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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언덕 위에 자리한 집은 당시로선 초호화판 별장이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2세대 건축가이자 건축구조 전문가로 알려진 김세연이 지하 1층, 지상 2층의 절충양식 서양 집으로 설계하였다.
 
금광으로 큰 돈을 번 친일파 최창학이 초호화판 별장으로 1938년 지은 죽첨장의 건립 당시 모습이다.
▲ 건립 당시 죽첨장(경교장) 금광으로 큰 돈을 번 친일파 최창학이 초호화판 별장으로 1938년 지은 죽첨장의 건립 당시 모습이다.
ⓒ 이영천(경교장 전시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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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터(5,267.44㎡)에 주변은 우거진 숲이 둘러싸고 있고, 호화로운 외관에 넓은 건평(874㎡)을 갖춘 집 뒤에는 한옥이 별채처럼 딸려 있었다. 정 남향 언덕 아래에 높이 선 한옥식 정문이 있었으며, 동쪽에도 출입문이 따로 있었다. 마당은 잔디가 깔리고 물고기를 기르는 큰 연못에 돌다리가 놓였으며, 차고 등 부대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평안도 구성군에서 금광으로 벼락부자가 된 최창학이 소유한 별장으로 1938년 완공되었다. 그는 집을 '죽첨장(竹添莊)'이라 이름하였다. 갑신정변을 배후 조종한 당시 일본 공사관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이름에서 따, 종로구 평동(平洞)을 죽첨정(竹添町)이라 부른 데서 빌어온 것이다. 극렬친일파로 광산업계 대부다운 처세요, 행태였다.

이런 집에 해방 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1진이 머물게 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분명 자신의 친일행각을 다소나마 덜어 살길을 찾아보려는 최창학의 기회주의적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었겠으나, 만 26년 동안 중국에서 갖은 고난과 핍박을 견뎌내며 독립운동과 임시정부를 지켜온 요인들 눈엔 닥쳐온 현실이자 다가올 고난을 예고하는 암시이기도 했다.
 
숲을 이룬 병원 건물 사이에서 섬처럼 남아있다. 1949년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으나, 사진 좌측의 일부 공간은 개보수 중이다.
▲ 경교장 숲을 이룬 병원 건물 사이에서 섬처럼 남아있다. 1949년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으나, 사진 좌측의 일부 공간은 개보수 중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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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왜색(倭色) 그득한 집 이름을 도저히 그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근처 만초천에 놓여있던 옛 경기감영을 잇던 경교다리(京口橋)를 살려 '경교장(京橋莊)'이라 고쳐 부른다.

초라한 귀국과 파란의 해방정국

일본으로부터 항복 조인(1945.09.02)을 받은 맥아더는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 포고 제1호(09.07)'를 통해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정'을 실시한다고 선포한다. 점령군으로 남한 내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며, 미군정이 남한의 유일 정부임을 선포한 것이다.

서울에 입성(09.09)한 미군은, 수립할 군정청을 조선총독부 체제 존치에 틀을 맞춘다. 일본인 관료를 10월까지 활용하며 실정 파악에 나서고, 조선인 총독부 관료 등을 중용한다.

아울러 건국준비위원회 등이 수립한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남한 내 어떤 형태의 정부 및 정치조직과 그 정통성마저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따라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의 귀국마저 철저히 '개인 자격'이라는 전제에서 승인한다.
 
1945년 11월 23일 철저히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 1진의 귀국 내용을 보도한 서울신문 호외.
▲ 환국을 보도한 신문 호외 1945년 11월 23일 철저히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 1진의 귀국 내용을 보도한 서울신문 호외.
ⓒ 이영천(경교장 전시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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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 1진이 귀국(11.23)한다. 개인 자격이었으되 귀국 일성으로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 정부도 같이 돌아온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 1진은 경교장에 입주한다.

이곳에서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작업이 시작된다. 제(諸) 단체는 물론 심지어 친일 경찰까지 임시정부에 몸을 의탁하려 기회주의적 속성을 내비친다.

그해 말 모스크바에서 '3상 회의(12.16∼26)'가 열린다. 이 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중·영 4개국이 조선을 최대 5년 기한으로 신탁통치 한다'는 결정이 내려진다. 이때 동아일보 오보(12.27)가 터져 나온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제안했으며, 미국은 반대했다는 명백한 오보였다. 이는 언론 오보 가운데 가장 부끄러운 사례로 남아있다.

반탁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가장 적극적이다. 임정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12.29)'가 결성된다. 신탁통치에 관점을 달리한 송진우가 암살(12.30)되기도 한다.

동아일보 오보로 소련을 적대시하는 반공 열기가 급속히 확산한다. 여기에 친일파가 올라탄다. 더러운 과거를 반공이란 탈로 화려하게 포장하며, 기사회생할 정치 공간을 확보한다. 친일파들이 투철한 반공투사로 변모하고, 반탁운동으로 임시정부 좌·우파가 분열한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청 조선인 관료와 경찰 등에게 총파업을 지시한다. 미군정청 업무가 마비되고,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기도 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긴 시간(1946.03∼1947.10)의 협의에도 불구하고 결렬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정읍발언(1946.06)'으로 분단이 명백한 단정 수립을 시사한다. 중도파가 나서 '좌우 합작 운동'을 펼치나 여운형 암살(1947.07.19)로 힘을 잃고 만다.

