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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가명)씨는 드라마 '펜트하우스'에 나오는 강남의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에서 일했다. 호텔처럼 고급스럽게 꾸민 아파트 로비의 안내데스크가 그녀의 일터였다. 아파트 입주민이나 마사지숍과 같은 상가를 방문하는 손님들을 안내하는 업무를 했다.

30억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아파트, 강남 상류층 사장님과 사모님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차림과 말투로 공손하고 반듯하게 입주민들을 맞아야 했다. 술에 취해 반말하고 진상을 부리는 입주민에게도 환한 미소로 대해야 했다. 입주민들의 '지적질' 때문에 안내데스크를 지키는 동안에는 화장실도 다녀오기 어려웠다.

그녀가 근로계약을 맺은 회사는 아파트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이 업체에 관리 업무를 위탁했다. 안내 직원은 4명. 두 명이 아파트 한 동을 관리했다. 그런데 어느 날 비용 절감을 한다고 직원을 줄여 3명이 아파트 두 동을 책임져야 했다. 업무 강도는 훨씬 세졌지만 월급은 최저임금을 벗어나지 못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휴게 시간에 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근무시간은 7시간, 휴게시간은 오전 30분, 점심 1시간, 오후 30분으로 2시간이었다. 하지만 정은씨와 동료들은 회의, 면담, 안내 방송, 세대 방문, 민원 해결, 배달 물품 수거, 주차 민원 확인, 카트 수거, 등기 전달, CCTV 판독, 아파트 출입문 개폐 등의 업무를 해야 했다. 각종 교육도 휴게시간에 했다. 최고급 아파트, 최고급 로비에서 일했지만, 월급도 최하급, 대우도 최하급이었다.

최고급 아파트의 최하급 대우

정은씨와 동료들은 월급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는 입주자대표회의가 반대한다며 안 된다고 했다. 휴게시간 근무의 대가도 요청했지만 마찬가지였다. 하소연해도 소용없었다. 참다못한 정은씨는 동료와 함께 휴게시간 근무에 대해 고용노동부에 체불임금 진정서를 냈다.

다음날 관리사무소장은 정은씨와 동료를 불러 노동청 진정 사실을 추궁했다. 사실을 알게 된 입주자대표회장은 괘씸하다며 정은씨와 동료를 내보내라고 했고, 회사는 그녀들의 업무를 중단시키고 대기발령 했다. 이어 안내데스크 직원 모집 공고를 냈다. 일을 빼앗긴 정은씨와 동료는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근로기준법 제104조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이 법 또는 이 법에 따른 대통령령을 위반한 사실이 있으면 근로자는 그 사실을 고용노동부 장관이나 근로감독관에게 통보할 수 있다"고 되어 있고, "통보를 이유로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에 불리한 처우"를 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율하고 있다.

아파트 관리회사는 근로기준법 104조 ②항 위반으로 신고할 수 있지만, 실제 해고를 지시한 입주자대표회장은 근로계약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신고하기 어렵다. '갑 오브 갑'이지만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억울한 정은씨는 직장갑질119에 편지를 보냈다.

정은씨는 근로계약서, 월급명세서, 직원 모집 공고문, 휴게시간 근무 사진, 소장과의 대화 녹음 등 증거자료를 꼼꼼하게 모았다. 정은씨와 동료는 회사와 입주자대표회장을 상대로 체불임금과 위자료 등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입주자대표회장에 대해서는 민법 제760조 제3항 "교사자나 방조자는 공동행위자로 본다"는 조항에 따라 아파트 관리회사와 공동으로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요구했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자료사진)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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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행위 공동행위자
 
'여기 아파트에 앉아서 이런 짓 할 정도면 일반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것 같은데, 넌 굉장히 밉살스러운 인간이야. 니 처자식한테 부끄럽게 행동하지 마. 니 처자식은 너 이러는 거 알아?' 녹음파일입니다. 아파트 입주민들이 직원들을 너무 괴롭히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2020년 6월)

아파트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관리사무소장의 갑질이 너무 심합니다. 다른 직원들과 이간질하고, 따돌리고, 화를 내기 일쑤입니다. CCTV로 화장실 가는 거 확인하고, 많이 갔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저를 내보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입주자 대표가 지시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2020년 9월)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장의 권력은 막강하다. 관리사무소 소장도 하루아침에 날릴 수 있는데 하물며 직원 하나 내보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근로계약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아 책임을 묻기 어렵다. 직장 내 괴롭힘도 적용되지 않는다. 직장 내 괴롭힘은 근로기준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청, 도급, 용역, 파견, 프리랜서,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들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보호 대상이 되기 어렵다.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엠브레인 퍼블릭에 의뢰해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3월 17일부터 23일까지 직장 내 괴롭힘 경험을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 직장인 32.5%가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 괴롭힘 가해자 중 고객이나 민원인 또는 거래처 직원(5.8%), 사용자의 친·인척(3.4%), 원청업체 관리자 또는 직원(1.8%) 등 특수관계인이 11%였다.

특수관계인은 갑질 금지법 적용 안 돼

지난 3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76조의 2, 3) 개정안이 통과되어 가해자가 사용자 또는 사용자 친·인척일 경우 최고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게 됐고 피해자 보호, 가해자 징계, 비밀누설 금지 등 의무 불이행 시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 조항이 신설됐다.

그러나 갑질 금지법의 적용 범위는 사용자와 직접 근로계약을 체결한 노동자(정규직, 계약직, 임시직 등)이기 때문에 펜트하우스 입주자대표회장과 같은 아파트 입주민의 갑질, 골프장 정규직 캡틴의 괴롭힘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캐디와 같은 특수고용직과 프리랜서 노동자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지난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인 국민의힘 임이자 의원이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에 "직장과 이해관계가 있는 도급인, 고객 등이나 사업주의 4촌 이내의 친족은 법률상 또는 사실상의 지위를 이용하여"라는 내용을 추가해 특수관계인을 법 적용 대상으로 확대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2018년 3월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가 본사 회의실에서 유리컵을 바닥에 던지고, 광고대행사 직원 2명에게 음료가 담긴 종이컵을 던진 뒤 광고주 지위를 이용해 업무를 중단시킨 이른바 '물컵 갑질'이 알려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근로계약 관계가 없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정부는 아파트 입주민 등 특수관계인의 갑질에 대해서는 노동청에 직접 신고하도록 하고, 특별근로감독을 벌여 '갑 오브 갑'의 갑질을 근절해야 한다. 또 일하는 사람들의 절반만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을 하루속히 개정해야 한다. 반세기 전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했던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 부끄럽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박점규 기자는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입니다.


태그:#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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