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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주민센터 입구에 세워진 김익상 의사 본적지 터 표석
 28일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주민센터 입구에 세워진 김익상 의사 본적지 터 표석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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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폭탄 투척(1921.9.12)과 상하이 황포탄 다나카 기이치 일본 육군대장 저격(1922.3.28) 투쟁의 주역인 독립운동가 김익상 의사의 본적지다. 결혼과 함께 이곳에서 신혼살림을 차렸고, 1920년 해외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다.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주민센터 입구에 '김익상 의사 본적지 터' 표석이 세워졌다. 마포문화원은 1922년 오늘(3월 28일) 일어난 상하이 황포탄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표석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열었다. 

이와 관련 권태훈 마포문화원 과장은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김익상 의사의 상하이 황포탄 의거 100주년을 맞아 문화원에서 (표석 설치) 사업을 맡고 추진하게 됐다"면서 "1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뜻을 모아주고 비용 등 도움을 주셔서 이렇게 표석 설치가 가능했다"라고 설명했다. 해당 표석 뒤에는 설치 과정에서 마음을 나눈 주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권 과장은 김익상 의사의 본적에 대해 "고양군 출신으로 알려져 지금의 고양시로 오해할 수 있지만 옛 행정구역상 고양군 공덕리는 지금 이곳 아현동 일대"라면서 "오늘 본적지 터 표석 설치를 시작으로 김익상기념사업회 등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익상, 상하이 3대 의거 주인공
 
독립운동가 김익상을 수배하기 위하여 일제가 작성한 인물카드. 제대로 된 사진 한 장이 없다.
 독립운동가 김익상을 수배하기 위하여 일제가 작성한 인물카드. 제대로 된 사진 한 장이 없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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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김익상 의사는 의거에 실패해 이름 석자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쏜 총탄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백정기 의사의 육삼정 의거와 더불어 상하이 3대 의거로 평가받는다. 

김익상 의사가 저격한 다나카 기이치는 일본 군부와 정계에서 거물 중 거물이었다. 다나카 기이치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20세기 전후로 일어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모두 참전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군부의 대표적인 전쟁론자로 평가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1920년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해 간도를 침공해 그곳에 살고 있는 무수한 한국인을 학살한 경신참변을 지휘했다. 다나카 기이치는 이 일을 계기로 일본 육군 대신에 오른 뒤 귀족 작위를 받고 육군대장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상하이를 방문한다. 한국 청년들에게 있어 말 그대로 원흉 그 자체인 인물이 의열단이 활동했던 상하이로 찾아온 상황이었기에, 김익상을 포함해 의열단원들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봉준호 감독의 외조부인 소설가 박태원이 1947년 남긴 <약산과 의열단>에 따르면 이때 상하이에 모여있던 의열단원들은 서로 의거를 자청했다. 김익상 역시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을 앞에 두고 누구보다 먼저 '내가 의거를 실행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당시 의열단원 최고 명사수로 이름을 날린 오성륜이 김익상을 향해 "자네는 큰일(조선총독부 폭탄 의거)을 한 번 해보지 않았냐"며 "이번에는 내가 좀 해보세"라고 타박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약산 김원봉은 다나카 기이치가 배에서 내릴 때 오성륜이 1선을 맡아 저격하고, 2선에서 김익상이 만약에 대비하며, 3선에서 이종암이 만약에 만약을 대비하는 것으로 거사 순서를 조정했다.

의거 당일, 상하이 황포탄에 내린 다나카 기이치가 마중 나온 인사들과 악수를 나눌 때 1선에 선 오성륜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오성륜이 쏜 총탄은 상하이로 신혼여행을 온 영국 여성이 맞고 만다. 상하이 황포탄은 좁은 만 사이에 위치해 예나 지금이나 바람이 많이 부는 장소다. 당시 이 여성은 챙이 큰 모자를 쓰고 있었고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 다나카 기이치 앞에 서게 됐다. 불행히도 오성륜의 총탄이 여성에게로 향했던 것. 분주한 상황에 몸을 굽힌 다나카 기이치를 보고 오성륜은 '독립만세'를 외쳤다. 

뒤쪽에서 상황을 파악하던 김익상은 거사가 실패했음을 알고 총을 꺼내 2차 저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김익상의 총탄은 다나카의 모자만 뚫어버렸다. 3선에 있던 이종암이 폭탄을 던졌지만 이마저도 불발, 재차 던졌지만 현장에 있던 군경에 의해 황포탄 바다에 빠졌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급히 현장을 빠져나갔지만 결국 체포되고 만다. 두 사람은 상하이 일본영사관으로 연행돼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반년 전 일어났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의 주인공이 김익상임이 드러났다. 이때 일제는 충격에 빠진다.

앞서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은 남산에 자리했던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에 성공한다. 일제강점기 35년 중 유일무이한 일로, 일제는 이 사건이 벌어지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광화문으로 옮긴다. 김익상은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해 서울 남산자락에 자리한 총독부 건물을 찾아 폭탄 두 방을 던졌고, 의거에 성공한 뒤 일본어로 '위험하다'라고 소리치며 유유히 총독부를 빠져나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일제는 서울을 이 잡듯 뒤지며 범인 색출에 열을 올렸지만 끝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한편 상하이 황포탄 의거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다나카 기이치는 이후 군복을 벗고 정계에 뛰어들어 결국 최고 권력자인 내각총리대신 자리에 오른다.

부인과 딸은 행방불명, 동생은 자살... "제2, 제3의 김익상 나온다"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진 김익상 지사의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진 김익상 지사의 위패.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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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황포탄 의거 실패 후 김익상은 일본으로 압송돼 재판에 회부된다. 이 자리에서 김익상이 일본 재판부를 향해 남긴 말이 1922년 5월 9일 동아일보에 실렸다.

"내가 한번 그러한 일을 한 이상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는 말할 수 없다. 이후로 제2의 김익상, 제3의 김익상이 뒤를 이어 나타나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해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 그치지 아니할 거다. 아무리 (일제가) 문화정치를 한다해도 그것을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

1922년 9월 일본 재판부는 김익상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검사는 사형이 필요하다며 항소했고, 그해 11월 열린 2심에서 김익상은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일본 왕가의 행사 등을 이유로 무기징역과 20년형으로 순차적으로 감형된 뒤 정확히 만 20년의 형기를 채운 1942년 초여름께 만기 출소한다. 그의 나이는 어느새 47세가 됐다. 

하지만 어렵게 본가인 고양군 공덕리(현재 아현동)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감옥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첫 의거를 도왔던 동생 김준상은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192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익상과 함께 아현동에서 살았던 아내는 외롭게 딸아이를 홀로 키우다 1926년 당시 신문에 "(남편을) 생전에 만나볼 것 같지 않다"며 "이것(딸)이나 알뜰히 키우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췄다. 출소 후 고향을 찾은 김익상 역시 일제의 감시망 속에 지내다 어느 날 일본 형사에게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의거 100년이 됐지만 그가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62년 우리 정부는 김익상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75년 우리 정부는 김익상 의사를 기리기 위해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작은 위패 하나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의 위패가 모셔진 머리 50m 지점엔 2009년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국가공인 친일파 이응준과 신태영이 이미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군인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이들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직접 참여했고, 1940년대 총동원령이 발표된 뒤엔 우리 청년들을 선동해 전선으로 내몰았다. 신태영의 경우 생전에 "내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안장)"라고 수차례 말한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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