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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의 고인돌 유적 중에서 가장 학생들에게 보일 만한 곳은 수성구 상동 정화우방팔레스 아파트 뒤편의 '상동 청동기 마을' 유적이다. 이곳은 고인돌과 청동기 집터 유적이 함께 있을 뿐만 아니라 집터와 고인돌 하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땅을 파고 그 위에 유리를 덮어놓아 현장답사에 아주 적합하다. 청동기 시대의 석검 모형과 움집 모형도 설치되어 있다.
 대구의 고인돌 유적 중에서 가장 학생들에게 보일 만한 곳은 수성구 상동 정화우방팔레스 아파트 뒤편의 "상동 청동기 마을" 유적이다. 이곳은 고인돌과 청동기 집터 유적이 함께 있을 뿐만 아니라 집터와 고인돌 하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땅을 파고 그 위에 유리를 덮어놓아 현장답사에 아주 적합하다. 청동기 시대의 석검 모형과 움집 모형도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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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본래 이름 '달벌'을 757년(신라 경덕왕 16)부터 잃어버렸다. 경덕왕이 신라의 인명과 지명을 대대적으로 중국화하면서 대구(大丘)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벌이 대구로 변한 일을 두고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과장할 수는 없다.

대구는 1906년과 1907년 두 해에 걸쳐 '대구읍성'도 잃어버렸다. 일본인 상인들의 철거 청탁을 받은 당시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 박중양이 고종의 불허 방침도 무시하고 대구읍성을 뭉개버렸기 때문이다. 대구읍성은 1888년 대구를 방문한 프랑스 지리학자 샤를 바라가 '북경성만큼이나 아름다운 성'이라고 격찬했던 문화유산이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 박중양은 국가의 중요 군사 시설을 제멋대로 없애버릴 만큼 막강했다. 

본명과 대구읍성 상실보다 더 아까운 유산 

대구읍성이 없어진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역시 세계 제일의 문화유산을 대구가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구가 잃어비린 세계 제일의 문화유산은 따로 있다. 대구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더 많은 고인돌을 보유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윤용진 명예교수는 '대구 지석묘 단상'이라는 글을 써서 그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대구의 지석묘(고인돌)는 일제가 1927년 발굴, 조사한 <대봉동(유적의 당시 소재지로 현재는 이천동 소속임) 지석묘 조사 보고서>를 통해서 일약 유명해졌다. (중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석묘 이야기만 나오면 대구를 연상할 만큼 대구 지석묘는 학계에서 유명했다. (중략) 1980년대가 되면서 도심이 급속히 확장되고 이에 따라 장관을 이뤘던 (대구의) 지석묘들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대구에 있는 고인돌 유적 중에서 사장 시원스러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제일교회 뒤편의 고인돌 유적이다. 대구시 기념물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에 있는 고인돌 유적 중에서 사장 시원스러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제일교회 뒤편의 고인돌 유적이다. 대구시 기념물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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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과 서울대 박물관이 1999년에 공동 발간한 <한국 지석묘 유적 종합 조사 연구>에 따르면, 지구상에는 고인돌이 6만여 기 남아 있다. 그 6만여 기의 82.5%인 4만9510기가 우리나라에 있다.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우리나라를 '고인돌의 나라'라 부른다.

세계 고인돌의 82.5%가 우리나라에 있었다

4만5910기의 고인돌 중 2만9510기는 남한에 있고, 2만여 기는 북한에 있다. 그런데 남한의 2만9510기에는 대구의 3000여 기가 포함되지 않는다. 

