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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강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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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4일 강풍에 불씨가 도깨비불처럼 튀어다녔다. 결국 남양 2리 산등성이는 새까맣게 탔다. 그리고 부모님은 밭을 잃었다. 올해 3월 심었던 1100그루의 엄나무 묘목과 30년을 가꿔온 밤나무 50그루가 자라던 땅이었다.

눈앞에서 잃은 돈만 300만 원이었다. 밤으로 얻을 1년 소득 100만 원과 엄나무 묘목값 200만 원. 앞으로 잃게 될 돈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약 천 그루의 어린 엄나무는 퇴직 앞둔 부모님의 연금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고민거리가 또 있었다. 1381평에 걸쳐 뿌리를 박고 선 숯덩이 나무들이다. 부모님은 나무를 베어 버릴 계획을 짰다. 두 분의 평균 연령은 60세, 가진 장비는 전기톱 한 자루와 포터 한 대. 장년의 근력과 부족한 장비로 벌목하기에는 1년도 부족해 보였다. 게다가 애써 일해도 결국 죽은 나무를 치우는 일이었다. 10원 벌이도 없을 일에 들여야 할 공을 생각하니 앞이 까마득했다. 

'다 잘 될 거예요'라고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근거 없이 희망만 이야기하는 건 계몽적인 태도라 삼갔다. 누구 탓도 할 수 없는 재해 앞에 두 분은 불행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지난 4월 강릉 산불로 새로 심은 천 그루의 어린 엄나무와 30년 된 밤나무 50그루가 불에 탔다. 곧은 가지 위로 개두릅(엄나무 순)을 틔우던 엄나무도 죽었다. ⓒ 최다혜
  
고마운 분들의 등장

산불에 탄 밤나무들이 익숙해질 즈음인 5월 1일, 아빠가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진짜 고마운 분들이 나타났어. 이 분들 이야기를 기사로 좀 써줄 수 있겠니. 사람들이 수십 명 와서 불탄 나무를 오전 8시 30분부터 지금(오전 11시)까지 치워주고 있어."

연락을 받은 시간 11시. '어서 와 취재하라'는 아빠의 성화를 피하고 싶었다. 3살, 5살 어린 두 아이 점심을 준비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친구와 선약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운전면허 잉크가 막 말라가는 6개월 차 초보 운전자. 허기진 두 녀석을 태우고 어설픈 운전 실력으로 태백산맥 기슭까지 들어오라니! 

그런데도 자원봉사자 이야기라면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박한 세상에 타인을 도우러 온 낯선 이들이라니. 막연했던 '희망' '해피엔딩'이란 단어를 꺼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생겨났다.

결국 글로 남기기로 했다. 선약으로 만난 친구와는 의자에 온기가 스미기도 전에 헤어졌다. 어린 딸들 입에는 닭국밥을 대충 말아 넣었다. 구부정한 강릉시 옥계면 남양 2리까지 좁은 산길을 따라 진땀을 빼며 자동차로 엉금엉금 기어 도착했다. 

그곳에는 다름아닌 공무원들이 있었다.
 
2019년 4월 30일에서 5월 2일, 3일에 걸쳐 전국 농업기계 안전전문관과 강원도농업기술원에서 63명이 파견되어, 1.48ha에 달하는 강릉 산불 피해지역 벌목을 지원했다. ⓒ 최다혜
 
1년 예상한 벌목, 한나절 만에 끝내다

나는 왜 공무원들이라 상상을 못 했던 걸까. 부모님 밭을 정리해주던 분들은 책상 밖으로 뛰쳐나온 '농촌진흥청 공무원'들이었다.

농촌진흥청 공무원들은 '전국 농촌진흥기관의 장비와 농업기계 안전전문관을 활용해 농작업 대행 등 산불 피해지역에 대한 범국민적 복구 및 영농지원'을 목적으로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 등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고 했다. 총 188명. 트랙터, 관리기, 이앙기, 굴착기, 로터베이터, 배토기, 운반차량 등 137대의 농업기계를 들고 강원도로 온 이들은 강릉, 동해, 속초, 고성, 인제 등 산불 피해지역을 복구 대상으로 정하고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작업을 진행했다.

전기톱 한 자루와 포터 한 대를 갖고 있던 평균연령 60세 부모님 앞에 이들은 영웅이었다.
 
안동시 농업기술센터 팀장 이청희 씨. ⓒ 최다혜

"이 땅(산불 피해 지역)의 터가 좋네요. 풍수지리학상 돈이 빠져나갈 곳이 없어요. 자손 대대로 번성할 거예요."

