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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남북 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슈는 대부분 남한에서 생산된 정보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짙었다. 반면 북한은 어떤 의도와 주장을 가지고 이슈를 대했는지는 알 방법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남한 중심의 역사 서술이 지배적이었고 국제사회의 시각 내지 북한의 시각은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필자는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 산하 올림픽스터디센터(OSC)에 가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북한 문헌과 30년이 지난 외교부 공개 문서를 통해 세 주체의 입장을 서로 비교할 수 있었다. 이 연재에서는 남과 북 그리고 IOC 자료에 근거해 그동안의 남북 체육 이슈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파헤쳐 본다. 이 글은 필자의 논문 <남북 스포츠 분단의 역사적 함의>를 기사에 맞게 수정·보완했다.[편집자말]
2편 '한국 제명하라'... IOC 내의 이상한 기류(http://omn.kr/1r0e0)에서 이어집니다.

북한은 홍명희를 등장시켜 올림픽 참가를 위한 단일팀 구성에 집중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안돼 북한이 단일팀을 제의하자 이기붕과 이상백, 월터정으로 이어지는 KOC 대표들은 일관되게 단일팀을 거부한다. 그러나 단일팀을 거부하면 북한이 정식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므로 고민이 깊어진다. IOC의 계속되는 압박에 남한 정부와 KOC는 입장을 선회하여 단일팀 회담을 수락한다.

[1차 로잔 회담 1963. 1. 24] 비교적 순탄했던 시작

1963년 1월 24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첫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당국자 간 회담에는 IOC 대표로 타허르(S. E. Mohammed Taher; IOC 위원장 보좌관), 알버트 마이어(M. Albert Mayer: 스위스 IOC 위원), 오토마이어(Otto Mayer: IOC 사무총장) 세 명이, KOC 대표로 김진구(단장)·월터정·민용식·손기정·김정연 다섯 명이, DPRKOC 대표로 김종항(단장)·김기수·김화영·장승유·김영규 다섯 명이 참석했다

사회를 맡은 타허르는 단일팀은 하나의 깃발, 하나의 국가(國歌), 한 명의 대표 단장으로 이루어진 팀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KOC가 태극기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깃발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국가는 아리랑, 대표 단장은 동서독의 선발원칙에 따라 하기로 했고, 깃발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는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깃발 문제는 1963년 2월 7일 IOC 집행위원회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으로 하고 회담이 마무리됐다

다음날인 25일 북한의 김종항은 김진구에게 추가 회담을 제의했다. 남은 과제들을 풀기 위해 매번 IOC를 통해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어려우니 직접 만나서 대화하자고 했으나 남한 대표단은 이를 거절하고 26일 로잔을 떠났다.

깃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브런디지는 3월 13일 자 이상백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 규정에 따라 단일팀이 아니라면 북한이 독립팀으로 참가하게 될 것"이라며 "이 결정은 오래 연기되었고 우리의 규정을 어길 수 없다. 북한도 이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국기를 인정하지 않고 남한의 국기를 유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깃발 문제는 한동안 남한의 태극기 주장이 이어지다가 결국 브런디지의 중재안을 KOC가 받아들여 1963년 5월 15일에 가서야 오륜 마크 밑에 KOREA를 새긴 IOC 최종안으로 결정했다.  
1963년 당시 단일팀 깃발 문제는 남한의 태극기 주장과 북한의 한반도 모양에 오륜마크를 넣자는 주장이 맞서다 브런디지의 제안을 받아 들여 최종안을 결정했다.
 1963년 당시 단일팀 깃발 문제는 남한의 태극기 주장과 북한의 한반도 모양에 오륜마크를 넣자는 주장이 맞서다 브런디지의 제안을 받아 들여 최종안을 결정했다.
ⓒ 경향신문 196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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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홍콩 회담 1963.5.17∼6.1] 남한의 지연 작전

1차 홍콩 회담이 끝나고 KOC 보고서와 DPRKOC 보고서가 각각 IOC에 제출됐다. 두 보고서를 근거로 간단히 정리하면 KOC의 참가자는 이효(단장)·황엽·민용식·정상윤(수석)·문현주·조동제·남궁근이었고, DPRKOC 참가자는 김기수(단장)·고상준·이일성·고화영·서원준·김철희·안동호·손길천·마인찬·강성하·김덕현이었다. 이 회담은 IOC 중재 없이 남북 올림픽위원회 대표들만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첫 실무회담이었다.