대구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고인돌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고인돌의 도시'라 불렸는데(<영남일보> 2010년 10월 9일, 박진관 기자), 왜 대구의 3000여 기 고인돌은 세계 그리고 우리나라 고인돌의 총수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해방 전후와 1970, 80년대 도시 개발 풍조 속에서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땅속에 매장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대구에 있는 고인돌 유적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곳은 지하철 칠성시장역 북쪽 출구에 있는 칠성바위 유적이다. 아들이 일곱 명 있는 집에서 그 아들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각 바위에 아들들의 이름을 하나씩 새겨넣었는데, 험상궂은 세 바위에 이름이 각각 새겨진 세 아들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장수가 되고, 곱상한 세 바위에 이름이 각각 새겨진 세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해 높은 관리가 되었는데, 평범한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한 아들은 그냥 평범한 백성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사진을 보면 바위 가운데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네모난 표식이 있다. 이 바위에는 이의갑(李義甲) 세 글자가 새겨져 있어 '甲'을 통해 그가 장남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구에 있는 고인돌 유적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곳은 지하철 칠성시장역 북쪽 출구에 있는 칠성바위 유적이다. 아들이 일곱 명 있는 집에서 그 아들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각 바위에 아들들의 이름을 하나씩 새겨넣었는데, 험상궂은 세 바위에 이름이 각각 새겨진 세 아들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장수가 되고, 곱상한 세 바위에 이름이 각각 새겨진 세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해 높은 관리가 되었는데, 평범한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한 아들은 그냥 평범한 백성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사진을 보면 바위 가운데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네모난 표식이 있다. 이 바위에는 이의갑(李義甲) 세 글자가 새겨져 있어 "甲"을 통해 그가 장남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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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제는 '대구는 고인돌의 도시'라고 말하면 '거짓'이 된다. 현재는 고인돌이 100여 기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고, 그나마 뿔뿔히 흩어진 '이산가족' 신세라 주목을 받을 모양새도 못 된다. 그 탓에 '대구는 고인돌의 도시였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구시가 펴낸 <대구의 향기>의 고인돌 기사도 모두 과거 시제를 쓰고 있다.

대구에는 굉장히 많은 지석묘가 있었다. (중략) 대구역 부근에서 달성공원에 이르는 사이에 지석묘가 (많이) 있었고, 서남쪽으로는 화원(읍)에 이르는 도로 부근에 2km에 걸쳐 이어져 있었고, 동남쪽으로는 봉산동 대봉동에 이르는 사이에 (많이) 있었으며, 신천 너머 수성들에도 남북으로 1km에 걸쳐 늘어서 있었다. (중략) 하지만 시가지의 발전에 따라 지금은 대부분의 지석묘가 없어지고 말았다.

누가 고인돌을 대거 파괴했는가

<대구 시사>도 '대구 분지를 흐르는 신천의 유역에 분포한 지석묘군은 일찍부터 알려졌고, 남방식 지석묘 묘제의 대표적 유적으로 유명하다. 이 지석묘군은 192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옛 대구읍성 바깥에 분포해 장관을 이루었다'면서 대구 고인돌 군집의 대단했던 모습을 추억한다. 그러나 이 책 역시 '대구의 그 많던 고인돌들이 거의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라고 안타까워 한다.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151-1번지에 있는 대구시 기념물 13호 고인돌은 사찰과 교도소를 좌우로 거느리고 있다. 고인돌은 화장사 안에도 있고, 사찰 담장에 박혀 있기도 하고, 교도소 철망 아래에 산재해 있기도 하다. 사진에 보이는 푸른 철망이 교도소의 것이고, 와가가 화장사 절집의 일부이다. 화장사 안에 있는 고인돌은 사찰 담장에 가린 탓에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151-1번지에 있는 대구시 기념물 13호 고인돌은 사찰과 교도소를 좌우로 거느리고 있다. 고인돌은 화장사 안에도 있고, 사찰 담장에 박혀 있기도 하고, 교도소 철망 아래에 산재해 있기도 하다. 사진에 보이는 푸른 철망이 교도소의 것이고, 와가가 화장사 절집의 일부이다. 화장사 안에 있는 고인돌은 사찰 담장에 가린 탓에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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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이 땅을 강제 점거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자기네 정원을 꾸미는 데에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함부로 가져다 썼다. 1919년 독립만세 운동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서문시장을 1928년에 강제 이전시키면서 장터 조성용 흙을 충당하기 위해 비산동과 내당동 일대의 고분군을 파괴했던 일제가 고인돌들도 대대적으로 훼손했다.  

<대구시사>는 '(전국 고인돌 중) 첫 지석묘 발굴 조사가 (대구 이천동 고인돌을 대상으로) 1927년에 있었을 때에는 이미 상당수의 지석묘 상석이 일본인들의 정원석으로 많이 이용되어 원위치에서 이동되었다'라고 고발하고 있다.

