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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성, 초기 정전회담장이었던 내봉장 언저리(1951. 7.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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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개성 정전회담장
한국전쟁 발발 1년이 조금 지난 1951년 7월 10일, 마침내 정전협정 제1차 본회담이 개성 내봉장(來鳳莊)에서 열렸다. 이곳은 99칸의 한옥으로 일제강점기 당시엔 유명한 요리점이었다.
유엔·공산 양측은 회담 시작부터 의자의 높이와 탁자 위의 국기 크기에서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유엔군 측은 협상 의제의 채택, 군사분계선 설정, 정전 감시 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그리고 전쟁포로에 관한 문제 등, 정전에 선행돼야 할 군사적인 문제만을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공산군 측은 쌍방이 적대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문제와 한반도로부터 외국군 철수문제가 우선적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 26일에서야 토의 의제가 결정되는 등 회담은 지리멸렬했다. 한 달여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던 정전회담은 공산군 측의 유엔군의 공습에 대한 항의로 회담 불참을 선언한 뒤 전망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유엔군 측은 다시 군사적 압력을 가해 공산군 측을 회담장에 불러낸다는 방침으로 더욱 치열한 공세를 취했다.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등의 말 그대로 피로 얼룩진 치열한 전투가 연일 펼쳐졌다.
이번 회는 1951년 7월, 8월의 NARA 소장 한국전쟁 사진으로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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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해군 전투비행기가 원산 상공을 초계비행하고 있다(1951. 7.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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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 정전회담장 밖에서 유엔군 측 기자와 중국군 통역관이 담소하고 있다(1951. 7.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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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 인민군 측 정전회담 실무자가 회의시간에 늦은 듯 화급하게 회의장으로 뛰어가고 있다(1951. 7.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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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산, 유엔군 측 기자단이 임시로 마련한 열차 안 프레스룸(1951. 8.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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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8. 15 광복절 행사에 몰린 인파(1951. 8.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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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보육원생들이 대구식물원을 견학하고 있다(1951. 8.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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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lliam W. Goodman 상병이 한국 홍천에서 찍은 사진 (미국의 ‘Broadway Echoes’ 프로의 간판스타 ‘페기 알렉산더’ 양이 한국의 최전방 부대로 위문공연하다. 1951. 8.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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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 베를린 울브라이트 운동장에서 열린 세계평화궐기대회에 참석한 북한대표단(1951.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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