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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원선거 일정이 오는 10일로 성큼 다가오면서 일본에서는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각 정당의 지도자들과 주요 후보들은 유권자들을 향해 '더 나은 일본'을 만들겠다는 약속으로 연일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일본 헌법은 '평화헌법'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1946년 제정된 이 헌법 9조에 '분쟁 해결 수단으로의 무력 행사 포기' 등 내용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평화헌법'에 관한 의제는 이번 선거에서도 어김없이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참화, 엄습하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이 일본 시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는 가운데, 각 정당들은 '일본을 지켜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관련 기사: 살얼음판 중국-일본... 일본인 전쟁연구가의 따끔한 진단).

이들의 주장은 극과 극 수준으로 엇갈린다. 어떤 이들은 강력한 방위력 확보를 주장하는가 하면, 혹자는 평화헌법의 준수를 강변한다.
 
군대의 보유를 금지한 일본 평화헌법에도 불구하고 자위대는 세계적인 수준의 전력을 갖추고 있다.
▲ 사진촬영용 진형을 갖춘 해상자위대 함대의 모습. 군대의 보유를 금지한 일본 평화헌법에도 불구하고 자위대는 세계적인 수준의 전력을 갖추고 있다.
ⓒ 해상자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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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기존의 제국 체제가 해체되면서, 일본은 분쟁해결의 수단으로서 무력행사와 군대의 보유를 포기하고 이를 신 헌법에 명시했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듯, 현대 일본에서는 자위대라는 무장조직이 있으며 이들이 사실상 군대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그 전력 역시 세계적인 수준이다.

글로벌 파이어파워(Global Firepower, GFP)는 일본의 2022년 기준 군사력 지수를 세계 5위로 평가한다(한국은 6위). 평화헌법과 현실의 모순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모순을 넘어 일본이라는 나라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평화헌법-현실 사이의 모순

평화헌법과 현실의 모순은 제국 일본의 전쟁범죄를 심판한 도쿄재판에서부터 잉태된 문제였다. 전쟁을 주도했던 육군의 지도자들은 검찰측 심문과 법정투쟁 속에서, 일본에 대해 경제봉쇄를 실시했던 미국에 아시아 태평양 전쟁 개전의 책임을 돌리며 자위전쟁론을 주장했다. 이들에 대한 극형은, 일본의 자위전쟁론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다.

그러나 육군 지도자들에게 문책이 집중된 도쿄재판의 흐름은 또다른 문제를 낳고 말았다. 전쟁에 책임이 있는 집단과 인물들이 육군에 책임을 전가하고 면피에 성공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고 만 것이다.  

반미 성향의 육군의 지도자들이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주는 것은 전쟁책임 면피를 시도하던 정객들에게도, 반미세력을 제거한 뒤 일본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미국에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해군 측이 '천황 면책'이라는 대의를 내걸고 물 밑에서 맥아더 사령부와 흥정하는 데 성공, 도쿄재판에서의 추궁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것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관련 기사: '사형을 피하라'... 패전 후 일본 속 또다른 전쟁).

요동치는 정세 속에서 어떤 이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은 이들은 미국의 일본 통치, 더 나아가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협조함으로써 스스로의 보신을 꾀하고자 했다.

1951년, 일본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강화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주권을 회복했다. 미국과 대립하던 소련은 물론, 일본과 15년을 교전해왔던 중국까지 배제된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새롭게 정립된 일미간의 종속관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듬해, '미군의 일본 본토 점령'은 '미국의 오키나와 계속 점령'을 '대가'로 종결되었다(관련 기사: "주민 넷 중 하나가 죽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국민들).

이후, 오키나와는 베트남 전쟁을 비롯해 미국 아시아 전력의 창날로 기능하게 되었다. 1972년 오키나와의 영유권이 일본으로 반환되었지만, 오키나와를 뒤덮은 미군 전력이 떠나는 일은 없었다. 오키나와 반환은, 미국이 오키나와 통치의 부담을 일본 정부와 분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에 의한 섬의 군사기지화에서 비롯된 고통을 떠안아야 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를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종속적인 대미관계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오키나와 지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본토 역시 미국과의 종속관계에서 이른바 '평화헌법'을 문자 그대로 지킬 수는 없었다.