안동시 농업기술센터 팀장 이청희씨는 풍수지리학까지 거들어가며 덕담을 했다. 덕담뿐이랴. '농업기계 안전전문관'이라 새겨진 형광 노랑 조끼를 입은 공무원들은 나무를 베고 벌목한 밤나무를 운반기로 날라 한곳에 모았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한 작업이 오후 3시 30분경 종료됐다.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천 평의 벌목 작업이 공무원들의 도움으로 한 나절 만에 끝이 났다.

이들이 도와준 곳은 부모님의 밭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본 공무원들은 1팀뿐이었다. 같은 시간 2팀은 산불로 농기계가 망가진 주민들을 위해 벼이앙을 하고 있었다. 3팀은 속초에서 벼이앙을, 4팀은 고성에서 논·밭 로터리 작업을, 5팀은 인제에서 순회점검에 나섰다.
 
미래농업교육원 원장 박순홍 씨 ⓒ 최다혜
 
제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나라

문재인 대통령은 4월 6일 강원도 산불 피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이에 농촌진흥청도 '특별 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강원도에 복구 지원을 계획했다.

특별 재난지역으로 선포된 지역은 응급 대책, 재해 구호와 복구에 필요한 행정·재정·금융·세제 등의 특별 지원을 받는데, 특별 재난지역 선포의 근거는 헌법에 있다. 헌법 제34조 6항에 따르면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는 국가로부터, 국가 기관에 일하는 이들로부터 보호 받고 있었다. 
뜻밖의 재해는 구체적 개인의 힘으로 돌리기 힘들다. 그러므로 국가는 재난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발생한 결과를 신속하게 복구하는 능력과 노력 역시 안전하고 안정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 <지금, 다시 헌법> 중. 차병직, 윤재왕, 윤지영 지음.
1988년생인 나는 문제가 생기면 '내 탓이라 생각하라'고 배웠다. 주어진 여건에 분노하기보다 개인의 노력이 우선해야 한다는 뜻에서다. 이번 산불도 마찬가지였다. 산불은 이미 벌어진 일이고 수습은 우리 가족만의 몫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가 '고마운 분들이 왔다'고 연락했을 때 자원봉사자들을 떠올렸다. 제도의 도움보다 개인의 품앗이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간 그렇게 위기를 극복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번 산불 피해를 수습하면서 공무원의 도움을 받았다. 부모님은 사회 안전망 속에 있었다. 물론 자원봉사자 분들과 멀리서 찾아와 준 관광객분들의 공은 더더욱 값지다. 이해 관계없이 손품, 발품 팔기가 어디 쉬운가. 그런데도 농촌진흥청의 '강원도 산불 피해지역 영농지원 계획'에 감탄했던 이유가 있다. 사회 시스템에 의한 안정감을 오롯이 느꼈기 때문이다.
 
2019년 4월 30일에서 5월 2일, 3일에 걸쳐 전국 농업기계 안전전문관과 강원도농업기술원에서 63명이 파견되어, 1.48ha에 달하는 강릉 산불 피해지역 벌목을 지원했다. ⓒ 최다혜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 헌법 전문 중에서

다시 헌법을 들여다봤다. 어렵고 두꺼운 데다가 딱히 '내 것'이라는 주인의식도 없었기 때문에 멀리해왔다. '우리와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라는 71년 전 쓰인 헌법 전문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귀한 우리 손주들 괴롭히면 혼날 줄 알아!'하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으름장을 놓은 기분도 났다.
 
한 달이 흘러도 여전히 시커먼 땅에 각시 붓꽃이 피었다. 산불이 나도 봄이 온다는 사실을, 각시 붓꽃과 형광 노랑 조끼를 입은 공무원들 덕분에 체감한다. ⓒ 최다혜
 
 
쉽게 불에 타버린 소나무와 달리 활엽수들은 타버린 밑둥을 치유하며 잎을 틔웠다. ⓒ 최다혜
 
강릉 남양 2리의 봄은 더디게 오고 있다. 다른 동네는 노란 민들레로 아파트 화단이 다 덮였는데 여기는 검은 땅에 몇몇 야생식물만 비죽이 싹을 틔웠다. 그래도 봄이 오긴 왔다. 생명력 강한 종들이 기어이 꽃을 피웠다. 꽃뿐이랴. 1년 치 벌목에 대한 갑갑증을 해소한 부모님의 마음에도 봄바람이 들었다. 

아빠는 외손녀의 손을 잡고 밑동만 남은 밤나무밭을 한 바퀴 걸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빠 속이야 알 수 없다. 그래도 삼가왔던 희망적인 말을 건네기엔 충분해진 듯하다. 

"아빠, 이제 다 잘 될 거예요."
 
1년을 가늠했던 불 탄 밤나무 밭 정리는 한나절 안에 끝났다. ⓒ 최다혜
태그:#강릉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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