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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선교사 드루가 살던 초가집
 의료선교사 드루가 살던 초가집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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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따르면 구한말~일제강점기(1896~1940) 미국 남장로교 선교 구역이었던 전라도 일대에는 군산예수병원(1896)을 시작으로 전주예수병원(1898), 목포프렌치병원(1899), 광주기독병원(1905), 순천안력산병원(1913) 등이 남장로교 한국 선교부에 의해 잇달아 설립·운영되었다.
     
전북 군산의 서양 의료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파송한 의료선교사 드루(Drew)에 의해 시작됐다. 1895년 봄, 드루와 전킨(Junkin) 선교사가 군산진영이 있던 수덕산 기슭에 초가 두 채를 마련, 포교소를 설치하고 금강·만경강 강변마을 중심으로 의료 선교를 시작한 것. (관련 기사: 죽는 순간에도 조선의 한센병을 걱정한 외국인 선교사)

대부분 마을은 토착민들이 선교사들 접근을 막거나 돌을 던지는 등 배척이 심하였다. 그러나 군산 지역은 지방관과 지역민 대부분 호의적이었다. 20~30km 떨어진 익산, 김제, 충남 서천, 한산, 부여 주민들도 물어물어 찾아왔다. 진료 횟수도 증가하였다. 새로운 의술과 친절에 감복한 사람들이 답례로 생선이나 곡식, 달걀, 어패류 등을 가져왔다.

전킨 선교사 부부는 구경 온 아이들에게 집을 개방하고, 온돌방에서 글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선교사들은 한복에 한국 음식을 먹고, 상갓집 빈소를 찾아 슬픔을 함께 하는 등 이질적인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전킨이 1903년 10월호 미셔너리에 기고한 한국인 장례식 참석 후기(빈소 분위기, 상여와 상두꾼들, 장지에서 엇갈리는 의견 등)에서도 그의 열의가 느껴진다.
 
"슬픈 의식에서도 말끔한 복색과 표정, 신앙으로 다져진 청년들이 많이 모인 것은 좋은 광경이었다. 다수가 망자(亡者)의 남동생에게 '부조금'을 전달하였다. 비상 지출이 필요한 가난한 형제를 돕는 데 해로운 전통은 아니다. 여기에서 옛것과 새것이 만난다. 상여꾼들은 이교도의 관습을 따르려 했기 때문에 질책을 받아야 했다..."

전킨은 "이토록 선량한 이를 곧장 무덤으로 옮기는 것이 너무 슬픈 일임을 알리느라 (상여꾼들은) 온 벌판을 떠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그리고 최근에야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한 늙은 비교인은 '흙'이 잘못되었으며 남편을 아내의 곁이 아니라 언덕 위에 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라고 덧붙인다.

영명중학교 학생들에게 기초의학 교육
 
 드루와 전킨 선교사가 이용하던 전도선
 드루와 전킨 선교사가 이용하던 전도선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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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하였다. 드루와 전킨은 그해(1899년) 12월 수덕산에서 동쪽으로 2~3km 떨어진 구암리(현 구암동산)로 옮겨 선교스테이션(구암병원, 구암교회, 영명중학교, 멜본딘여학교, 안락소학교, 성경학교, 도서관, 선교사 사택, 직원 숙소 등)을 개설하고 사역 범위도 주변 섬마을까지 확장한다. 당시 선교사들은 전도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1904년 가을 군산예수병원(아래 구암병원)에 의사 다니엘이 부임한다. 다니엘은 알렉산더(전임 의료선교사)가 보내준 기금으로 진찰실, 수술실, 입원실(18병상 온돌방) 등을 갖춘 현대식 한옥 두 채를 신축, 진료소 수준에서 벗어난다. 병동 신축 전에는 허름한 주막 모습의 진료소에 대기실이 없어 외래 환자들이 추위에 떨며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로 시설이 열악했다.

군산 선교스테이션은 오긍선이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1907년 가을 이후 큰 변화가 일어난다. 김제, 부안 관할권을 전주에서 군산지부로 이동하고, 영명중학교에 고등과와 특별과를 병설, 상급반 학생들에게 위생학, 생리학, 해부학, 화학·약물학 등의 기초 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1910년 중반부터 한국인 간호사 양성)
 
 일본식 통바지(몸빼) 차림으로 간호하는 군산병원 간호사들
 일본식 통바지(몸빼) 차림으로 간호하는 군산병원 간호사들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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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는 군산 시내에 지원(군산진료소)을 개원하고, 일본인 환자도 받는다. 진찰 잘한다는 소문이 충북과 경북 지역까지 퍼지면서 진료 횟수도 급증한다. 오긍선 박사 보고서에 따르면 1년(09년 7월~10년 6월) 동안 총 1만6174명(입원 및 수술 환자 포함)을 진료하였다. 그중 1만893명은 구암병원, 5281명은 군산진료소를 찾은 환자였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하는 경술국치 직전(09년 7월 1일~10년 6월 30일) 구암병원에서 수술받은 환자는 모두 104명으로 복부 수술이 가장 많았고, 간농양 수술, 팔다리 절제 수술 순이었다. 그해 군산 지방은 전례에 없는 흉년으로 기근이 심하여 환자들에게 약을 무료로 나눠줬음에도 병원 수입액은 350달러에 달하였다.

