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편집자말]
문일민의 평남도청 투탄 의거 성공으로 고요하던 평양의 밤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놀란 일제는 경찰은 물론 소방대(消防隊)까지 비상 소집해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미 문일민의 거사로 평양 일대의 경계가 엄중해진 상황이었음에도 장덕진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평양경찰서까지 달려가서 또 한 번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심지의 불이 꺼지는 바람에 2차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폭탄 투척을 포기하고 도주하던 장덕진은 권총으로라도 적을 사살하겠다고 마음먹고 추격하는 일경 2명을 사살한 뒤 무사히 약속장소로 귀환했다.

박태열은 당시 격전으로 죽고 다친 일경의 숫자를 수십 명으로 파악했다. 광복군총영 폭탄대원들이 각기 장소에서 거사 후 도주하는 과정에서 적과 치열한 격전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일제 법원에 안경신 구명을 위한 탄원서 보내

거사 실패 후 안경신은 기자림(箕子林)에서 문일민을 만나 폭탄 한 개를 건네받았다. 평양경찰서를 향한 폭탄 거사가 불발로 그친 데 대해 못내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제 가면 위험합니다. 같이 만주로 돌아갑시다."
"안 됩니다. 나는 꼭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야겠습니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 판단한 안경신은 폭탄을 들고 재차 투척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미 일제의 경비가 삼엄하여 불가능했다. 임신 중이던 안경신은 함경남도 이원(利原) 최용주(崔龍周)의 집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됐다.

안경신을 제외한 나머지 광복군총영 폭탄대원들은 일제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8월 하순경 안쯔거우 본부로 귀환했다. 

일제는 1심에서 안경신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안경신은 사형 선고에 불복하여 즉각 항소했다. 일제 법원은 2심에서 치안 방해와 폭탄 투척 공모 혐의로 징역 10년을 최종 선고했다.  
1927년 12월 17일 <조선일보>에 실린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모습. 문일민의 삶을 추적하던 중 필자에 의해 발굴된 안경신의 사진이다. 2021년 9월 16일 <오마이뉴스>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초상화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안경신의 유일한 사진으로 알려졌다.
 1927년 12월 17일 <조선일보>에 실린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모습. 문일민의 삶을 추적하던 중 필자에 의해 발굴된 안경신의 사진이다. 2021년 9월 16일 <오마이뉴스>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초상화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안경신의 유일한 사진으로 알려졌다.
ⓒ 조선일보 DB

관련사진보기

   
여기에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전해오고 있다.

안경신의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때 중국 상하이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편지가 평양지방법원에 도착했다. 발신자는 문일민. 거사 후 무사히 상하이로 피신한 문일민이 안경신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 "폭탄 던진 사람은 여기에 있다"며 자신의 이름과 주소 및 행동 경위 등을 적은 탄원서를 보낸 것이었다. 

2심에서 안경신의 형이 대폭 감형된 배경에 문일민의 탄원서가 유효하게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일민은 끝내 탈출하지 못한 채 일제에 붙잡힌 동지를 잊지 않았다(당시 탄원서는 장덕진이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 광복단장 이탁과 연서하여 보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일제는 현장을 탈출하여 끝내 잡지 못한 문일민·박태열·장덕진·우덕선 등 나머지 광복군총영 대원들에 대해서는 궐석판결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4년 뒤 밝혀진 사실

평남도청 투탄 의거 14년 뒤인 1934년 10월 상하이에서 박태열이 일제에 체포됐다. 국내로 압송된 그를 취조하자 문일민에 대한 새로운 혐의가 드러났다.

거사 직후 다른 동지들과 함께 만주로 탈출한 줄 알았던 문일민은 사실 평양에 그대로 남아 또 다른 의열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문일민은 사건(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말함-인용자 주) 이후 평양에 그대로 잠복하여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잇다가 대정구년(1920년-인용자 주) 십이월 십구일 밤 평양사람으로서는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부내 계리(鷄里) 북금융조합 소사실(北金融組合 小使室)에서 동지 두 명과 자고잇든 중 평양서와 평남보안과의 련합수사대에 포위되여 피차에 교화를 하여 동지의 한 명이엇든 소사 문덕성(文德星)은 경관대의 탄환에 마저죽고 문일민은 다리에 일탄을 마저 중상을 밧고도 현장을 탈출하여 일로 순안(順安)에까지 가서 안식교에서 경영하는 병원에 약 일개월 동안이나 입원치료하여 가지고 만주로 간 사실이 새로 발견되엿다." - '平壤北金組襲擊도 朴大烈一行 所爲', <조선일보>, 1934.10.29.

