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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자유총연맹 회원들이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자유무역 파괴-경제침략 아베정권 규탄 집회를 열고 아베정권의 화이트리스트 한국제외를 철회와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며 한일 관계 우호를 위해서 민간교류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자유총연맹 회원들이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자유무역 파괴-경제침략 아베정권 규탄 집회를 열고 아베정권의 화이트리스트 한국제외를 철회와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며 한일 관계 우호를 위해서 민간교류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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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의 대명사 같은 존재이면서도 그간 이념 대결에 크게 휩쓸리지 않고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는 단체가 있다. 서울 남산 국립극장 맞은편에 본부를 둔 한국자유총연맹이 바로 그것이다.

1955년 12월 5일자 <경향신문> 기사 '초대 이사장에 공씨, 아주반공연맹 창립'을 비롯한 그 당시 언론보도들에 따르면, 이 단체는 그해 12월 3일 한국아시아반공연맹이라는 이름으로, 공진항을 이사장으로 내세우며 출범했다. 그 뒤 한국반공연맹으로 개칭됐다가 지금의 한국자유총연맹으로 변신하게 됐다.

1955년부터 기산하면, 이 단체 역사는 65년간이나 된다. 그동안 4·19도 거치고 6월항쟁도 거치고 촛불혁명도 거쳤지만,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가사처럼 '남산 위의 저 자유총연맹'은 오랜 세월을 굳건히 버텼다. 이 단체보다 늦게 등장해 한때 남산의 주인으로 군림했던 중앙정보부도 이미 오래 전에 하산했다. 이 단체가 중앙정보부보다도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 양혜왕 편에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이란 표현이 나온다. 안정적인 재산 혹은 직업과, 한 곳에 고정된 변치 않는 마음을 뜻하는 표현들이다. 맹자는 위나라 군주인 양혜왕(위혜왕)과의 대화에서 "항산이 없어도 항심을 갖는 일은 오로지 선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無恆產而有恆心者,惟士為能)"라며 "백성들은 항산이 없으면 항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若民,則無恆產,因無恆心). 항산이 있어야 항심을 품고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점을 맹자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자유총연맹 육성에 관한 법률' 제2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재산이나 시설을 자유총연맹에 무상 대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제3조는 국가와 지자체가 운영 경비와 시설비 등을 보조할 수 있도록 했다. 제4조는 조세 특례까지 규정했다.

유사한 규정이 박정희 정권 때인 1963년 12월 5일 제정되고 1964년 1월 1일 시행된 한국반공연맹법 안에도 담겨 있다. 이 법 제17조에서는 "련맹의 세입은 회비와 정부의 보조금 기타 찬조금으로 충당한다"고 했고, 제20조에서는 "국가는 예산의 범위 안에서 련맹에 보조금을 교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정부 지원은 이승만 정권 때도 있었다. 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한국아시아반공연맹의 창립총회가 열린 장소는 경복궁 광화문과 그다음 대문인 흥례문의 중간이었다. 이곳에 있었던 중앙청 국무회의 회의실이 창립총회 장소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 단체에 대한 정부 지원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법률에 기반을 둔 국가적 지원은 이 단체가 항산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로 인해 형성된 안정적인 재정 구조는 사람들의 항심이 이곳을 향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법률에 따라 정부가 재정 지원

그러나 재정 문제만으로는 이 단체의 장수 비결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법률에 의해 지원을 받는다 해도 여론이 악화돼 법률이 폐지되면 그만이다. 이 단체에 대한 지원 법률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 다른 비결을 규명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아시아반공연맹은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6월 결성된 아시아반공연맹의 한국지부로 출발했다. 아시아반공연맹은 한국 대통령 이승만과 중화민국(대만·자유중국) 총통 장제스(장개석)의 합작으로 만들어졌지만, 좀더 주도적으로 움직인 쪽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미국 대 소련의 냉전구도 하에서 미국 진영의 대세가 반공이라는 점'과 '한국전쟁 이후로 한국인들이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점'을 활용해 아시아반공연맹의 창설을 제창했다. 미국 진영과 남한의 대세인 반공이념을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이 조직의 한국 지부는 든든한 보호막을 갖고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총연맹이 가진 생명력의 일부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승만이 오로지 반공만을 위해서 반공연맹을 만든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동북아는 물론이고 동남아에까지 자신의 정치적 영향을 팽창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1954년 6월 15일 경남 진해에서 열린 아시아반공연맹 창립대회 참가국들의 면면에서 확인된다.

