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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새내기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십 년 전. 봄을 맞은 캠퍼스 곳곳에 이런 현수막이 걸렸다. '바람의 딸, 한비야 강연회'. 걸어서 세계 일곱바퀴 반을 걸었다는 용감한 여자 한비야의 이야기를 들으러 다 같이 강단으로 몰려갔다.

늦게 도착한 나는 자리가 없어 계단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였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강연이 끝난 후 모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열에 들떴던 장면, 웅성거리던 강연장의 그 공기가 생각난다. 다들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던 젊은이들이 모두 배낭을 짊어지고 비행기에 올라타서일까. 지금은 세계여행이 별 대단치 않은 일로 보인다. 일 년여 전, 남미를 3개월 여행하는 동안 만났던 세계여행자들만 백여 명. 서점에도 매일 새로운 여행 에세이가 쏟아진다. 독립출판물 중에서도 가장 많은 장르는 여행기다.

누군가의 여행기를 읽어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광을 인스타로 보아도, 장기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의 화려한 무용담을 들어도, 웬만해서는 그때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여행이 가고 싶다는 그 말. 심장 아래 어딘가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날 것만 같은 그 설렘.

그런데 오랜만에 여행이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을 만났다.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 표지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 표지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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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피디 김민식의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다. "여행이 인생의 쓴맛을 단맛으로 바꿔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준다!"라고 이야기하는 그는 이 책을 통해, 가볍게 다닐 수 있는 뒷동산부터 아프리카와 남미까지 여행지를 소개한다.

부산 갈맷길 베스트 3, 겨울에 떠나는 타이완 남부 가오슝 당일치기 코스, 자전거 전국일주 코스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프렌즈와 렛츠고 같은 여행 가이드북처럼 정보 제공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이 책은 '여행기'라기보다 여행을 통해 알게 된 삶의 소소한 팁을 나누는 에세이에 가깝다.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은 그의 이력 때문인지 그가 여행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 역시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저자는 2012년 MBC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하다 징계를 받았다. 외국계 기업의 영업사원으로 시작하여 통역사에서 예능 PD까지, 직업변천사도 화려하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유튜브에서인가.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에 대한 강연을 스치듯 보았던 기억이 난다. 힘들게 살아서일까. 그가 여행을 하면서 가지게 된 삶을 대하는 태도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하여, 이곳에 그가 전한 몇 가지 상념을 옮긴다.
 
하나,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입니다


책을 읽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 있으면 밑줄을 긋는 습관이 있는데,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에서는 첫 단락, 첫 줄부터 펜을 꺼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입니다. 걷기 여행의 즐거움도 강도가 아니라 빈도예요. 멀리 있는 히말라야나 산티아고를 그리워하는 대신 집 근처 산을 자주 걷습니다. 내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새록새록 되새기며 삽니다."

저자는 자신이 사는 집 근처의 뒷산을 자주 간다고 했다. 마포에 살 때는 연세대 뒷산인 안산을, 동작구에 살 때는 서울대공원 삼림욕장을, 강남에 살 때는 우면산이나 청계산을 자주 간단다. 백만장자가 아니고서야 우리는 늘 새로운 풍경만을 보며 살 수는 없다. 일 년에 한 번, 모은 돈으로 겨우 연차를 이어 붙여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건 내 집, 직장 가는 골목, 지하철 안이다.

여행을 갈 때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들을 죽은 시간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다면, 매일 마주치는 풍경에서 소소한 감동을 느낄 줄 아는 감각을 길러야 할 것이다. 저자도 책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한다.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다'라고.

저자는 걷기 마니아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하루 몇 만보씩 걷기 위해 날을 잡을 때도 많다. 해외에서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여행한다. 걸어서 볼 수 있는 풍경은 또 다르다. 나도 등산은 싫어하지만 걷기라면 자신이 있었다.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에서 추천한 걷기 코스를 따라 선선한 날 걸어보기로 다짐한다.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 첫 장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 첫 장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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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관광객에겐 일정이 있고, 여행자에겐 과정이 있다
 
"사람들이 관광객과 여행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으면 저는 관광객에겐 최고가 중요하고 여행자에겐 최선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관광을 다닌다면 제한된 일정 안에 여행지를 잘 보기 위해 최고의 목적지를 선정하겠죠. 혼자 다니는 제게 그런 목표는 없어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과정을 즐깁니다."

