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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서 당선 인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서 당선 인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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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 투표를 하면 윤석열 후보가 당선될까봐 두려워요."

사전 투표 마지막 날, 저녁에 만났던 여성 지인에게 들은 말이다. 그는 본 투표일이 불과 일주일도 안 남은 그 때까지 누굴 뽑을 건지 정하지 못했다. 자신의 표를 누구에게 행사할지 고민하는 것은 그 지인만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소위 '이대녀' 상당수가 누굴 뽑을지 끝까지 고민했고, 마지막에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을 하기도 했다.

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부터 늘 진보정당 지지자이자 한때 당직자로 일했던 나조차 1번을 찍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여성의날에 "여성가족부 폐지"를 이야기하는 야당 후보라니, 외신 기자에게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후 논란이 되자 페미니스트라 말한 적 없다며 행정착오라는 야당 후보라니, 무고죄 처벌 강화와 주 120시간 노동을 외치는 야당 후보라니...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당장이라도 내 삶이 흔들릴 것 같았다. "아무래도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트위터 계정부터 삭제해야겠지? 윤석열 후보를 비판하는 트윗을 너무 많이 올렸어." 우스갯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친구들과 하기도 했다.
 
방송 3사 출구 조사 결과
 방송 3사 출구 조사 결과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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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선 방송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 이하 여성은 모든 연령대와 모든 성별 통틀어 가장 적게 윤석열 후보를 찍었다. 20대 이하 남성들이 윤석열 후보를 찍은 비율과 25%p나 차이 난다. 이재명 후보를 찍은 20대 이하 여성 비율도 58%로 과반을 훌쩍 넘었다. 20대 이하 여성은 모든 연령대와 모든 성별 통틀어 가장 많이 심상정 후보를 비롯한 기타 후보에게 표를 준 세대이기도 했다.

이 표심은 무엇을 의미할까? 대선 레이스가 막 본격화 되었을 때 젊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여론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여성 연예인을 성적인 사진과 합성한 딥페이크를 올리던 남초 커뮤니티에 '갤주' 인증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 이재명 후보에게 분노하던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가족부 폐지를 외치는 윤석열 후보의 대안으로 이재명 후보를 감히 꼽지는 못하던 상황이었다. 몇몇 여론조사에서 심상정 후보는 20대 이하 여성들의 15% 이상 지지를 받았고, 2021년 11월 리서치뷰 조사에서 '이대녀'의 47%가 이재명 후보도, 윤석열 후보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여론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n번방 방지법'을 윤석열 후보가 국민 감시법이라 매도하던 순간, 이재명 후보는 'n번방 방지법'을 옹호하는 선택을 했다. 그 다음으로 추적단 불꽃 활동을 하며 'n번방 사건'을 수면 위로 드러낸 박지현 활동가가 민주당 디지털 성범죄 근절 특별 위원장이 되었다.

선거 막판, 박지현 위원장이 이재명 후보 선거 유세에서 "우리 꼭 이깁시다"라고 말했는데, 그 메시지는 아마 수많은 젊은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중책을 맡아 젊은 여성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박지현 위원장의 모습은 여성정치네트워크 신지예 전 대표의 영입 이후에도 끊임없는 진통을 겪었던 국민의힘과는 분명 달랐다. 마지막 대선 토론회에서 작정한 듯 젊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이재명 후보의 모습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윤석열 후보는 열심히 여성가족부 폐지만을 외치고 있었으므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 2월 9일 서울 마포구 미래당사에서 열린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대담 "N번방, 디지털성범죄 추적 연대기"행사에 참석, n번방 사건 최초 보도자인 박지현 여성위원회 부위원장과 대담을 갖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 2월 9일 서울 마포구 미래당사에서 열린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대담 "N번방, 디지털성범죄 추적 연대기"행사에 참석, n번방 사건 최초 보도자인 박지현 여성위원회 부위원장과 대담을 갖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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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후보보다 이재명 후보가 여성인권의 측면에서 그마나 나은 사람이라는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지만, 어쩐지 그를 최선으로 선택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이 존재했다. 초반에 보인 행보, 여성혐오적 욕설이 담긴 녹취록의 존재, 이재명과 함께하는 여러 안티페미 정치인들 등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꽤 많은 젊은 여성들이 마음을 바꿔 이재명 후보를 찍은 이유는 최선을 선택했다기보다 최악을 피하기 위함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야당 후보의 반페미니즘적 언행이 언론에 등장할수록 여성 커뮤니티는 분노와 절망, 두려움으로 울렁거렸다. 생존의 문제 앞에 '더 나쁜 놈 옆에 그나마 덜 나쁜 놈'에 투표한 젊은 여성들의 증언이 SNS에 쏟아졌다. 이재명 후보가 아닌 박지현 위원장을 위해 투표했다는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초접전 끝에 윤석열 후보는 20대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반페미니즘 전략으로 점철된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한국 정치의 비극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젊은 여성들의 표심은 충분히 평가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그들을 그렇게 절박한 상태에 몰아넣고, 최선의 선택지를 소거한 방식으로 대선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의 결과는 젊은 여성들이 이재명 후보의 감언이설에 속아 만들어진 것도, 젊은 여성들이 근시안적이라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이재명 후보를 지지한 젊은 여성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것이 이재명 후보의 당선을 견인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혹은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지 않더라도 초접전의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마침내 젊은 여성들의 정치적 의사도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많은 여성들이 분명 존재했다.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키워드가 만들어진 2021년 4월 7일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때도, 그 이전의 수많은 선거 때도 젊은 여성들의 표심은 한 번도 정치권에서 무거운 것으로 판단된 적이 없었지만 이번엔 다른 결과를 가져오고 싶었던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그래서 20대 대선 결과는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에게 반성적인 지점으로 남아야 한다. 두 정치 집단 모두 많은 젊은 여성들에게 최선으로 남지 못했다는 점, 젊은 여성이 자신의 최선이 아니라 최악을 막기 위한 투표를 할 수밖에 없는 정치 지형을 만들었다는 점,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 불렸던 선거를 만들었다는 점. 동시에 이번 선거는 내용 없는 반페미니즘 공약이 수많은 사람들의 등을 돌리게 만든다는 사실과 누군가의 최선이 되지 않으면 판을 바꾸는 일은 결국 어렵게 된다는 사실도 남겨야 할 것이다.

선거는 끝났고 새로운 대통령이 고개를 들었다. 향후 대통령 임기를 수행할 윤석열 당선인이 지금의 결과를 "여성 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는 표"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길은 스스로 누군가의 최선이 되기를 포기하는 정치이니까. 그런 정치 진영 속에서는 도무지 공정과 평등은 이룩되기 어려우니까.

젊은 여성들이 이번 선거에서 남기고자 했던 "우리도 유권자다"라는 메시지는 일정한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그 이후에 고민해야 하는 것은 젊은 여성들이 '표'가 아닌 '사람'으로 남는 방안이어야 한다. 차악이 아니라 젊은 여자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에 기꺼이 표를 던지고 판을 까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정치는 무엇으로 가능한가? 여당과 야당에 표를 몰아줄 수밖에 없는 슬픈 선거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더 많은 정치 세력에 표를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상식적인 선거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도 인격이고, 사람이며, 숨을 쉬고 움직인다"라는 메시지를 더 많이 외쳐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쓴 신민주는 젊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 저자입니다.


태그:#20대 대선, #이재명, #윤석열, #박지현,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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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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