이 날짜 <동아일보> 기사 '금 십오일 역사적 개막'에 따르면, 한국과 중화민국 외에 필리핀·태국·베트남·유구(오키나와)·홍콩·마카오가 이 대회에 참가했다. 1945년 6월 미군에 점령된 오키나와는 1950년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 자치권은 오키나와가 일본에 넘어가는 1972년까지 유지됐다. 그래서 1954년 당시의 오키나와가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8개국을 자기 주도 하의 반공연맹으로 묶어 일종의 태평양동맹을 만들려 했다. 친미국가들을 엮어 태평양동맹을 구축하면 미국이 지원을 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정권도 공고해지리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1999년에 <국제정치논총> 제39집 제2호에 실린 최영호 영산대 교수의 논문 '이승만 정부의 태평양동맹 구상과 아시아반공연맹 결성'은 "(이승만 입장에서) 미국에 의한 충실한 안전보장을 얻기 위해서는 미국을 얽어맬 틀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이승만은 아시아반공연맹의 틀 속으로 미국을 유인하려 했지만, 상대방은 그 의도에 휘말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동아시아 반공국가들을 끌어들이면서도 일본만큼은 적극 배제했다. 이는 일본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충돌했다. 그래서 미국이 아시아반공연맹에 호감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의 구상은 또 다른 면에서도 미국과 충돌했다. 미국은 북아메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아시아판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 나토가 소련 등 공산권을 서쪽에서 압박하고, 동아시아판 나토가 이들을 동쪽에서 압박하는 전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동북아시아조약기구(NEATO)와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세우고자 했다. 나토를 닮은 니토와 시토를 생각했던 것이다. 니토는 이승만의 비협조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지만, 시토는 1954년 9월 출범했다. 시토의 등장은 아시아반공연맹의 존재 의의를 떨어트렸다.

아시아반공연맹 한국지부로 출범한 한국아시아반공연맹은 위와 같은 미국과의 갈등으로 크게 활성화되지 못했다. 미국 진영 내에서 반공을 기치로 내걸었다는 점에서는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었지만, 일본을 배제하고 미국과 충돌했다는 점에서는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활성화되지 못하던 한국아시아반공연맹을 크게 키운 쪽이 박정희 정권이다. 박 정권은 미·일과 충돌할 만한 요소를 배제하고 이 조직을 한국의 필요에 맞게 개조했다. 이 덕분에 반공연맹은 숨을 크게 쉬며 살아날 수 있었다.

2009년에 <한국민족운동사 연구> 제59권에 실린 유상수의 '한국반공연맹의 설립과 활동'은 박정희가 공산당 이력을 감추고 미국의 전폭 지원을 얻어내고자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했다고 하면서 "(박정희는)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반공단체 중 한국아시아반공연맹을 통해 반공정책을 수행"했다고 설명한다. 박정희의 필요에 따라 개조되면서 이 단체는 한국반공연맹으로 바뀐다. 위에 언급한 한국반공연맹법이 이때 공포됐다.

박 정권에 의해 개조된 한국반공연맹은 그 후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두고두고 남을 만한 맹렬한 반공운동을 펼쳤다. 공산주의문제연구소를 세워 반공이론을 정립·선전하고 해외 여행객들을 상대로 반공교육을 실시하며 반공 웅변대회나 궐기대회 등을 통해 국민들의 머릿속에 반공 이념을 주입했다.

대한민국의 반공정책이 정부의 강요가 아니라 민(民)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에 이 단체는 크게 기여했다. 반공이념의 사회적 명분을 구축하는 데 이바지했던 것이다.