최초의 고인돌 발굴도 대구에서 있었다

그런데 <대구시사>는 '일본인들의 행위 후에도 시가지의 확장으로 상석의 대부분이 제거되었다'면서 우리 자신의 잘못도 지적한다. '대구 시역의 확장으로 진천천 유역, 욱수천 유역, 율하천 유역의 반야월 지역 지석묘군마저 최근의 갑작스러운 경제성장에 따르는 대규모 공업단지 조성, 시가지 확장 등 국토개발로 거의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과 화순 일대보다도 더 많은 무려 30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대구, 지금도 그것들이 제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수성못 유원지 옆의 상동 501번지에 있는 '상동 고인돌'은 대구시 기념물 12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지만 비교적 어수선하게 관리되고 있다. 고인돌 뒤로 넓은 주차장이 보이지만 사유지인 탓에 진입로가 막혀 있어 차량이 들어갈 수 없다.
 수성못 유원지 옆의 상동 501번지에 있는 "상동 고인돌"은 대구시 기념물 12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지만 비교적 어수선하게 관리되고 있다. 고인돌 뒤로 넓은 주차장이 보이지만 사유지인 탓에 진입로가 막혀 있어 차량이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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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시내에서 접근하기 쉽고, 잘 가꾸어져 있고, 답사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고인돌 유적지는 수성구 상동 171번지 앞의 '상동 청동기 마을'이다. 이곳은 고인돌과 청동기 집터 유적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희귀한 답사지다. 수성구청은 청동기 시대 집터와 묘 내부 모형을 설치한 후 유리로 덮어놓음으로써 답사자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해두었다.

시외로 나가면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385-5번지 가창제일교회 뒤에 있는 고인돌 유적이 아주 볼 만하다. 멀리 산들이 정면으로 보이는 넓은 잔디밭에 청동기 시대의 무덤들이 평화롭게 누워 있다. 이곳은 대구시 기념물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장 훌륭한 고인돌 답사지는 '상동 청동기 마을'

그외 달서구 진천동 유적지(사적 411호), 지하철 대구역 칠성시장 방향 출구에 옮겨져 있는 칠성바위, 대구교도소 담장 바로 아래와 화장사 대웅전 일대의 화원읍 천내리 유적지(기념물 13호), 시지 보성아파트 단지 내 고인돌 유적지, 수성유원지와 안상규벌꿀 중간 지점의 상동 고인돌 유적지(기념물 12호) 등에서 고인돌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는 고인돌에 새겨진 선사시대 그림들을 탁본할 수 있도록 모형 입석을 세워둔 진천동 유적, 돌마다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흥미를 끄는 칠성바위, 사찰 담벼락에 박혀 있기도 하는 화원읍 천내리의 고인돌들도 답사자의 발길을 잡아당긴다. 하지만 그것들을 볼 때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졌던 고인돌들을 대구가 거의 대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이 새삼 솟아난다. 

고인돌 유적 답사는 보람있는 일

그래도 고인돌과 같은 과거의 역사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일은 보람있는 인간 활동이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교훈과 지혜를 주는 까닭이다.

그런 뜻에서, 대구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고인돌 유적지들의 주소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해 본다. '당신이 소개한 주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만나게 되었다'면서 청동기 시대 고대인들이 감사 인사를 해올 날을 기대하면서...

수성구 상동 171번지(청수로4길 64) 정화빌라 입구 앞, 상동 청동기 마을
수성구 상동 507번지(상동 507) 수성못 유원지 남쪽, 상동 고인돌 유적
수성구 신매동 601번지(신매로 21) 보성아파트 108동 앞, 시지 고인돌 유적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385-5번지(가창로 774) 가창제일교회 뒤, 냉천 고인돌 유적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517-1번지(비슬로522길 41) 일대, 천내리 고인돌 유적
북구 칠성동2가 302-239번지(칠성남로30길 20) 지하철 대구역 1번 출구, 칠성바위
달서구 진천동 470-27번지(진천로3길 85), 진천동 사적지

 
 고인돌 아래 청동기 시대 무덤 유적을 덮어놓은 유리 강판 위로 현대의 고층아파트가 비쳐 있는 기이한 풍경을 볼 수 있는 수성구 상동 정화우방팔레스 뒤편 '청동기 마을'은 학생들이 많이 답사하러 오는 곳이다.
 고인돌 아래 청동기 시대 무덤 유적을 덮어놓은 유리 강판 위로 현대의 고층아파트가 비쳐 있는 기이한 풍경을 볼 수 있는 수성구 상동 정화우방팔레스 뒤편 "청동기 마을"은 학생들이 많이 답사하러 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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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