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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대해 '일본' 현장에서 수년간 나름의 공부를 이어왔다. 제국 체제에 대한 거시적 단위의 검토에서부터, 직접 전쟁에 참전했던 체험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청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로와 방법들을 밟아가며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얽히고설킨 수많은 실타래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그때의 전쟁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일본 정부는 1995년 8월 15일의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아시아 각국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긴 '침략'이었음을 인정하고 사죄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서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안갯속을 표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관련기사: 개전 80년, '대동아 전쟁' 신화가 청산돼야 할 이유).

가령, 사회 곳곳에 만연한 이른바 '특공' 예찬은 국민들에게 끔찍한 출혈을 강요했던 국가의 책임을 희석시킨다(관련기사: "충성 빛나리"... 자국민 죽음 내몬 일본의 끔찍 '신화'). 일본이 미국, 영국, 네덜란드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덕분에 아시아 각국이 서구 열강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전쟁 시절의 프로파간다는 지금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일본인의 자학사관 극복을 지상과제로 삼는 일본회의와 같은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한국은 어떨까. 과거에 치러진 전쟁들에 대한 평가가 한국 사회에서는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는가.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북한의 남침을 막아내고 자유를 수호한 전쟁'이라는 평가가 국가적으로 견고하게 정착된 6.25전쟁조차도, 그 이면에는 수많은 기억투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사상이 다르거나 다르다고 의심된다는 이유로 정당한 재판절차조차 없이 학살된 시민들의 존재, 강제로 동원되어 제대로 보급조차 받지 못한 채 처참하게 죽어간 국민방위군의 존재 등은, 자유수호전쟁이라는 미사여구로 간단하게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억눌렸던 그 '불온한' 기억들이 민주화 이후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이 시대에, 우리 사회는 그 기억들을 얼마나 성숙하게 마주하고 있는가.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공산침략을 물리치고 자유와 안전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자유월남을 지원하고 월남 국민의 용기를 돋고 끝끝내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훈시했다.
▲ 월남에 파병될 해병대 전투부대 "청룡부대"에 부대기를 수여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공산침략을 물리치고 자유와 안전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자유월남을 지원하고 월남 국민의 용기를 돋고 끝끝내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훈시했다.
ⓒ e영상역사관(대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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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전이었던 베트남 전쟁으로까지 화제를 넓혀본다면 이야기는 더욱 꼬이게 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 내의 엇갈린 평가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마주하는 일본 사회의 혼란을 연상시킨다.

어떤 이들은 공산세력에 맞서 자유우방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 우리 경제 발전의 밑돌을 놓은 자랑스러운 역사로서 베트남 전쟁을 기억한다. 또 어떤 이들은 베트남 민중에 대한 폭력에 우리가 가담했던 부끄러운 전쟁, 우리 청년들의 피를 달러와 맞바꾼 슬픈 역사로써 베트남 전쟁을 기억한다. 참으로 극단적인 엇갈림이다. 그리고, 그 엇갈림보다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은 무관심이다.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민간사회에서의 평가에 갈피가 잡히지 않고 있는 현실이 무색하게, 군 내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흔들림 없어 보인다. 가령, 4월 15일 창설 73주년을 맞이한 해병대는 공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해병대의 지난 활약들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참전하여 신화를 남겼던' 역사로써 베트남 전쟁을 언급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각종 전적들이 군 내부에서 정신전력교육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다만, 가급적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군 조직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SNS 홍보에까지 기존의 정신전력교육식 논조를 반영한 것은 다소 의외로 느껴졌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규정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쟁의 소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내부적으로 있었다는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해병대는 4월 15일 해병대 창설 기념일을 맞아 베트남 전쟁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선전했다.
▲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참전하여 신화를 남겼던 베트남 전쟁" 해병대는 4월 15일 해병대 창설 기념일을 맞아 베트남 전쟁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선전했다.
ⓒ 해병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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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진지한 노력 필요

