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교리수업의 첫 숙제가 떨어졌다. '예수님 사랑으로 살아 본 소감문 쓰기'였다.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스스로 실천해 본 경험이나 자신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변화 같은 걸 적어 보라는 거였다. 공부 시작한 지 고작 세 달이다.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둘러보니 다른 분들도 모두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단호했다.

"지금 당장은 생각이 나지 않겠지만 분명히 한 가지 정도는 있을 겁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관찰하셔서 써보세요."

수업이 끝나고 운전해 집으로 가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숙제 생각밖에 없었다. 뭐가 있을까. 아무리 쥐어짜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처음엔 막막하다가 점차 답답해졌다.
 
천주교 예비신자 교리서 한국 천주교주교회의가 제작한 천주교 예비신자 교리서, 제18과에 치유의 성사(고해성사와 병자성사)가 등장한다.
▲ 천주교 예비신자 교리서 한국 천주교주교회의가 제작한 천주교 예비신자 교리서, 제18과에 치유의 성사(고해성사와 병자성사)가 등장한다.
ⓒ 이상구

관련사진보기

 
일요일이라 도로는 한가했다. 멀리서 곧 신호가 바뀔 것 같아 조금 속도를 올려 달렸다. 그때 갑자기 빨강색 자동차가 제 머리통을 불쑥 내밀었다. 좌회전 전용차선에서 내 차선으로 옮기려는 거였다. 부러져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빨강 차 머리통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자동차가 멈춰 섰다.

다행히 서로 부딪히지는 않았다. 차에서 내려 보닛 쪽으로 가보았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자동차 두 대가 서 있었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나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자동차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젊은 운전자였다.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아씨(아저씨) 뭐 급하다고 그렇게 밟아요? 사고 날 뻔 했잖아요."

한마디 할 때마다 희뿌연 담배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담배를 끼운 손가락으로 연신 날 가리켰다.

"아, 죄송해요. 앞에 아무도 없어서 제가 쫌 밟았나 봐요."

미소를 머금고 내가 대답했다. 운전자는 슬그머니 창을 올리더니 냉큼 제 갈 길을 갔다. 나도 다시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한참 운전을 하며 가다가 문득 '아, 이거 실화냐?'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니었다. 조금 전의 내 모습은 내가 아니었다.

그게 진짜 나였다면 자동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길길이 화를 내며 마구잡이로 욕부터 날려야 했다. 사주팔자에 화(火)가 3개나 되는, 그래서 마음 속에 늘 용암처럼 화가 부글부글 끓는,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분명하기에 그렇다. 나이 들면서 성질 많이 죽었지만 아직 기본은 한다.

그런데 아까 그건 뭔가. 아무 사고 없었다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제일 먼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더욱이 그 적반하장의 운전자에겐 웃으며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그런 행동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그랬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fact)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즈음 정말 화를 내고 욕을 하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웬만하면 화를 내지 않았다. 어쩌다 욕을 하려다가도 얼른 다시 집어 삼키곤 했다. 하느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약속한 마당이니 무의식중에 그래선 안 된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십계명에 그런 말씀은 없었지만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아, 내가 진짜 변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건 착각이었다. 그 실체가 드러나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집 도착 직전에 있었던 사고가 그걸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그때 나는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주님의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선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웠다. '아멘'까지 완벽하게 마쳤는데, 저 멀리서 '웨엥~' 하는 엔진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불길한 굉음은 빠르게 커졌다. 괴물체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후시경으로 얼핏 보니 배달 오토바이였다. 덩치가 꽤 컸다. 차도에 불법주차 차량들이 많아 유난히 좁은 도로였다. 위태롭게 내 차 옆을 지나던 오토바이는 결국 오른쪽 사이드 미러를 치고 지나갔다. 덜커덕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거울은 고개를 푹 꺾었다. 가해 오토바이는 추돌할 때만 잠깐 주춤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중심을 잡고 그대로 달아났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죽은 줄 알았던 화가 다시 눈을 치켜떴다. 그건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차에서 뛰어 내려 죽자사자 달아나는 오토바이의 뒤꽁무니에 대고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헬멧까지 뒤집어 쓴 운전자에게 들릴 리 만무한데도 나는 그렇게 길길이 날 뛰었다. 멀쩡한 중년의 남자가, 벌건 대낮에 대로 한복판에서, 게다가 자동차의 오디오에선 거룩한 성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듣기 거북한 욕을 해대는 그 부조리한 장면은 1분 남짓 계속됐다.

아, 나는 역시 나였다. 나는 스스로 변했다고 자부했지만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내 안의 더러운 영혼을 몰아냈다고 자신했지만 그건 그냥 숨죽이고 잠자코 있었던 거였다. 신앙 운운하며 하도 수선을 떠니 녀석은 어둠 깊숙한 곳에 잠시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다. 본디 타고나는 천성은 바꾸지 못한다. 나는 그 영원불멸의 법칙을 잠시 잊고 있었다.

