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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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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 희생 77주기

허형식 장군님!

'세월은 쏜 화살처럼 빠르다'고 하더니, 2019년 8월 3일은 허 장군님이 북만주 깊은 산골에서 희생되신 지 꼭 77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날을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허 장군님 고향 후배(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들이 이 무더운 날 경북 구미에서 수륙만리 멀고도 먼 북만주 헤이룽장성 경안현 산골의 장군님 희생기념비까지 일부러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장군님 희생비 앞에서 제사를 올린 뒤, 저에게 그 소식과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그제야 제삿날인줄 알고는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허형식 장군 고향 후배 유적지 답사단 일동이 '허형식희생지' 기념비 앞에서 제사 후 기념 촬영(왼쪽부터 오상원, 장명순, 문명숙, 김병길, 윤정우, 신문식, 전병택, 장기태, 임재덕, 송성진, 임영태).
 허형식 장군 고향 후배 유적지 답사단 일동이 "허형식희생지" 기념비 앞에서 제사 후 기념 촬영(왼쪽부터 오상원, 장명순, 문명숙, 김병길, 윤정우, 신문식, 전병택, 장기태, 임재덕, 송성진, 임영태).
ⓒ 전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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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올해 제삿날은 그 어느 때보다 흐뭇하셨겠습니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라면 반갑다"는데, 10명이 넘는 후배들이 산 넘고 물 건너 만리 타향 북만주까지 찾아왔으니 무척 감읍했을 테지요. 더욱이 그들은 고향 선산들판에서 거둔 쌀과 고국에서 빚은 소주로 젯밥과 제주를 드리면서 합동으로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 반가움과 고마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조선은 물론 만주조차 강점한 일제는 1940년부터 장차 소련 진공을 대비하는 한편, 동북 항일 반만세력들의 뿌리를 뽑고자 그들의 관동군을 40만 명에서 76만 명으로 대폭 증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동북 일대의 항일 반만 세텩들은 모조리 조선 참빗질을 하듯이 샅샅이 낱낱이 싹싹 토벌했다지요.

이에 중국 북만성위원회는 항일 세력의 싹을 살리고자 그해 연말부터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케 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 김책, 최용건과 같은 동북항일연군 지휘관들은 러시아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허 장군님만은 단 한 번도 소련으로 월경치 않고, 동북의 인민들과 당신의전구(戰區)를 지키면서 소부대 현지 지도로 끝까지 일제와 맞서섰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외세의 앞잡이가 될 수 없다는, 당신의 신념이요, 금오산인의 자존심이었을 테지요.

허 장군님은 1942년 8월 3일 소부대 현지 지도 중, 북만주 청송령 외진 산골에서 위만(僞滿, 괴뢰만주국) 군경 토벌대와 교전하던 중 장렬히 희생하셨습니다.

저는 1999년 여름, 허 장군님 사돈집안 안동 임청각 석주 이상룡 임시정부 국무령 후손 이항증 선생과 항일무장투쟁 선봉장 일송 김동삼 선생 후손 김중생 선생의 안내로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갔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허 장군님 유품과 행적을 보고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때 두 분 선생님을 통해 거기 모셔진 허형식 장군님은 구미 금오산 출신으로, 동북 제일의 항일 명장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마치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탐험가처럼 흥분했습니다.

게다가 허 장군님은 구한말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의 조카라는데, 구미 출신으로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저는 쥐구멍을 찾고 싶도록 부끄러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구미 출신 작가로서 필생을 다해 써야 할 작품의 주인공을 만났기 때문에 무척 기뻤습니다.

그때 연길에서 만난 연변대 박창욱 교수로부터 추천받아 구입한 <결전>이라는 책 화보에서 허형식 장군의 모습을 처음 대할 수 있었습니다. 허 장군님의 그 늠름한 모습은 같은 남자로서도 반할 모습이기에 귀국 후 이를 스캔해 액자에 담아 지금도 제 서가 한 가운데 모셔두고 있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동포 김우종 선생이 쓴 '북만에서 유격전을 견지한 항일연군부대들' 편에서 허 장군님의 최후 희생 장면을 읽고 크나큰 느꺼움을 받았습니다. 마치 헤밍웨이가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마지막 장면 로버트 조던을 연상케 했습니다. 로버트 조던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희생했지만, 허 장군님을 부하를 위해 희생하셨지요.

'희생'이란 동서고금 시공을 초원하여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은 누군가 희생을 통하여 굴러가지요.
 
중국 헤이룽장성 경안현 대라진 소재 '허형식 희생지' 기념비에 고향 후배들이 간소한 제물과 들꽃을 바치다.
 중국 헤이룽장성 경안현 대라진 소재 "허형식 희생지" 기념비에 고향 후배들이 간소한 제물과 들꽃을 바치다.
ⓒ 전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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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한 희생

"1942년 7월 말, 허형식은 경위원(경호원) 진운상을 데리고 파언, 목란, 등흥 등지에 소부대사업 검열을 나갔다. 장서린 소부대가 동흥현 두도하자, 이도하자, 삼도하자의 숯구이 노동자들 속에서 반일회원을 100여 명이나 받아들였다는 보고를 듣고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비밀공작을 더 잘하라' 지시하고는 장서린이 파견한 경위원 왕조경과 함께 8월 2일 귀로에 올랐다.