미국은 '트루먼독트린(1947.03)'을 통해 '냉전 시대' 서막을 열어나간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가 남북한 총선거가 결의(1947.11)되나, 결국 각국 이해관계에 따라 남한 단독선거(1948.02)로 귀결되고, 민족은 분단의 길을 걷게 된다.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에 항거한 '4.3항쟁'이 벌어져 피의 살육이 자행된다.
 
분단을 반대하며 1948년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구성을 제안, 북한으로 가려는 김구를 시위대가 저지한다. 경교장 2층 베란다에서 이를 설득하는 연설 모습이다.
▲ 연설하는 김구 분단을 반대하며 1948년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구성을 제안, 북한으로 가려는 김구를 시위대가 저지한다. 경교장 2층 베란다에서 이를 설득하는 연설 모습이다.
ⓒ 이영천(경교장 전시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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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민족분단이 자명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1948.04)' 구성을 제안, 북한으로 간다. 북한으로 가려는 김구를 저지하는 시위대를 설득하는 연설이 경교장 2층 베란다에서 이뤄진다.

회한과 비극의 현장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꿈꾸던 노(老) 독립운동가의 꿈은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그의 통일 노력과 의지는 친일파 방해와 미·소가 펼친 냉전의 벽에 막혀 민족분단이란 비극 앞에 무참히 꺾여 버렸다.

김구의 경교장에서의 생활은 이렇듯 분열과 혼란, 좌절과 민족분단이란 피맺힌 한의 시간이었다.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김구는 모든 세력을 규합, 통일운동을 전개한다.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 요원이던 안두희가 2층 집무실에서 김구에게 권총을 발사한 총탄 중 복원된 2발의 흔적이다.
▲ 복원된 총탄 흔적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 요원이던 안두희가 2층 집무실에서 김구에게 권총을 발사한 총탄 중 복원된 2발의 흔적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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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6일. 무덥던 일요일 12시 36분, 육군 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 요원(CIC)이던 안두희가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김구에게 권총을 발사한다. 4발의 총탄을 맞은 김구는 서거한다.
 
1949년 6월 서거 직후 김구 선생 모습. 배후세력이 누구인지는 끝까지 미궁에 빠졌으나, 양식있는 시민이라면 상식처럼 다 알고 있다.
▲ 서거 직후 김구 선생 1949년 6월 서거 직후 김구 선생 모습. 배후세력이 누구인지는 끝까지 미궁에 빠졌으나, 양식있는 시민이라면 상식처럼 다 알고 있다.
ⓒ 이영천(경교장 전시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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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한국독립당 내분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특별성명을 발표(07.02)하고, 안두희는 재판 중 2계급이나 특진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혜택을 받는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자, 안두희는 형벌 면제 처분을 받아 군에 복귀한다. 이로 미루어 암살 배후세력이 누구인지는 불문가지로 되었다. 이후 안두희는 군납업체를 운영하며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는 등 숨어 살다가 박기서의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
 
옷가지와 추모시, 데스 마스크 등이 김구 선생 서거 당시의 상황을 직접 증언하고 있다. 관련 유물들을 경교장 지하 1층에 전시하고 있다.
▲ 서거 당시 유물 옷가지와 추모시, 데스 마스크 등이 김구 선생 서거 당시의 상황을 직접 증언하고 있다. 관련 유물들을 경교장 지하 1층에 전시하고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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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서거하자, 친일파 최창학은 집을 다시 차지하며 그간의 임대료를 요구하기까지 한다. 김구 가족은 중화민국(대만) 대사가 유엔 대표로 가면서 마련된 충정로 금화장(金華莊)으로 이주한다.

임시정부 국내 청사

집은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저였다가,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로 변신하고 베트남(월남) 대사관으로도 사용되었다.
 
병원으로 이용되던 당시 '본관'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이때 평면 등에 많이 변형이 일어난다.
▲ 병원시절 경교장 병원으로 이용되던 당시 "본관"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이때 평면 등에 많이 변형이 일어난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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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재단에 매각(1968)되어 '고려병원' 원무실 등으로 사용되고, '강북삼성병원(1995)'으로 이름이 바뀌어도 기능은 그대로였다. 이 과정에서 내부 평면이 변경되고, 병원 출입문 등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주변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 사람들 기억에 이곳이 '경교장'이었다는 사실마저 거세된 처지로 내몰린다.

1990년대 들어서 시민단체와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비로소 재조명받는다. 한때 효창공원 백범기념관 옆으로 이전하자는 의견(1999)도 있었다.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2005년 국가사적으로 지정·승격되어 2층 집무실이 '백범기념실'로 조성된다. 2009년 소유주가 서울시에 무상 임대를 결정, 집이 복원되어 임시정부와 김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우리 역사 인식의 흐름이 대체로 이러했다.

경교장은 단순히 김구가 안두희 총탄에 암살당하기 전까지 머물던 저택이 아니다. 미군정청이 불허한 '한반도 유일 정부' 자격을 투쟁을 통해 쟁취해 내려 몸부림치던 공간이다. 임시정부 첫 국무회의(1945.12.03)를 시작으로 총 여덟 차례 국무회의를 개최하였으며, 포고령 등을 반포한 공간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 청사'로 대우가 합당하다. 대한민국 헌법은 임시정부에 그 적통을 잇대고 있지 아니한가.

무릇 장소성과 역사성은 단순한 공간 확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 공간이 품고 있는 시간의 연속성 및 역사적 사실과 함의를 끝까지 '기억'해낼 때 비로소 위상이 확립된 실체가 되는 것이다. 경교장을 통해 처절한 독립 투쟁의 역사가 '민족통일'로 나아가는 방향타가 되어주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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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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