패키지여행을 자주 가지 않는다. 누군가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도 해서이지만, 모든 것을 미션 달성하듯 해치우는 패키지 관광이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관광객과 여행자의 차이를 말했을 때, 그래 저런 느낌이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하는 최근 에세이 <여행의 이유>에서 부모님 여행을 보내드렸더니, 아버님께서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노트에 빼곡하게 적어오셨다는 이야기를 풀었다.

여행을 무언가를 배워와야만 하는 미션으로 생각하신 것처럼 보였다.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고, 미슐랭 스타를 받은 그 집에서 이것을 먹어봐야 하며, 고흐가 그렸다는 그 골목을 걸어봐야 한다. 이렇게 여행하면 여행은 '일정'이 되지 '과정'이 되지 않는다. 저자의 저 말이 삶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지는 것이 결코 착각은 아닐 것 같다.

셋, 물건보다 경험에 돈을 쓰며 산다

저자는 책에서 몇 번이나 자신이 짠돌이라고 호언한다. 쇼핑도 좋아하지 않고, 돈을 내야 하는 일이라면 한 번 더 생각해 본다고.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책에서 저자가 여행한 나라가 너무 많다. 일본, 태국, 라오스, 필리핀, 뉴욕, 런던, 탄자니아, 아르헨티나. 무조건 돈을 아끼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여행도 가지 않을 터인데 어찌 된 일일까?

아마 저자도 요즘 유행한다는 '경험주의자' 혹은 '경험콜렉터'인 것 같다. 쓸데없는 사치는 지양하지만,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지갑을 여는 사람. 나도 경험콜렉터를 자처한다. 진정으로 내 안에 쌓이는 것은 경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몇 달치 월급을 모아 산 명품백도, 순간속력이 뛰어나 다른 차를 금방 앞지르는 디젤차도 내가 '소유한 것'이지 나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경험은 내 안에 녹아 나 자신이 된다. 가방을 잃어버려도, 차를 팔게 되어도 내게 남는 진짜 내 것이다.

짠돌이이면서도 경험주의자로서 살기 위해 저자는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에서 여행 꿀팁을 제공한다. 여행을 가면 현지인들이 북적거리는 식당에서 먹을 것,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시키는 메뉴를 시킬 것. 그래야 현지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싼값에 신선한 재료의 요리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뉴욕에서 뮤지컬 보는 방법으로는 이미 한물간 쇼, 영화에서 본 쇼를 선택하라는 팁도 전한다. 그만큼 보장이 된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투어를 해보고 싶다면 3~4곳을 골라 인터넷 말고 현지에서 흥정을 해보라고도 말한다. 처음부터 너무 싼 가격을 부르는 곳 말고 정직하게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하는 곳에서 투어를 하면 후회가 없단다.

여행이 전국민의 취미 1순위가 된 지 오래이지만, 정말로 여행을 즐기는 자신만의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다 가니까, 거기가 유명하대서. 그런 이유라면 여행이 아니어도 즐길 만한 취미는 많을 것이다.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 뒤편에는 방송인 김소영씨의 이런 추천사가 담겨있다.
 
"꾸준한 여행은 그에게 삶을 지탱하는 잔 근육들을 만들어준 모양이다. 그러다가 비로소 삶을 여행처럼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된 것이겠지."

김민식 저자는 여행을 한다. 그래서 삶을 여행처럼 사는 방법을 알게 되었나 보다. 이 책을 읽는다고 그의 여행 근육이 내 것이 될리는 만무하다. 백날 요가 동영상을 본다고 해서 내 몸이 요가 선생님처럼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요가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리라. 그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

김민식 (지은이), 위즈덤하우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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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