바로 이때 일제 토벌대가 이 지역에 출동하여 산간지대를 수색하고 있었다.

허형식 일행은 청송령 기슭에서 밤을 보냈다. 이튿날인 8월 3일 아침, 경위원은 일제 토벌대가 접근하는 낌새를 모른 채, 밥을 지으려고 불을 지폈다. 계곡이 깊어 밥 짓는 연기가 미처 흩어지지 않아 그만 위만군 토벌대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허형식은 두 전사와 함께 토벌대와 맞서 싸웠다. 하지만 세 사람이 열 배나 더 많은 토벌대의 포위를 뚫고 나가기는 어려웠다. 교전 중, 허형식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엄호할 테니 빨리 철퇴하라고 두 경위원에게 명령했다. 하지만그 누구도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진운상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허형식은 왕조경에게 문건 배낭을 넘겨주면서 더 지체하지 말고 빨리 퇴각하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다. 그 문건 배낭에는 반일회원 명단이 들어있었다. 왕조경은 그 명단을 토벌대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허형식은 피를 흘리면서도 왕조경을 엄호하기 위해 큰 나무둥치에 기대어 적들을 계속 쏴 눕혔다. 그러나 적들은 수류탄 공세와 기관총 사격으로 응사하자 허형식은 끝내 그 자리에서 온 몸에 총탄을 벌집처럼 맞고 장렬히 쓰러졌다. 그때 허 군장 나이 33세였다." - 김우종, '북만에서 유격전을 견지한 항일연군부대들', <결전> 262~263쪽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 소장 허형식 장군 유품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 소장 허형식 장군 유품
ⓒ 전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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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장군님의 기마상이 금오산 기슭에 세워지기를

저는 허 장군님의 마지막 희생 장면과 당시 독립기념관 장세윤 연구사(현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의 <허형식 연구>란 논문에 감동받아 그 이듬해인 2000년 8월, 혼자 북만주 하얼빈으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동포사학자 서명훈, 김우종 선생의 안내로 동북의 인민들이 정성껏 세운 경안현 대라진 청송령 어귀의 '허형식 희생지' 기념비에 들꽃을 바치고 돌아왔습니다.

귀국 후 당신의 생애를 소설로 그리고자 여러 해 내공을 쌓은 다음, 실록소설 <들꽃>이라는 작품을 마침내 탈고하였습니다. 그런 뒤 더 많은 사람에게,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도 다 볼 수 있도록, 2014년 10월 5일부터 2015년 2월 14일까지 41회에 걸쳐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연재했습니다. 그런 뒤 2016년 11월,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신 낙동강 건너 인동 출신의 사학자 장세용 교수님이 구미 시장으로 출마하여 금오산 기슭에 허형식 장군의 기마상을 세우겠다고 공약한 바, 천우신조로 당선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즈음 고향의 뜻있는 후배들이 그 첫 단계로 올해 국가보훈처에 허형식 장군 서훈을 신청하였고, 그 서훈이 이루어지면 머잖아 기마상도 세워지리라 기대합니다.

이는 '사필귀정' (事必歸正)이요, '역사의 정의'입니다.

허 장군님 77주기 제사로 북만주 현지에 참석한 후배들이 저에게 보낸 전문에 따르면, 제사 후 그들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군가와 아리랑을 다같이 불렀답니다. 아마 장군님도 하늘나라에서 그들을 따라 합창하셨겠지요. 멀리서 듣기만 하여도 그저 감개무량합니다. 

저는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 작가 후기에서 다음의 말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서 금오산 기슭 채미정(採薇亭) 앞에 '항일명장 허형식 장군' 동상이 우뚝 세워지는 꿈을 꾸었다. 경향 각지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제막식이 거행되는 동안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연호했다. 금오산은 그 모든 걸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 꿈이 곧 현실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네요. 지금 저는 일찍이 공자가 말씀하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그런 심정입니다.
       
허형식 장군님! 당신은 위대합니다. 동북아 제일의 항일 명장이십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충절과 학문, 도덕의 고장, 선산 구미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촌누이(허길)의 아들(종생질) 이육사(본명 이원록 李源祿) 시인이 북만주에서 장군님을 만난 후 노래한 <광야>에서 당신은 '백마 타고 온 초인'으로, 이 겨레의 진정한 등댓불로 우뚝 솟았습니다.

허형식 장군님! 허형식 군장님! 허형식 총참모장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이 나라와 이 겨레의 수호신이 되어주시옵소서.

허형식 장군 만세! 이희산* 만세! 대한독립만세!


- 2019년 8월 3일 치악산 밑에서 박도 올림.

* '이희산'은 허형식 군장의 동북항일연군 군장 때 이명임.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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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만 알고 허형식을 모르는 그대에게

태그:#허형식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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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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