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농 김가진과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손자 김자동(88)은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있다.
 동농 김가진과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손자 김자동(88)은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관련사진보기

 
김자동(金滋東)은 1928년 10월 17일 아버지 성엄(誠广) 김의한(金毅漢, 1900~1964)과 어머니 정정화(鄭靖和, 1900~1991) 사이에 장남으로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인근 아이런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한말 대한협회 회장과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등을 지낸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다.

할아버지가 3.1혁명이 일어난 1919년 10월 아들(의한)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74세의 고령이었다. 김의한은 부모의 주선으로 1910년 정정화와 결혼하였다. 정정화는 수원유수를 지낸 정주영과 이인화의 3녀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묘희(鄭妙喜)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망명한 뒤 큰 오빠 정두희가 대동단사건으로 일경에 구속되었다. 정묘희는 1920년 1월 초,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홀로 중국으로 떠났다. 이름을 정정화로 바꾸고 스스로 호를 수당(修堂)으로 지었다.

김자동은 망명 가족의 자식으로 이역에서 태어나 기구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가 출생한 1928년은 일제가 조국을 강탈한 지 18년 차에 이르러 악독한 식민지배 체제가 공고히 구축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사형·무기형을 추가하는 등 항일운동을 더욱 옥죄고, 구월산의 단군사당을 강제로 철거하는 등 민족사상의 모태까지 짓밟았다. 

이런 속에서도 국내에서는 노동쟁의, 소각쟁의가 잇따랐으며, 1929년 1월 원산에서는 총파업이 전개되는 등 민족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고 이에 동조하여 서울에서 민중대회가 준비되었다. 이와 관련 총독부는 신간회 간부 44명과 자매단체 근우회 간부 47명을 검거했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일제로부터 국토와 주권, 국민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시'로 세운 정부였다. 상하이에서는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도 대표 29인이 4월 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비록 망명정부일 망정 유사 이래 처음으로 민주공화제 정치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일었다. 내정된 국무총리 후보 이승만의 적격성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회영·신채호·박용만 등 무장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이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하고, 의정원에서 이승만이 선출되자 이들은 회의장에서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이승만은 상하이로 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한성정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 사이 3·1혁명 이후 여러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각 정부가 추대한 정부 수반이나 각료가 상호 중복되어 있고 또 국내외 각지에 떨어져 활동하고 있어 미취임 상태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임시정부는 기능이 공백상태에 빠져들었고 원활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일정부로의 통합이 모색되었다.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이며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8월말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및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 정부와의 통합과 정부개편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수 차례의 논의 끝에 9월 6일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정부 수반의 호칭을 대통령으로 하는 새 헌법과 개선된 국무위원 명단이 발표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정부령 제1호와 제2호를 반포하여 내외 동포에게 납세를 전면 거부할 것(제1호)과, 적(일제)의 재판과 행정상의 모든 명령을 거부하라(제2호)는 강력한 포고문을 발령하였다. 그리고 국내조직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한 데 이어 해외에는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관리하에 두었다. 연통제는 지방행정조직이고 교통국은 비밀 통신조직이었다. 국내의 무장·사상투쟁을 위하여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두고 1개 면에 1개의 교통소를 설치하도록 하고, 연통제는 각 도와 각 군에 지방조직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1920년 말부터 일제의 정보망에 걸려 국내의 지방조직이 파괴되고, 3·1혁명의 열기가 점차 사그라지면서 국내의 독립기금 송금과 청년들의 임시정부 참여가 크게 줄어들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선임을 둘러싸고 외무총장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 이어 이회영·신채호 등 무장투쟁 주창자들이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올라가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가 러시아 정부가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여 물의를 일으키다가 1921년에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동녕→신규식→노백린이 차례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정부를 이끌만큼 불안정한 상태로 운영되었다.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20년 12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반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무슨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못하였다.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떠나는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이동녕·이시영·노백린·손정도 등을 새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하였다.

당시 만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한 무장독립전쟁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대한광복군, 광복군총영, 의열단, 의군부, 대한신민단, 혈성단, 신대한청년회, 복황단, 창의단, 청년맹호단, 학생광복단, 자위단 등이 결성되고, 특히 1911년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강력한 군사훈련을 통해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연대하여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를 통해 국치 이래 최대의 항일대첩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실현성이 취약한 '외교독립론'에 빠져 있었다.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 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년 5월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얼마 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였다. 

이런 분란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일제패망 때까지 27년 동안 항일민족해방투쟁의 본거지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상해임시정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언론인 송건호와 학문적 동반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