누'란 말이 튀어나왔다. 

한 번은 덩치가 큰 중국 아이와 놀다가 '왕궈누'란 말에 들고 있던 우산으로 찔러 상처를 입힌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욕은 다 참아도 '왕궈누' 소리가 나오면 가만두지 않았다." (주석 6)

옛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와 나라를 잃은 '망국노'에 똑같이 '노예 노(奴)'자를 썼다. 나라 잃은 망국의 책임이 국민(백성)에게도 있다는 뜻일게다.

망국의 설움은 어린 내게도 이따금씩 밀려왔다. 부모님을 포함해 내 주변의 어른들은 모두 항일독립운동가였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게 됐다. 장시성에 살던 시절 한 시사잡지에서 스페인 내전과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략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정부군 쪽에서 열 몇 살 소년들이 총을 들고 싸우는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는 나도 덩달아 분개했다. 우리나라의 일이 아닌데도 "내가 조금만 나이가 있어도 가서 싸울 텐데"하는 생각을 했다. 동병상련의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석 7)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이 기념사진을 찍은 류저우 류후공원 (위) 아래는 현재의 모습
▲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이 기념사진을 찍은 류저우 류후공원 (위) 아래는 현재의 모습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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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이 아직 류저우에 머물고 있던 1939년 2월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결성되었다. 임시정부 계열의 세 정당이 만든 연합체였다. 이 조직은 별도로 청년공작대를 만들고 공작대에는 소년대도 있었다. 그는 같은 독립운동가 자녀인 오희옥·엄기선 등과 함께 소년대원으로 참여했다.

당시는 중일전쟁 초기여서 사망자와 부상병이 많았다. 주민들과 상이군인을 위로하고 항일선전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그해 3.1절 기념행사의 일부로 쑨원(손문)의 부인 씅칭랑이 이끌던 '상병지우(상이군인의 벗)'와 함께 상이군인 위문과 모금을 위한 공연을 한 것이다. 행사는 류저우 대희원이라는 큰 극장에서 치러졌다. 나와 오희옥 등 청년공작대의 소년대원들도 무대에 올라 노래와 춤, 연극을 선보였다.

나는 중국인 연예단과의 공동연극에서 일제의 침략에 쫓겨 피난 가는 소년 역을 해 꽤 박수를 받았다. 막내둥이 여성대원 오희영은 나의 누나 역을 했다. 류저우에서 약 여섯 달 동안 머문 우리는 다시 충칭을 향해 이동했다. (주석 8)  


주석
5> <회고록>, 56쪽.
6> <회고록>, 62쪽.
7> 앞의 책, 62~63쪽.
8> 앞의 책, 6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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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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