당시 홍콩 회담 장소는 남한이 요구했으며 북한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결국 이를 따랐다. 북한이 홍콩에 입국하기까지 40시간이 걸렸다는 홍콩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의 언급이 있었는데, 북한의 비자 문제 때문이었다. 외교부 공개 문서에 의하면 남한 정부는 홍콩 총영사에게 공문을 보내 "북괴 대표의 홍콩 입국 비자를 정식 비자로 발급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청했으며 영국대사관에도 이를 통보했다고 한다. 또한 북한의 입국이 불허될 경우 홍콩 회담은 유회될 수 있을 것으로 남한 정부는 기대했다.

실제로 북한의 대표단은 1963년 5월 10일에 평양을 출발해서 5월 14일 1시에 홍콩에 도착했다.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북한은 로동신문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며 단지 홍콩 입국 사증을 제때 받을 수 없어서 예정보다 늦었다고만 밝혔다.

남한 정부는 또 5월 11일 KOC 대표단에 정부의 행동 지침이 담긴 훈령을 전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회담 진행중 KOC가 제안한 제의에 대하여 북괴가 부동의할 시에는 회담 결열(결렬)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태도로 회의에 임할 것임.
2. 따라서 귀관은 KOC의 제안에 북괴가 부동의 할 경우에는 회담 결열의 책임이 북괴에 있도록 회의를 이끌어 나가도록 하고 언론 기관을 통한 대외적인 선전을 [필요한 경우] 이 방향으로 적극 유도할 것.
3. 훈령은 KOC 대표가 지참함.
4. 7명 정도의 KOC 대표가 13일 출발할 예정임
 
한편 북한의 단장 김기수는 도착 성명에서 '남북 조선 유일팀 구성을 위해 10년간 시종 성의 있는 노력을 한 점'과 '지난 로잔 회의에서 원칙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점'을 상기시키며 홍콩 회담에서 그 기초 위에 실무적 문제를 토의하길 기대한다고 하였다.

남북 NOC 대표는 회담 초반부터 '회의 명칭' 문제로 치열하게 대립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은 '전한 단일팀 구성회의' 또는 '남북한 단일팀 구성회의'라며 한(Han)을 포함한 명칭을 주장했고, 북한은 '조-한' 또는 '북남'의 표현을 주장했다. KOC의 정통성(KOC에 정통성이 있다) 주장과 DPRKOC의 대등함(남북한 올림픽위원회는 대등하다)의 주장이 충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오토마이어는 이미 남북 단일팀 구성 논의에 있어 어떠한 차이도 없어야 하며 두 위원회는 동등한 권한을 갖는다는 원칙을 여러 차례 남북 NOC에 강조한 바 있다.

회담이 한참 진행 중인 5월 20일 KOC 단장인 이효는 개인 성명을 한국 기자단에 발표해 "북괴 대표의 연착으로 하루 늦게 시작된 회담은 그들의 회담 장소 시비와 행정 절차 문제 논쟁으로 필요 이상의 시간 낭비를 했다", "북괴 측의 무성의한 태도를 고찰할 때 실무자 회담은 여러 가지 난관이 예측되나 우리는 IOC 헌장 정신에 입각하여 동 회담을 진전시키자는 결심에는 변함없다"라며 북한을 비난했다. 이런 행동은 남한 훈령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여론 선전의 일환으로 보인다.

 
외교부 공개문서에 나온 정부의 훈령 중 '단일팀 회담에 임하는 우선 순위'. 1. 아국 단독 출전 2. 쌍방 불출전 3. 개별팀 출전 4. 북괴 단독 출전 5. 단일팀 구성 순으로 되어 있다. 단일팀이 맨 마지막에 있다. 외교부, 1963c, 188쪽
 외교부 공개문서에 나온 정부의 훈령 중 "단일팀 회담에 임하는 우선 순위". 1. 아국 단독 출전 2. 쌍방 불출전 3. 개별팀 출전 4. 북괴 단독 출전 5. 단일팀 구성 순으로 되어 있다. 단일팀이 맨 마지막에 있다. 외교부, 1963c, 188쪽
ⓒ 외교부 공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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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선수 선발 문제에 있어 예선 경기 장소와 시기, 그리고 올림픽 참가 행정 문제에 관해서 많은 대안을 갖고 회담에 임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보고서에 따르면 남한 대표단이 '권한이 없다느니 준비가 안 되었다느니' 하며 회의를 미루거나 거부한 사례가 여러 군데 나타난다. 실제 5월 14일 추가로 KOC에 전달된 남한 정부의 훈령을 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1. 회담은 가급적 결열을 피한다. 결열 시에는 결열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도록 할 것. 이러한 사태가 일어날 때에는 사전에 정부에 보고할 것.
2. 따라서 결열을 피하고 가급적 지연책을 쓰되 합의되지 않는 점은 다음 회의에서 토의토록하여 지연하여 갈 것.
 3. 상대방이 무리한 주장을 할 때는 즉시 이를 정부에 보고케 할 것
 