한국 사회는 과연 베트남 전쟁을 아무런 고민 없이 떳떳하게 마주해도 괜찮은 것일까. 중대급 병력이 연대급 적 병력을 대파한 '짜빈동 전투'가 해병대의 전설로 회자되고, '토끼몰이식 작전'으로 적을 일망타진한 육군 맹호부대의 용맹이 기려지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전투를 분석하고 거기서 교훈을 찾는 것은 동서고금의 모든 군인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진짜 문제는, 베트남 전쟁이 도대체 한국인들에게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반공논리에 입각하여 전쟁의 성격을 단순화하고 우리 군의 전공을 자랑하는 것에 머무는 이상 우리는 베트남 전쟁과 제대로 마주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베트남 전쟁이 어째서 일어났는지, 한국은 어떻게 참전하게 되었는지, 그곳에서 한국의 군대는 무엇을 하였는지, 한국군을 겪은 현지인들과 고국으로 돌아온 장병들의 전후 삶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 작업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고엽제를 뒤집어쓰며 밀림 속을 방황했던 노병들의 고립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먼 이야기이다. 전쟁의 참상을 회고하는 베트남 시민들의 목소리는 한국뿐 아니라 자국 정부로부터도 외면받는다.
 
 한국군 청룡 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 70여 명(69 ~ 79명 추정)을 학살했다는 전쟁범죄 의혹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전개되어 왔다.
▲ 시민평화법정에서 증언하는 퐁니·퐁넛 마을 학살 생존자(당시 8세)  한국군 청룡 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 70여 명(69 ~ 79명 추정)을 학살했다는 전쟁범죄 의혹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전개되어 왔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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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에서의 전쟁범죄 의혹 제기가 모두 타당하다는 전제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을 고찰하는 데에는 교차검증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교차검증들을 통해 한국군에 제기되는 여러 의혹들이 논박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교차검증을 통해 사태의 진상을 명확히 하는 것과, 검증의 미비를 이유로 문제 해결 자체에 손을 놓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1982년의 '교과서 문제'로 일본에서는 난징대학살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른 바 있다. 30만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문제 제기에 대해 반성과 반론이 엇갈렸다. 그러던 상황에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자들의 친목단체인 '카이코샤'(偕行社)의 편집부 집필책임자 카토가와 코타로(加登川幸太郎) 전 중좌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난징대학살의 희생자 수가) 최소한 3천 명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큰 숫자이다. 전장의 실상이 어떻게 되었든, 전장심리가 어떠한 것이라 하든, 이 대량의 불법처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구 일본군에 인연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 중국 인민에 깊이 사죄할 수밖에 없다."
 
카토가와 전 중좌는 일본육군에 의한 전쟁범죄 의혹들의 수치를 문자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의혹들을 올바로 마주하고 철저하게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카토가와 전 중좌가 저술한 <육군의 반성> 카토가와 전 중좌는 일본육군에 의한 전쟁범죄 의혹들의 수치를 문자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의혹들을 올바로 마주하고 철저하게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ama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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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가와 전 중좌의 평가는 카이코샤 내외부로부터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논란의 방향은 '중국 인민에 깊이 사죄할 수밖에 없다'는 반성의 타당성 여부에서 벗어나 희생자 규모의 문제로 옮겨갔다. 중국 측이 주장하는 희생자 수가 과장되었다는 논리들은, 난징학살의 희생자 수가 일반적인 전투행위 안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규모라는 주장에 이어 난징대학살 날조설에까지 힘을 싣게 되었다. 난징 문제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합의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지도 50년이 가까워진다. 파월 장병들에게도, 현지 주민들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긴 그때의 전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이제부터라도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간의 상처를 보듬고 공감하는 일은, 기계적 숫자 산출보다도 훨씬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태그:#베트남 전쟁, #월남전, #한국군, #일본군, #아시아 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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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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