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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보는 유니클로 매장
 멀리서 바라보는 유니클로 매장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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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찌면서 브래지어 하는 일이 고역이 되었다. 젊었을 땐 브래지어를 안 하고 있을 때 옷에 쓸리는 느낌이 더 불편해서 잠잘 때도 브래지어를 착용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젠 외출 시간이 길어지면 브래지어 때문에 집에 일찍 가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유두에 밴드를 붙여야 하나 별별 고민을 하던 중 유니클로 속옷이 편하다길래 언제 사러 가야지 하고 있었는데 일이 터졌다. 아니, 개인 대 개인도 아니고 국가 간에 이런 치졸한 대응이라니. 유니클로 속옷은 과감히 포기하고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비슷한 상품을 구입했다.

얼마전 켄 리우의 단편집 <종이동물원>에 실린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읽었다. 소설은 과거의 시점으로 이동해 실제 벌어진 일을 볼 수 있는 기술 '뵘기리노 입자'를 개발했다는 가정하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731부대의 모습을 비춘다.

증거가 없다며 발뺌하는 일본측의 입장과는 달리, 수천 명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던 현장을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 731부대의 진상이 알려진다. 이를 둘러싼 각계의 반응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었다. '진정한 기억 없이는 진정한 화해도 없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과거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우리뿐은 아니구나 위안이 되었다.

민족을 떠나 세계 시민으로서의 양식에 비추어 볼 때 일제의 만행은 절대 은폐되어선 안 되고 분명한 책임 소재를 밝혀야 할 사안이다. 그럼에도 아직 일본은 그에 대한 분명한 사실 관계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 정부는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앙심을 품고, 수출규제라는 적반하장격의 보복을 자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애국, 혹은 민족의식 따위는 국가간 축구 경기 때나 잠깐씩 드러나는 구시대적 감정이라 생각하고 세계시민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고 싶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다. 마트에 일제 맥주가 진열되어 있는 게 눈에 거슬리고, 이런 시국에 지자체 임원들이 일본 여행을 갔다는 기사를 보면 분통이 터진다. 유니클로 매출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확인하게 되고 문구점에 가선 사고 싶은 예쁜 공책이 일제임을 확인하곤 불에 덴 듯 서둘러 내려 놓게 된다. 내가 쓰는 필기구도 일제임을 알고나선 누가 볼까 조용히 필통에 집어넣는다.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불쑥불쑥 맥락 없이 튀어올라와 인간을 괴롭히듯이 일본에 대한 분노와 공포 감정은 우리 국민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잠재되어 있는 듯하다. 물론 그 원인 제공자는 일본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를 '미개한 민족', '게으르고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으며 신의가 없는 민족'으로 낙인찍고 자신의 침략을 합리화하였다. 가난하고 못난 민족을 개화한 문명인인 자신들이 '개조'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그리고 그들의 후예인 아베 정권은 군대를 보유하고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 일본의 '정상국가'로의 변신을 도모하며 모든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 규탄 2차 촛불문화제가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전국 596개 시민단체가 모인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렸다.
▲ "NO아베" 촛불 광화문광장으로 진출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 규탄 2차 촛불문화제가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전국 596개 시민단체가 모인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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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전쟁 범죄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마땅한 사죄와 전범자 처벌 및 피해자 배상을 했다면 일본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감정이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과 우리는 진정한 기억도 공감도 화해도 한 적이 없다. 우리가 아베 정권의 행보에 불같이 반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90년대 중반쯤 <조선일보>에 이영희 교수의 '노래하는 역사'라는 연재 기사가 있었다. 일본 고대 시가집인 '만엽집'은 일본 학계에서도 명확한 해독을 할 수 없는 어려운 시들로 유명한데 이영희 교수가 우리 고대의 이두 표기를 활용하여 시가의 의미를 척척 풀어내는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기사의 내용 중에는 일본 씨름인 '스모'에 일본인들은 그저 의미 없는 구령 정도로 알고 있는 '핫키요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시작)하기요'라는 우리말이며, 접전이 지연될 때 '다가!, 다가!'라는 심판의 호령은 '다가(가 싸우라)'는 우리말로 이루어진 용어라는 부분이 있다. 만엽집 노래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의 것이다. 당시 우리 삼국시대의 정치적 격동기에 일본으로 대거 건너간 한반도인들이 고대 일본의 상층부에 자리잡고 고대 우리의 언어를 한자식으로 표기하여 만든 시가집이 만엽집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일본 최초의 정사서(正史書)인 '일본사기'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교묘히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도 담겨 있었다.

일본 고대 문명이 일본으로 진출한 한반도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안그래도 얄미운 일본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흥분한 나는 당시 <노래하는 역사>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을 사 보고 '일본에 존재하는 고대 한반도 역사를 찾아서'라는 역사 기행에도 참가했던 기억이 난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우리 민족을 '가난하고 무능력한 미개 민족'으로 낙인찍었던 일본에는 아직도 혐한 세력이 존재한다. 게다가 '우리가 뭔가 잘못해서 일본을 자극했다'는 논조의 일부 우리 정치인과 언론을 보면 수십 년 동안 과연 우리가 바꾸어 낸 것은 무엇일까 의문이 든다. '우리가 못나서 당했지'라는 자조가 말이 안 되듯이 만엽집 해설 기사를 탐독하며 우쭐해하던 과거의 나처럼 '사실은 우리가 더 우월해'도 억지다.

민족 간의 우열을 논하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사고방식이며, 누가 누굴 이겨야 한다는 발상 자체는 시대착오적이다. 다만 타국에 대한 침략이나 지배를 반성하지 않은 채 또 다시 군사대국화를 도모하려는 획책에 대해서는 분명한 반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이 아니라 범세계의 평화를 논하는 관점에서 전쟁과 침략,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 정부에 대해 명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할 필요는 있다. 한때 접속 폭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노노재팬'으로 가 본다. 내가 좋아하는 이치방시보리 맥주, 감기약 화이투벤, 띠어리, 시세이도, 아식스, ABC마트 등은 당분간 사거나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의 이런 의사 표현은 단순히 '반일'이 아닌 '반아베'여야 하고 '반전', '인권', '평화'의 의미를 담아야 한다. 이를 통해 양심적이고 의식 있는 일본인, 정의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들과 연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태그:#불매운동, #반아베, #강제징용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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