사람은 변한다 VS 변하지 않는다
 
주보에 한 강론 메모  처음엔 수첩을 썼지만 탁자 위 공간도 없고 꺼냈다 넣다 불편해서 주보에 강론이며 소감 따위를 메모 한다. 퍼즐 맞추기 같은 재미도 있다.
▲ 주보에 한 강론 메모  처음엔 수첩을 썼지만 탁자 위 공간도 없고 꺼냈다 넣다 불편해서 주보에 강론이며 소감 따위를 메모 한다. 퍼즐 맞추기 같은 재미도 있다.
ⓒ 이상구

관련사진보기


나는 지금까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얼핏 변한 듯 보이지만 그 속내까지 완전히 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그런 것처럼 보이다가도 금세 본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사람이라 여겼다. 절대 죽이지 못하는 악마는 언제든 부활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뼈저리게 반성하던 전과자가 다시 같은 범죄를 저지르거나 부모님께 효도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예비역이 삼 일도 안 돼 입대 전 천덕꾸러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 신부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충분히 변할 수 있다고 하셨다. 변해도 그냥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과 후가 아예 다른 개체로 새롭게 태어나기도 한다고 하셨다. 단 '회개'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회개란 그저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려는 노력에 국한되는 게 아니며, 진심을 담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건 마치 예수님이 옷 벗김을 당하실 때만큼 고통스럽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예수님의 옷 벗김이라셨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직전 빌라도의 군사들이 피 떡 진 예수님의 옷을 벗기던 장면을 말한다. 옷에 들러붙었던 생살이 떨어져나갈 때의 고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회개가 그것만큼 고통스럽다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 같았다. 인간은 제 잘못이나 허물이 뻔히 드러나도 변명하고 발뺌하고 남에게 뒤집어씌우려 든다. 그건 본능이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인정하고 드러내고 용서를 구하는 게 어디 쉬운 노릇일까.

마침 그 즈음에 우리 교리수업에선 여러가지 성사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등등. 우리 예비신자들로서야 당장 목전에 둔 세례성사가 제일 기대되고 중요하게 생각 됐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고해성사가 제일 흥미로웠다.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은총을 받는다는 그 성스러운 예식(한국천주교 예비신자 교리서, p153) 말이다.

고해성사는 죄를 뉘우치고(통회) 고백하는 것만 아니라 보속까지 해야 한다. 보속이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에게 끼친 손해를 갚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생활태도를 갖추려는 노력 또는 자세(같은 책 p155)같은 거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상처받고 손해 본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 사죄하고 보상하며 이후의 삶에서 다신 그 같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말만큼 쉬울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흥미진진한 거였다.

그게 진정 가능하다면, 사람이 제 죄를 기꺼이 인정하고 반성하며 벌을 달게 받고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변한 거다. 문제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는가, 아니 있긴 한가? 지금까지 그런 사람 본 적이 없다. 눈물을 쏟으며 진정으로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그 와중에도 인간은 제 못된 본성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 신부님도 고해소에 들어와 남의 잘못을 고백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 슬프다고 하셨다.

사랑이 사람을 바꾼다

신부님은 그에 대한 해법도 알려주셨다. 그건 '사랑'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에게 한없이 미안해진다고 하셨다. 미안하기에 제 속의 모든 것을 털어 놓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느님을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면 자연히 진심으로 고백하고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는 죄인 하나가 의인 아흔 아홉보다 당신을 더 기쁘게 한다 하셨다. 그 회개하는 1인이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걸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물려받은 재산을 죄다 탕진하고 거지꼴로 되돌아온 아들 이야기 말이다. 그 아버지는 탕자 아들이 진심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되찾아 회개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를 환영하며 맞아준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사랑이 사람을 바꾼다? 얼핏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확신으로까지 이어지진 않는다. 솔직히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기에 그렇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남의 작은 호의나 친절조차 배경을 의심하고 저의를 계산하며 살아왔다. 너무 많이 상처를 받았고 속고 살아왔다고만 생각했다. 아예 이 세상엔 진정하고 영원한 사랑 따위는 없다고 믿어왔다.

돌아온 탕자의 회개도 믿지 않았다. 그가 그 이후로도 영원히 보속의 삶을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누구의 말처럼 내 마음 속의 악마를 온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Doctor Strange)에서 모두의 사부 격인 에인션트 원이 한 대사다. 그는 다만 (수련을 통해) 그걸(악마) 억누르는 법만 배울 뿐이라고 했다. 최강의 마법사를 키워내는 그조차 그러니 난 그게 당연한 진리인 줄 알았다.  

여기까지 얘기해 놓고 보니 내 꼴이 참 우습다. 나는 아무 잘못 없는데 남들이 날 속이고 상처를 줬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제 생각이면서 괜스레 영화 얘기 꺼내며 배우한테 덤터기 씌우고 있다. 모두 제 책임이면서 저는 아무 잘못 없는 것처럼, 그저 피해자인 양 하고 있다. 이거야말로 신부님의 비유처럼 고해소에 들어와 남의 죄 비는 격 아닌가. 이래서 나는 멀었다는 거다. 멀어도 아주 멀었다는 거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 강론의 말미에 신부님은 그러셨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부끄러워 말고 표현하라고 하셨다. 나도 그러고 싶다. 누군가를 마음껏 사랑하고, 그에게 부끄럼 없이 내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 설령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내 죄를 남김없이 고백하고 참회하고 회개하고 싶다.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