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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매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올 정도로 오래 전부터 명반석이 생산되었던 산이다.
▲ 오래전부터 옥이 생산되었던 옥매광산 옥매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올 정도로 오래 전부터 명반석이 생산되었던 산이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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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도 벌써 77년이 됐다. 세월의 흐름 속에 아픈 역사의 기억들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기억해야 될 것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그 기억들 속에서 이맘때쯤 꺼내드는 이야기가 옥매산 광산 노무자 수몰사건이다.

일제강점기의 막바지, 대동아 전쟁이 한창일 때 옥매산광산 노무자들이 강제동원으로 제주도에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다 선상화재로 인해 120여 명이 한꺼번에 희생당한 사건이다.

우리나라 서남해 끝 해남 황산면 옥동과 문내면 신흥마을 경계에는 옥을 채취하는 광산인 옥매산(173m)이 있다. 옥매산은 오래전부터 옥(화반석)이 생산되는 산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화반석(華班石)이 황원현의 매옥산(埋玉山)에서 나온다"는 기록이 있고, <대동여지도>에는 옥매산(玉梅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여러 지리지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옥매산은 오래전부터 옥이 생산되는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이한 지형과 식생의 옥매산
 
옥매산 정상은 광산개발로 인해 파헤쳐져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 옥매산 정상의 노천광산 옥매산 정상은 광산개발로 인해 파헤쳐져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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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는 습지연못이 형성되어 특이한 지형을 이룬다.
▲ 옥매산 정상의 생태연못 정상에는 습지연못이 형성되어 특이한 지형을 이룬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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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매산 정상은 채굴하기 위해 파헤친 노천광산의 흔적들이 협곡처럼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명반석을 채굴하여 생긴 지형 때문에 독특한 지형으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상 부위는 채굴하면서 만들어진 깊은 협곡 지형이 마치 그랜드캐년을 연상하게 한다. 주변에는 노출된 명반석과 여러 종류의 다양한 암석들을 볼 수 있다. 문양이 아름다운 옥석을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의 암석을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의 자연식생도 특이하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형 때문인지 곳곳에는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고 자연 암반수에서 흘러나온 물이 투명할 정도로 깨끗하다. 곳곳에 작은 물웅덩이와 같은 연못이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정상부위 한 곳은 일년 내내 마르지 않을 정도로 습지 연못이 형성되어 있다. 자연생태계도 특이한 모습이다. 고사리류를 비롯해 이끼류의 식물들이 탐방로 인근에 분포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높은 다양한 자연생태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옥매산의 광산개발
 
옥매산에서는 예전부터 무늬가 아름다운 화반석이 생산되었다.
▲ 옥매산 화반석 옥매산에서는 예전부터 무늬가 아름다운 화반석이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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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매산 아래 자리 잡은 옥동(玉洞)마을은 옥하고 관련지어 붙여진 이름처럼 오래 전부터 옥을 가공하여 판매해 온 마을로 지금도 근근히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옥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값싼 중국산 옥돌이 들어오면서 사양산업이 되고 있지만 옥매산 아래 옥동마을은 1960~1970년 무렵 전국 최고의 옥공예품 생산지로 이름이 알려졌다.

옥매산에서 나는 옥은 품질이 좋고 원료를 구하기 쉬워 옥돌공예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1970년대에는 이곳에서 옥공예를 하는 사람만 4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지금도 옥동마을은 그때의 전성기를 말해주듯 마을 도로변 양쪽으로 옥공예를 하는 가계들이 남아 있지만 현재는 몇 가구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옥매산은 광산개발로 파헤쳐진 산의 모습처럼 역사의 상흔을 깊게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일제강점기 하에 일본은 옥매산에서 생산되는 명반석에 알루미늄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이곳에서 대규모 명반석을 채굴하는 광산으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인들이 광산을 개발한 회사는 1910년 니시자키 쓰루타로(西崎鶴太郞)를 시작으로 광산을 본격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7월부터는 아사다화학공업주식회사(淺田化學工業株式會社)가 경영을 이어갔다.

명반석은 알루미늄의 원료로 태평양전쟁 당시 전투기 등 군수품 제작에 이용되었다. 1936년까지 한 해 약 10만 톤이 넘는 명반석이 채굴돼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을 때는 옥매광산 노동자가 12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옥매산 아래는 광산개발로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일본식 주택인 적산가옥이 즐비하게 있었으며 병원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적산가옥은 2000년대 초까지도 몇 채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보기 어렵다.

옥매산 광산 노무자 희생사건
 
옥매산 광산 노무자들의 희생을 기념하는 위령비가 지난 2017년 조성되어 그날의 비극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 옥매산광산 노무자 희생 위령비 옥매산 광산 노무자들의 희생을 기념하는 위령비가 지난 2017년 조성되어 그날의 비극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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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이곳 옥매광산에서 일하던 노무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제주도 군사기지 구축을 위해 수백명이 강제로 끌려간다. 일본은 미군의 본토 공격이 임박해오자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 포진지 등 군사시설물을 집중적으로 구축하였는데 1945년 3월 일제는 옥매광산 광부 200여 명을 제주도로 끌고 간다. 이들은 대부분 동굴을 파거나 진지를 만드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갑작스럽게 제주도로 끌려온 이들은 하루 12시간의 고된 노역을 견디며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다. 발파 작업 도중 낙석으로 심한 부상을 당하거나 장티푸스로 숨진 경우도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들은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8월 20일, 제주도에 끌려온 220여 명은 35톤급 목선에 몸을 싣고 제주도를 출발했다. 그러나 무리한 승선 때문이었는지 배가 청산도 앞바다를 지날 무렵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일어나 배는 순식간에 침몰한다.

구조된 사람은 불과 100여 명, 절반 이상인 120여 명은 그리던 고향 땅을 눈앞에 두고 수몰되고 만다. 화재 당시 일본군함이 부근을 지나갔지만 일본인들만 몇 명 구조한 뒤 지나치고 말았다. 이 사고로 옥매산 주변 마을에서 끌려간 가족들은 비통에 빠지게 되는데 이로 인해 매년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의 희생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지역 언론의 조명과 뜻있는 사람들의 활동에 의해 옥매산에서 일했던 수백 명이 강제 동원돼 노역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지난 2012년 강제동원피해조사지원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위령탑과 돌탑 쌓기

유가족들은 그동안 위령비라도 건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지부진하여 지난 2012년부터 주민들과 함께 옥매산 탐방로에 손수 돌탑 108개를 쌓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의 바람이 헛되지 않았는지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지역 언론의 지원과 뜻있는 주민들이 조금씩 모은 성금으로 지난 2017년 '118인 희생광부 추모비'가 옥매산 앞 삼호 선착장 광장에 세워졌다. 추모비는 배 형상 위에 수몰된 118명 광부의 영혼을 뜻하는 구체 기둥을 세운 형태로 희생자들을 잊지 않도록 118인의 명단을 새겨 넣었다.

이곳에는 일제가 명반석을 가공하여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만든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는 이곳에 모아진 명반석을 선착장에서 배에 싣고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의 마음과 옥매산의 상처는 점점 아물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 너머로 이제는 그것을 기억하고 함께할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가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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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옥매산 광산, #명반석, #노무자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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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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