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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편집자말]
개조파 중심으로 구성된 임시의정원은 개원하자마자 가장 먼저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문일민도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그는 1925년 3월 13일 곽헌·최석순·고준택·강창제·강경선·나창헌·김현구·임득산·채원개 등과 함께 이승만의 실정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탄핵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들이 제시한 이승만 탄핵의 사유는 '국무원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인민들의 납세를 중단시키는 등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 '정무를 총괄해야 할 대통령이 정부를 둘로 쪼개어 분열시킨 것', '헌법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는 대통령이 오히려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을 부인한 것'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을 들어 문일민 등 탄핵안을 상정한 의원들은 "현임 임시대통령의 무법행동은 하루라도 묵과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성토했다.
 
1925년 3월 13일 문일민·곽헌·최석순·고준택·강창제·강경선·나창헌·김현구·임득산·채원개 등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실정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탄핵을 촉구하기 위해 제출한 '결의안'의 일부
 1925년 3월 13일 문일민·곽헌·최석순·고준택·강창제·강경선·나창헌·김현구·임득산·채원개 등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실정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탄핵을 촉구하기 위해 제출한 '결의안'의 일부
ⓒ 신한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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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안 처리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결의안이 제출된 지 5일 만인 3월 18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 탄핵안이 가결됐다. 이에 따라 이승만 탄핵안이 정식으로 탄핵 심판에 회부됐다. 탄핵결의안 제안자들 중 나창헌(위원장)·곽헌·채원개·김현구·최석순 등 5명이 심판위원으로 선정됐고 심의 결과 3월 23일 마침내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免職)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승만 면직안이 통과되는 동시에 즉석에서 임시대통령 대리였던 국무총리 박은식이 정식으로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박은식 내각은 곧바로 임시헌법 개정에 착수하여 3월 30일 '임시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4월 7일 이를 정식으로 공포함으로써 개조파가 주도하는 임시정부 쇄신운동을 마무리했다.

개정 임시헌법은 임기 제한이 없는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임기 3년의 국무령(國務領)제를 도입한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었다. 개정 임시헌법은 제4조에 "임시정부는 국무령과 국무원(國務員)으로 조직한 국무회의의 결정으로 행정과 사법을 통판(統辦)함"이라고 못 박음으로써 대통령 한 사람에게 과도한 권한이 집중되어 있던 기존의 '대통령중심제'를 폐지하고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다.

이승만 탄핵과 임시헌법 개정 등 일련의 혁신을 마무리한 박은식은 그해 7월 7일자로 임시헌법이 시행되자 바로 사퇴했다. 그리고 새 헌법에 따라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 선거를 진행한 결과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 이상룡이 선출됐다.

만주 정의부에서 독립군 양성

그런데 이 무렵 문일민은 돌연 만주로 떠났다. 그가 향한 곳은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였다. 1926년 그는 정의부의 군사참모주임(軍事參謀主任)이 되어 독립군의 훈련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왜 갑자기 만주행을 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윈난육군강무학교 등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 그의 이력에 비춰봤을 때 그는 기질적으로 정치인보다는 군인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정쟁만 일삼는 임시정부에 남아있기 보다는 독립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한편 정의부의 간부였던 오동진은 광복군총영 시절 문일민의 상관으로 평남도청 투탄 의거 당시 그를 평양에 보낸 장본인이었다. 어쩌면 옛 상관으로부터 만주로 돌아와 후진 양성을 위해 힘써달라는 연락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 위치해 있던 '정의부' 본부 터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 위치해 있던 '정의부' 본부 터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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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민은 정의부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힘쓰다 1928년 군사 파견 연락 임무를 띠고 정의부 특파원이 되어 광둥(廣東)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장제스(蔣介石)가 교장으로 근무하던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교섭(交涉)으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황푸군관학교 재학생·교관 명단에서 아직까지 문일민의 이름은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황푸군관학교에서 수학했거나 근무했던 것 같지는 않다.

정의부 특파원·교섭이라는 직책에 비춰봤을 때 정의부에서 파견하는 유학생들의 입교를 주선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실제로 정의부에서는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해 광둥이나 러시아 지역의 무관학교로 보내 독립군 지도자로 육성할 계획을 추진한 바 있기 때문이다.

중국군에 입대해 북벌 참여
 

그런데 당시 중국 대륙은 군벌들이 할거하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에 국민당 정부는 군벌을 타도하고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장제스를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총사령관으로 하여 북벌(北伐)을 추진했다.

당시 중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한인 학생들 역시 국민혁명군에 가담하여 북벌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실전 경험을 통해 장차 독립전쟁을 위한 역량을 기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가 북벌에 참여하는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1926년 추정)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가 북벌에 참여하는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1926년 추정)
ⓒ 위키피디아 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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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민의 경우 1929년 당시 중국혁명군 상교고급참모(上校高級參謀: 한국군의 대령에 해당하는 계급)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의부로 복귀하는 대신 국민혁명군에 몸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역시 중국군 고위장교로서 북벌에 참여했다고 한다. 문일민 또한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듯 실전 경험을 통해 최신 전략·전술을 익혀 독립전쟁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는 지속적으로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행보를 보였다. 문일민은 1928년 2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특별회원으로 가입했는데, 해당 조직은 '독립전쟁을 위해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병력과 100만 원 이상의 군자금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창립된 단체였다. 1931년 9월에는 김철·박창세·이웅·왕웅(김홍일) 등과 함께 한국군인회(韓國軍人會)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독립전쟁을 일으키기에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독립운동 진영의 역량은 한참 부족했다. 결국 야심차게 조직한 노병회나 군인회와 같은 조직도 점차 유명무실화됐고, 이에 따라 문일민 역시 뚜렷한 활약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 10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1) <신한민보>
2) 흥사단, <제239단우 文逸民>, 1930.5.13.
3) <문일민 이력서>
4) <愛國志士 故 文一民 功績書>, 1968.10.22.
5) 李記者, <殺身成仁의 文一民氏의 壯志>, 1947
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2·27·32, 국사편찬위원회, 2005·2008·2009
7) <자료한국독립운동> 2,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2
8) 在上海 日本總領事館, <朝鮮民族運動年鑑>, 동문사서점, 1946
9)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20, 국사편찬위원회, 1973·1991
10) 김홍일, <大陸의 憤怒>, 문조사, 1972
11) 김희곤, <中國關內 韓國獨立運動團體硏究>, 지식산업사, 1995
12) 나창주, <새로 쓰는 중국혁명사 1911-1949>, 들녘, 2019
13) 반병률, <통합임시정부와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신서원, 2019
14) 채영국,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15) 한상도, <韓國獨立運動과 中國軍官學校>, 문학과지성사, 1994
16) 신재홍, <吳東振 硏究>, 《國史館論叢》 4, 국사편찬위원회, 1989
17) 한상도, <黃埔軍官學校와 韓人獨立運動>, 《國史館論叢》 41, 국사편찬위원회, 1993

태그:#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정의부,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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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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