대표적인 예가 예선전 장소 문제다. DPRKOC는 국내가 아니면 제3국에서 하자고 계속 제안했다. KOC가 장소문제는 권한 밖이라며 다음으로 미루자고 하여 이 문제만 3일을 토의했다는 것은 남한 정부의 훈령에 의한 회담 지연작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회담장의 분위기와 내용을 실은 기사가 로동신문에 실렸다(로동신문, 1963.5.29.). 남한 대표단은 이것을 문제 삼으며 북한이 KOC를 비방했다고 하고, 북한 대표단은 먼저 KOC의 비방 성명이 문제였다고 받아치며 회담이 중단되기도 했다.

DPRKOC는 보고서 마지막에 홍콩 회담의 모든 절차를 공개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홍콩회담의 진실을 한국 국민과 세계 스포츠인들에게 알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고, 홍콩회의 나흘째 KOC의 이효 부위원장의 비방 성명에 비추어 볼 때, 그는 회담 진행 과정을 왜곡된 그림으로 보여주는 성명을 발표했기에 공개 절차는 더욱 정당하다."
- Brundage, Film 77-11, 146-155.
 
결국 두 NOC는 선수 선발 원칙에만 합의하고 나머지는 IOC와 협의하거나 다음 회의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하고 회담을 끝냈다.

[2차 홍콩 회담 1963. 7. 26] 회담도 못 해보고 결렬

IOC와 남북 NOC는 1차 홍콩 회담에서 결정하지 못한 단일팀 관련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2차 홍콩 회담을 추진하는데 합의했다. 1963년 7월 26일 오전 10시에 개최하기로 한 회담은 오전에 회담이 취소되고 오후에 KOC의 결렬 선언으로 끝이 났다.

KOC가 DPRKOC에 문제 삼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북한 김기수 단장의 귀국 보고가 허위와 KOC 비방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2차 홍콩회담 도착 성명에서 김기수가 'National Union'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회담을 두 국가의 연합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북한이 이 회담을 정치적 선전장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2차 홍콩회담이 끝나고 남북 NOC는 IOC에 회담 보고서를 보낸다. 이 보고서의 내용과 남한 정부 외교부 문서를 비교해 보면 KOC와 DPRKOC가 왜 회담도 시작하지 못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바로 남한 정부가 KOC에 전달한 훈령 때문이다. 1차와 마찬가지로 2차 홍콩회담 전에 남한 정부는 KOC에 다음과 같은 훈령을 전달했다.
 
1. 기본 훈령

가. 단일팀 구성을 위한 성의를 표면상 과시하면서 북괴의 저의를 파악 이를 분쇄하여 아측 단독 출전의 계기를 마련하도록 회담을 유도할 것.

나. 북괴는 모든 것을 양보하고 단일팀 구성을 획책할 것을 고려하여 언제던지(든지) 결열시킬 수 있는 보다 난제를 제시할 수 있도록 만반 준비를 가출(갖출) 것.

2. 세부 지침

가. 본 회담에 들어가기 전에 북괴 김기수의 귀한 보고의 허위성을 지적하고 공개 사과가 있기 전에는 회담을 거부하겠다고 강조할 것. 불응 시에는 결열시키고 그 이유로서 김기수의 허위 보고를 대내외에 공개할 것. 만일 이에 응하여 공개 사과를 하였을 때에는 김기수를 대표에서 빼도록 주장하여 볼 것

나. 호칭 문제는 전한 단일팀으로 일관 주장할 것
 
위 훈령에 따라서 KOC는 2차 홍콩회담에 임했으며 김기수의 도착 성명 마지막 문단에 있는 'National Union'이란 표현을 이유로 내부적으로 '회담 결렬'로 방향을 정한다. 그러고는 실제 회담 당일 김기수의 귀국 허위 보고에 대한 DPRKOC의 공식 사과와 대표단 교체를 주장하며 2차 홍콩회담을 일방적으로 결렬시켰다. KOC의 일부 대표단은 떠나고 DPRKOC는 계속 남아서 KOC에 회담 재개를 계속해서 요구했지만 더 이상의 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로써 IOC는 남북 NOC 자체적으로 단일팀 구성 회담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IOC 중재 하에 다시 회담을 하기로 한다.