의학상식이 전무한 시절이었고, 농어촌 지역이다 보니 내과보다 외과 환자(탈장, 백내장, 크고 작은 절단 수술, 골저, 구순구개열 수술 등)가 훨씬 많았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며칠을 시달리고 나서야 의사에게 진찰받으러 오기 때문이었다. 폐렴이나 장티푸스 등 급성 질환에 걸려도 참고 견디다가 치료받을 시기를 놓치고 사망하거나 스스로 치유되기도 하였다.

삼일만세운동(1919) 이후 한국인 의사 채용
 
 패터슨 원장과 케슬러 간호선교사
 패터슨 원장과 케슬러 간호선교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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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의사 패터슨이 부임한다. 이후 노후건물 리모델링 및 도색, 병동 중축, 직원 숙소 및 부속건물 신축 등 외형을 확장, 국내 남장로교 병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된다. 환자도 해마다 증가한다. 1920년에는 입원 환자가 1799명(총 입원일수 2만5527일)에 달하였다. 이 기록은 서울 세브란스병원 통계에 버금가는 수치였다.

패터슨은 1922년 한국인 의사 3명을 채용한다. 그 시기 한국인 간호 인력은 34명으로 집계된다. 영명중학교 출신 직원(의사, 약제사, 사무직 포함)도 대폭 증가한다. 3·1만세운동(서래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직원만 12명(이준명, 양기준, 김창윤, 유한종, 양성도, 안경태, 홍원경, 임병률, 이진규, 김준실, 송기주, 이재근 등)인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아일보 광고(1920~1928)에 실린 구암병원 한국인 의사와 직원들
 동아일보 광고(1920~1928)에 실린 구암병원 한국인 의사와 직원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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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기준 선생 부부(공의 시절)
 양기준 선생 부부(공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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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신문(1920~1929) 기사와 광고에서도 한국인 의사와 약제사가 여럿 보인다. 계원식(의사), 김병수(의사) 홍원경(의사), 유흥두, 양기준, 전용규(의사), 이양규(회계), 박봉규(약제사), 임종국, 강필구(의사) 등이다. 그중 계원식은 경성의학전문학교, 김병수와 강필구는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였다. 양기준은 병원 조수(助手) 경력을 바탕으로 1932년 한지의사 시험에 합격, 북한지역 무의촌에서 인술을 펼친다.

계원식은 1920년 4월 홍원경, 유흥두 등과 <동아일보> 창간과 1921년 창간 1주년 축하 광고를 실어 눈길을 끈다. 계원식은 평양 출신으로 알려진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평양에 '기성의원'을 개원, 진료에 임하면서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지원에도 앞장선다. 그 후 일제 감시가 심해지자 배를 타고 군산으로 피신하여 한동안 구암병원 의사로 재직하였다.

1920년대 후반, 쇠퇴기 접어들어
 
 초창기 군산예수병원(구암병원) 모습
 초창기 군산예수병원(구암병원) 모습
ⓒ 전킨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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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거듭할수록 번창하던 구암병원은 192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선교사들의 잦은 이동과 공석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다. 사역 도중 질병으로 몸져눕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는 간호선교사가 한국인 의사와 호흡을 맞춰 진료하였다. 1930년대에는 대공황으로 인한 남장로회 선교 환경 변화와 일제가 군국주의 모드로 전환하면서 쇠퇴기로 접어든다.

중일전쟁(1937) 이후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초등학교와 병원에도 봉안소(봉안전) 및 신사를 설치하도록 조치한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던 군산 선교사들은 영명중학교와 멜볼딘여학교 자진 폐교로 맞서다가 1941년 본국으로 강제 출국당한다. 이때 구암병원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구암병원은 드루가 군산에서 진료를 시작하는 1896년부터 선교사들이 떠나는 1941년까지 의사 22명, 치과의사 1명이 진료한 것으로 집계된다. 그중 간호사는 케슬러, 쉐핑, 래스롭, 그린, 그리어, 우즈 등 16명. 이들은 환자 간호 외에 병원 운영과 조선인 간호사 교육을 담담하면서 한국간호사회 발전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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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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