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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휴가는 어쩔 수 없이 제주도로 다녀왔다. 비행기 표와 숙소를 알아보기 전에 아이에게 말을 꺼낸 게 화근(?)이었다.

아이는 매일같이 주문처럼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서 아쿠아 보러 간다고 읊어 대며 신나 했다. 억 소리 나는 비용 때문에 못 갈 것 같다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어찌 저렴한 숙소를 찾고, 남편이 차를 끌고 배를 타고 오는 걸로 예산을 맞췄다.

새벽부터 일어나 짐을 싸고 공항으로 이동하는데 벌써 진이 다 빠졌다. 한 손에는 짐 가방,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비행기에 타는데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행의 설렘은 아이에게만 허락된 선물 같았다.
 
깊이가 얕고 돌 틈에 다양한 바다생물이 가득한 협재 해수욕장은 아이가 놀기에 최적의 장소다.
▲ 협재해수욕장 깊이가 얕고 돌 틈에 다양한 바다생물이 가득한 협재 해수욕장은 아이가 놀기에 최적의 장소다.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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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역시 제주도다. 무엇보다 제주 바다는 비행기 안의 불평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에메랄드 빛 바다는 마법을 부린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1일 3물놀이를 목표로 협재 해수욕장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아침 먹고 바다, 점심 먹고 바다, 낮잠 자고 바다. 아이는 그렇게 1일 3물놀이를 해냈다. 지치지도 않는지 눈만 뜨면 바다에 가자고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아름다운 협재 바다를 마음껏 즐길 수 없었다. 바닷가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임무였기 때문이다. 새벽형 인간도 저녁형 인간도 아닌, 그저 잠 많이 자는 인간형인 내가 새벽같이 일어나 산책을 가고 저녁에 무거운 다리를 끌고 밤바다로 달려 간 건 다 이유가 있다. 그 시간만이 나에게 휴가였기 때문이다. 오롯이 바다를 느끼고 향기를 맡았다.

호수 수영, 그 자유로움이 그리워

숙소에서 쉬면서 TV를 보는데 스위스 호수에서 수영하는 장면이 나왔다. 얼마 전에 새로 시작한 TvN의 예능 프로그램 <텐트 밖은 유럽>이었다. 결혼 전 1년 동안 유럽을 여행 할 때 수영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호수에서는 3번 정도 수영을 했는데,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 오스트리아의 볼프강 호수, 슬로베니아의 보힌 호수에서였다.
  
휴양지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볼프강 호수는 야외 수영장처럼 꾸며져 있고 요트도 많다.
▲ 볼프강 호수 휴양지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볼프강 호수는 야외 수영장처럼 꾸며져 있고 요트도 많다.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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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의 블루라군 온천과 이탈리아 포지타노 해변 같은 곳에서의 수영도 좋았지만 유독 호수에서의 수영이 기억에 남는 건 그 경험 자체가 생경해서다. 우리나라 호수에서 누가 수영하는 모습을 본다면, 아마 사고가 일어난 줄 알고 119에 신고부터 할 테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빙하수가 녹아 만들어 낸 에메랄드 빛깔의 물이 결정적이다. 스위스에 바다가 없어도 상관없겠다 느꼈던 건 어딜 가나 이런 호수에서 수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에서는 백조, 오리 등과 함께 수영을 할 수 있다.
▲ 루체른 호수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에서는 백조, 오리 등과 함께 수영을 할 수 있다.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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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에는 수영을 할 수 있는 스폿이 몇 곳 있다. 영국에서 알게 된 스위스 외사친(외국인 사람 친구) 아니타에게 물어봐 최적의 장소를 찾아냈다. 방학 시즌이 끝난 9월 이어서 그런지 한국 사람은커녕, 동양인도 한 명 없었다. 화장실에서 쭈뼛쭈뼛 수영복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다들 나를 쳐다본다. 여길 어떻게 알고 왔냐는 눈빛이다.

한국에서는 입어 본 적 없는 외국 여행 전용 비키니에 선글라스를 쓰고 호수를 바라보고 앉았다. 따사로운 햇볕과 평화로운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을 멍 때리다가 물에 발이라도 한번 담가볼까 해서 호수 쪽으로 다가갔는데, 저기 멀리 백조 떼가 보이는 게 아닌가. 물에 백조 깃털이 둥둥 떠 있다. 으악! 새라면 질색 팔색 하는지라, 순간 고민이 됐다. 이걸 들어가 말아.

그날 나는 백조 떼와 함께 수영을 했다. 한국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들 해외여행을 가면 한국에 있을 때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지 않나? 끈 나시에 쇼트 팬츠 입을 근자감이 생기기도 하고 못 먹는 술도 한두 잔씩 홀짝 거릴 용기가 생기기도 하고(어릴 때 췌장 수술을 했던 나는 서른 중반에 처음으로 맥주를 마셔봤다. 바로 더블린의 기네스 뮤지엄에서다).

여행을 가면 어디서 용기가 솟는지 무서운 놀이기구나 체험도 서슴없이 도전하게 되고 웨지힐을 신고 하루에 10킬로를 걸어도 말짱한 여행용 인간으로 변신한다. 그래서 다들 여행을 가는 것일 테지. 현실 세계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 모든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슬로베니아의 보힌 호수는 물이 너무 맑아서 멀리까지 다 보여 들어가기 무서울 정도였다.
▲ 보힌 호수 슬로베니아의 보힌 호수는 물이 너무 맑아서 멀리까지 다 보여 들어가기 무서울 정도였다.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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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보는데 다시 제주도에 가고 싶다. 돌아오는 날부터 며칠 동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제주도 여행 카페를 들락날락거렸다. 여기도 갔어야 했는데, 이것도 먹었어야 했는데. 여행은 항상 아쉽다.

남편에게 아이의 휴가가 끝났으니, 이제 나 좀 휴가 보내달라고 말하니 피식 웃는다. 언제든지 자신이 아이를 볼 테니 말만 하라며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 남편은 예전부터 친구들과 함께든지 혼자든지 여행을 다녀오라고 누누이 이야기를 해왔다. 실천에 옮기지 못한 건 언제나 걱정 많은 나였다.

자유를 쟁취(?)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젠가 '나 여행 갈 거야'라고 이야기할 때 당황할 남편의 얼굴을 기대하며 오늘도 가고 싶은 장소를 찜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호수수영, #협재, #보힌호수, #루체른호수, #볼프강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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