위의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평양 북금융조합 총격전'은 1920년 12월 23일 군자금 모금과 관공리 암살을 위해 국내에 잠입한 광한단(光韓團) 단원들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강서지단(江西支團)의 도움으로 평양 북금융조합에 은신하고 있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총격전을 벌인 사건을 가리키는 듯하다(위의 기사에서는 사건 발생일자를 1920년 12월 19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해당 사건의 발생일자는 12월 23일이 맞음).

즉 문일민은 평남도청 투탄 의거 성공 후 즉각 탈출하지 않고 평양에 잠복하고 있다가, 12월에 광한단원들과 함께 평양 북금융조합(北金融組合)에서 총격전을 벌였던 것이다.

 
1934년 10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박태열의 사진
 1934년 10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박태열의 사진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사건 직후 보도된 기사를 좀 더 살펴보자.

"평양계리금륭조합(平壤鷄里金融組合)에셔 고용하고 잇난 박문학(朴文學)은 암살원과 군자금을 모집하난 광한단(光韓團)과 그 맥을 통하고 잇슬 뿐외라 동 단원을 자긔집에 잠복케 하고 잇다난 말을 들은 평안남도 제삼부에셔난 김경부(金警部)와 순사 삼 명이 그곳으로 그자들을 톄포키 위하야 츌장함애 우긔 박문학외 한 사람은 경관대에 대하야 육혈포를 발사하난 고로 경관대에셔도 응젼을 한 결과 박문학은 즉사하고 기타 일 명 도쥬를 하얏난대 목하 엄즁히 그 자를 톄포하려고 슈색 즁이라더라." - '平壤鷄里金融組合에셔 光韓團과 應戰', <조선일보>, 1920.12.25.

위의 기사에 의하면 광한단원을 숨겨준 이는 '박문학'으로 그는 일경의 총탄에 맞아 즉사했고, 다른 한 명은 도주했다고 한다(문덕성과 박문학은 동일 인물로 추정).

"김동수, 김용림, 김명희, 박션일은 공모한 대정구년 십이월 이십삼일경에 독립군자금 모집에 종사하난 젼긔 권총단원 김관셩이가 평양부 게리(鷄里) 북금융죠합(北金融組合)에셔 경찰관헌과 권총으로 격젼하야 부상을 당하고 도주하야 온 내뎡을 알고도 피고 김동슈 방에 일박(一泊) 박션일 방에 이박케하야 감쵸엇셧다더라." - '大韓獨立團 江西支團 公判', <매일신보>, 1921.4.3.

위의 기사는 1921년 3월 31일 평양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열린 대한독립단 강서지단장 김동수(金東洙)를 비롯한 단원 10명에 대한 공판 기사이다. 해당 기사에서는 독립단원(광한단원) 김관성이 총격전 끝에 부상을 입고 도주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건 직후에 보도된 기사들에서는 문일민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본 1934년 10월 29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당 기사에 의하면 문일민은 동지 두 명과 자고 있던 중, 일경의 기습을 받아 총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동지 두 명 중 한 명인 소사 문덕성(박문학)은 즉사했고, 다른 한 명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이는 김관성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때 탈출한 이는 문일민과 김관성 두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사마다 총격전에 참여한 인원의 숫자가 다른 것은 당시 현장이 총격전이 벌어지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일민을 숨겨준 소사의 사망 등 당시 현장에 있지 않고서는 알기 어려운 구체적 사실과 관련하여 박태열의 진술과 사건 직후 보도 기사의 내용은 일치한다. 따라서 문일민이 평양 북금융조합 총격전에 참전했다는 박태열의 진술은 신빙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문일민은 평남도청 투탄 의거 후에도 바로 탈출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다른 독립군 단체들과 연대하여 일제를 향한 의열투쟁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 7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1)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2) 김정명 편,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3) 박태열, <張德震傳>, 삼일인쇄소, 1925.
4) 陸軍省, <光韓團員 檢擧의 건>, 1921.2.23.
5) 平壤覆審法院 刑事部, <吳東振事件判決>, 1932.6.21.
6) 김영범, <의열투쟁 I–1920년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7) 최은희, <한국개화여성열전>, 정음사, 1985.

태그:#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독립운동가, #평양북금융조합, #광복군총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