[2차 로잔회담 1963. 8. 19] IOC 위원장의 실망

8월 19일 로잔에서 열린 네 번째 회담에는 IOC가 직접 나섰다. IOC는 '단일팀 구성에 관한 제안서'를 만들고 회담에 임하는 원칙을 자세히 정리해 남북 NOC에 전달했다. 1차 로잔 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IOC의 중재로 남북 NOC 대표자들이 모여 2차 로잔 회담을 이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KOC 대표는 회담 전날 미리 브런디지를 만나 회담 사안에 대해 결정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회담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전하고 다음날 떠났다. 이로써 2차 로잔 회담은 KOC의 불참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19일 당일 IOC와 DPRKOC가 만났다. 이 자리에서 브런디지는 남한의 불참에 대해 개탄했으며 DPRKOC에 환영 인사를 했다. 그리고 KOC가 8월 31일까지 단일팀 구성 회담 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했으니 좀 더 기다려줄 것을 북측 대표단에 요청했다. 김기수는 이러한 상황과 노력에 감사를 표했다.

이후 KOC는 단일팀 회담 재연기를 요청했으나 브런디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KOC의 이효는 브런디지에게 회담 결렬의 책임은 북한 대표단에 있다며 IOC의 질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토마이어와 브런디지는 회담 결렬의 책임은 KOC에 있으며 10월 IOC 총회에서 북한 팀을 승인하는 것에 대한 책임도 KOC에 있음을 분명히 지적했다.

그 후 1963년 10월 19일 제60차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DPRKOC는 독립팀인 North Korea NOC로 승인을 받는다. 이것이 DPRKOC가 IOC로부터 두 번째로 받은 승인이었다.

결국 남북 NOC는 네 번의 단일팀 구성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KOC가 의도적으로 회담을 결렬시킴으로써 북한의 NOC는 독립팀으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63년 남북 단일팀 깃발 문제에서 브런디지는 북한의 인공기를 인정하지 않고 남한의 태극기를 단일기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사진은 2018년 2월 1일 오전 강원도 강릉 평창동계올림픽 선수촌에 북한 인공기와 태극기, 오륜기가 게양돼 있는 광경.
▲ 태극기, 인공기 등 강릉선수촌 게양 1963년 남북 단일팀 깃발 문제에서 브런디지는 북한의 인공기를 인정하지 않고 남한의 태극기를 단일기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사진은 2018년 2월 1일 오전 강원도 강릉 평창동계올림픽 선수촌에 북한 인공기와 태극기, 오륜기가 게양돼 있는 광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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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남한의 회담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북 NOC 분리로 이어지는 스포츠 분단의 원인이 되었다. 만약 북한이 독립적인 NOC 승인이 최우선 목적이었다면 단일팀 구성을 위해 적당한 선에서 비타협적으로 대응해 회담을 결렬시켜도 독자적 NOC로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IOC는 단일팀 구성이 안 될 경우 북한의 독립팀 참가를 보장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마지막까지 단일팀 회담에 집착하며 회의를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북한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단일팀 구성에 힘을 쏟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좀 더 사료를 깊이 있게 분석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이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남한과 단일팀을 구성해야 했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반면, 남한은 단독으로 올림픽에 잘 출전하여 왔는데 IOC의 단일팀 제안이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고 북한의 정치선전 수단에 이용당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비난하며, 북한과 동등한 입장으로 단일팀을 구성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IOC는 분단국의 올림픽 참가문제를 평화와 공평의 문제로 접근했을 뿐, KOC를 더이상 한반도 대표 NOC로서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북한은 1972년 초까지는 단일팀 문제에 관해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태그:#남북 단일팀, #브런디지 컬렉션, #스포츠 분단, #남북 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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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학박사, 북한체육관련 연구, 관심분야: 남북 체육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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