일본-미국의 군사동맹 제안... 자위대와 미군 
 
1960년 일미 신안보조약을 추진했던 기시 총리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제국 일본의 전쟁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 기시 노부스케(좌) 상공대신과 도조 히데키(우) 총리대신 1960년 일미 신안보조약을 추진했던 기시 총리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제국 일본의 전쟁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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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총리대신에 취임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표면적으로 자주외교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적극적으로 편승했다. 도조 내각에서 상공대신을 지낸 그는 명실상부한 전쟁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와 육군이 전쟁책임을 지고 심판된 데 이어 일본이 공식적으로 주권을 회복한 이상 그의 출세가도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추진했던 1960년의 '일미 신안보조약'은, 일본 현대사의 주요한 기점으로 평가된다. 기시 총리의 의지에 따라, 집권여당이었던 자유민주당은 다수결로 밀어붙여 미국과의 군사동맹안을 중의원에서 통과시켰다. 절차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으나, '전시내각의 대신이었던 인물'이 다수당의 힘을 휘둘러 군사동맹을 가결시킨 것은 '민중' 사이에서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310만의 국민이 쓰러진 전쟁이 끝난 지 겨우 15년이 흐른 시점. 평화헌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에서 군사동맹을, 그것도 전쟁당사국이었던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추진한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태였다.

일미 신안보조약에 대한 반대 시위가 격화되자, 기시 총리는 경찰기동대는 물론 우익 폭력단체들까지 동원해 이를 억누르고자 했다. 심지어는 매수된 야쿠자들까지 시위 현장에 나타났다. 그러나 폭력적인 시위 진압은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6월 15일, 경찰기동대와의 충돌과정에서 도쿄대 여학생 간바 미치코(樺美智子)가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민중은 더욱 격앙되었다.
 
기시 총리는 경찰기동대와 우익폭력배까지 동원해 완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민중의 거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사태가 악화되자 기시 총리는 결국 사임했다.
▲ 일미 신안보조약에 반대하며 기시 노부스케 내각을 성토하는 시위대(6월 18일) 기시 총리는 경찰기동대와 우익폭력배까지 동원해 완력으로 시위를 진압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민중의 거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사태가 악화되자 기시 총리는 결국 사임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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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원 가결안이 법률로 발효된 6월 18일, 약 33만명 인파가 도쿄 국회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날의 시위는, 국회에 대한 항의집회 규모로는 일본 역사상 최대였다. 일미 신안보조약을 기념하여 방일을 위해 필리핀까지 날아와있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본에서의 소요 사태에 놀라 일본 방문 일정을 취소하였다. 기시 내각은 결국 모든 책임을 지고 7월 15일 총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시 내각의 퇴진에도 불구하고, 이미 발효된 일미 신안보조약은 법적 효력을 그대로 유지했다. 분쟁해결의 수단으로 무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평화헌법의 다짐은, '일본의 안전 또는 극동의 평화 및 안전에 대한 위협이 발생한 경우' 일본과 미국이 공동으로 군사행동을 벌일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일미 신안보조약 앞에서 무색해지고 말았다.

일본육군 항공대 장교로 전쟁을 체험한 바 있는 역사학자 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는 저서인 <천황의 군대(天皇の軍隊)>에서, 일본 자위대가 미군에게 종속돼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일본 정부/국회로부터의 통수권'보다 미군이 요구하는 '작전 준비'가 더 우선되고 있다고 평가하기까지 한다(관련 기사: [주장] 대선토론에 등장한 '일본군', 진실로 안보에 도움되나).  

평화헌법, 그리고 일본의 미래 
 
2019년 8월 25일, 당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이 열리는 프랑스 비아리츠에서 양자회담을 하는 모습.
 2019년 8월 25일, 당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이 열리는 프랑스 비아리츠에서 양자회담을 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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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또 다시 전란의 길을 가게 될지 모른다는 일본 시민들의 불안이 무색하게, 평화헌법의 행방은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매여있는 게 현실이다. 전쟁에 책임이 있던 제국 시대의 지도자들은 미국에 협조하는 대가로 목숨을 건졌고, 종속적인 일미 관계 아래서 보신의 기회를 창출해왔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평화헌법의 약속은 미국의 대중국 전략 요구 앞에서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공격을 당했던 나라 일본에서, 자신들을 핵으로 공격했던 미국의 핵을 공유 받아야 한다는 주장마저 제기되는 것은 대미 종속과 평화헌법의 위기를 드러내는 한 단면일 것이다.

이 혼돈의 시대에서, 일본 사회는 진정으로 주권을 회복하고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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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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