정치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변신

그러는 사이에 이 단체는 '작은 국가'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규모와 세력을 팽창해 나갔다. 법률적 지원을 받으며 전국 시·도와 시·군·구로 지방 조직을 확장해 나갔다. 해외에도 지부가 생겨났다. 지방 조직 외에 여성과 청년 조직도 별도로 등장했다. 이렇게 크게 성장한 것은 이 단체가 박 정권 때 정치상황에 맞게 개조됐기 때문이다.

흐름에 맞춰 개조되는 모습은 박정희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民)의 역량이 고조되고 그 무렵의 유럽 공산권 약화로 반공이념의 유용성이 감소하던 시기에, 한국반공연맹은 한국자유총연맹으로 또 한번 거듭났다. 조직 목표를 약간 수정하고 명칭을 바꾸며 조직 개편을 단행한 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2015년 민주주의 연구과제'로 제출한 <지역민주주의와 관변단체에 관한 기초 연구>라는 보고서는 "1989년 2월 한국반공연맹의 명칭과 활동이 사회변화에 따라 개편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연맹을 폐지하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자유민주체제의 이념을 전달하는 범국민적 조직으로 한국자유총연맹을 결성키로 했다"고 설명한다. 반공을 더 이상 고집할 이유가 없게 되자, 반공에서 자유민주 수호로 목표를 살짝 수정했던 것이다.

좋게 표현하면 유연성이라 할 수 있는 이런 특성은 그 당시 단체 회원들의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반공연맹에서 자유총연맹으로 바뀌기 직전에 안양시 지부장이었던 박유선은 평화문제연구소가 1985년 발행한 <통일한국> 제20권과의 인터뷰에서 "구호만으로 반공을 하던 시대는 진즉 지났지요"라며 "국민들의 의식도 많이 발전했고 국내외 사정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시대 흐름에 맞춰 활동 내용에 변화를 줄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남북대화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남북대화는 자주 가질수록 좋다고 믿습니다"라며 "자꾸 만나 사정을 털어놓다 보면 같은 핏줄이니 어덴가 통하는 바가 있겠지요"라고 말했다. 박유선 지부장과 안양시 지부를 탐방한 <통일한국> 편집부는 기사 제목을 '시의 맞춰 행사 창출'이라고 붙였다. 반공연맹 지부를 취재하면서 '시의에 맞추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시의에 맞춰 태도를 조정하는 모습은 1989년의 조직 개편뿐 아니라 그 뒤로도 나타났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2000년에 남북대화 국면이 열리자, 자유총연맹은 이를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박유선 지부장이 표출한 "남북대화는 자주 가질수록 좋다"는 인식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자유총연맹은 금강산까지 가서 '6·15 선언 한돌 기념 금강산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가했다. <민족 21> 사장인 안영민 기자는 2001년 7월에 실린 이 기사의 제목을 '범민련·한총련에서 자유총연맹까지, 남북 민간단체가 한자리에 모인 날'로 잡았다.

이 단체는 촛불혁명 때는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김경재 자유총연맹 회장이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 집회에 참석해 탄핵반대 입장을 피력했던 것이다. 김경재는 2017년 3월 1일 태극기 집회에 회원들을 참석시킬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여론이 악화되자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가 아닌 태극기 국민운동이라는 행사 취지에 공감한 데 따른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그는 2017년 2월 10일자 <연합뉴스> 기사 '국고 받는 자유총연맹, 탄핵반대 집회 동원령 논란'에 실린 전화 인터뷰를 통해 "탄핵에 반대한다는 최근의 내 발언은 자유총연맹 회장이 아닌 내 개인의 자격으로 했던 주장"이라며 한 발 떼는 모습을 보였다. 자유총연맹 내에서 회장의 친박 활동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컸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촛불혁명 때는 여론의 집중 공격을 받을 뻔했지만, 1987년 이후로 이 조직은 보수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국민 여론을 크게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여 왔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도 '남산 위의 저 소나무'처럼 철갑을 두른 듯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법률로 보장되는 '항산'에 더해 시대 흐름을 크게 거역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있기에, 보수의 운신 폭이 갈수록 좁아지는 속에서도 한국자유총연맹이 여전히 간판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의 태평양구상과 맞물려 탄생한 이 보수 조직이 65년이 넘도록 장수하는 최대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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