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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당시 중국 우한시 모습이다. 우한은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발상지이자 1938년 약산 김원봉 장군이 중국 관내 최초의 정식 군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장소다. 민족혁명당 출신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집단 거주하며 광복을 준비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2019년 6월 당시 중국 우한시 모습이다. 우한은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발상지이자 1938년 약산 김원봉 장군이 중국 관내 최초의 정식 군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장소다. 민족혁명당 출신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집단 거주하며 광복을 준비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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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국민혁명은 급속히 진척되었다.

1911년 10월의 신해혁명이 성공하면서 손문이 초대 임시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신규식은 그의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믿고 기대하였다. 두 수의 시를 지어 그를 찬양하였다. 「손중산에게」의 '촉수오산'은 촉나라 물과 오나라 산악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중국 전역을 가리킨다.

손중산대통령을 축하하여

공화국 새 세상 만들어내여
낡은 세상 새로이 돌려세우니
사해의 만백성 반려들 하며
손중산 우러러 받들어 모시네.

손중산에게

 촉수오산의 길 평탄치 않아도
 그대는 가시덤불 헤쳐왔어라
 피어린 싸움으로 키워온 포부
 만백성 모두 다 그대를 환호하네. (주석 5)


중국혁명은 그러나 원서개(袁世凱, 1895~1916)의 권력욕으로 역진의 길에 빠져들었다. 손문의 양설로 총리 자리에 올라서는 공화정치 대신 엉뚱한 황제 등극의 야심을 안고 혁명노선과 역행하기 시작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손문의 측근으로 신해혁명을 이끌던 송교인이 원세개의 하수인들에게 암살되었다. 누구보다 신규식을 이해하고 혁명노선을 함께했던 그의 돌연한 죽음에 망연자실, 사흘 동안 절식을 하며 애통해 하였다.

"송교인 선생이 피살되었을 때에는 선생의 비통은 더할 바 없어 극도에 달해 사흘을 두고 절식하시여 비통한 애도의 정념을 지으셨고 또한 몇몇 호국의 지사를 규합하시어 추도회를 열어 정중히 추도를 하니 국민당의 선열이 죽음을 당하고 외국인에게 추도를 받는 일도 이것이 처음이라 하겠다." (주석 6)
고 술회하였다.

얼마 뒤에는 가까웠던 중국인 동지 진기미 역시 반혁명 세력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였다. 그는 이번에도 가장 먼저 조문을 가서 머리와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시신을 부여안고 통곡하여 중국혁명당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와 같이 예관이 중국에 와 혁명당인과 가까이 지냈던 송교인과 진기미가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황흥마저 세상을 떠났으나, 혁명당인들이 근간이 된 이후의 중국 안의 변화는 계속 그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여 주도록 해 주었다. 

특히 진기미의 혁명정신과 국민당 안에서의 사업은 그의 질(姪)인 진과부(陣果夫)에게 연결되어(주석 7) 국민정부와 이후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가 더욱 밀착되도록 되었다. (주석 8) 


주석
5> 김동훈 외, 앞의 책, 78~79쪽.
6> 민필호, 앞의 책, 313쪽.
7> 호춘혜, 「진과부와 한국독립운동」, 신승하, 앞의 책, 재인용.
8> 신승하, 앞의 책, 61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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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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