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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든, 풍경이든, 사소한 물건 하나라도 내게 발견되어져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시인 김춘수가 <꽃>에서 이미 말했듯,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법이다.
 
책방 어디로든 바다가 보이는 부산 영도의 바다책방  <손목서가>
 책방 어디로든 바다가 보이는 부산 영도의 바다책방 <손목서가>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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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발견되는 순간, '발견'은 '인연'이 된다. 책도 예외가 아니다. 서점에 꽂힌 그 많은 책들 가운데 유독 나의 눈을 자석처럼 끌어당겨, 내게 발견되는 책이 있다. 부산에서 요즘 가장 핫하다는 영도에 있는 한 작은 책방, 시선 두는 곳 어디나 바다가 쏟아져 들어오는 작은 책방 한 켠 서가에서 유독 이 책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너없이 걸었다 표지
 너없이 걸었다 표지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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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책의 표지, 양 옆으로 중세 유럽풍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흑백톤의 좁은 거리는 고풍스러워 한 번쯤은 걸어보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걸은 도시가 여긴가 하고 저자를 보니 허수경, 20대 후반 한국에서 2권의 시집을 내고 시작 활동을 하다가 불현듯 고고학을 공부하고 싶어 독일로 떠났다는 시인, 독일 남자와 결혼해 독일에 정착해 살면서도 우리말로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인. 시인은 갑자기 병을 얻어 작년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전해 많은 국내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책장을 넘겨보니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간 시인의 외로움이 절절히 다가왔다.
 
낯섬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
걷다가 걷다가 마침내 익숙해 질 때까지 살아내는 밖에는
아무 도리가 없었다.
- <너없이 걸었다 > 중

90년대 초반, 아직 한국인들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기도 전, 머나먼 이국땅에 홀로 발을 디딘 이십대 후반의 시인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낯섬을 견뎌내기 위해 시집을 끼고 도시를 천 번도 넘게 걸었다는 시인, 그렇게 20여 년이 흐른 후,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이제는 제법 낯이 익은, 그러나 여전히 고향은 될 수 없는 도시를 독일 시집을 옆에 끼고 다시 걸었다고 한다.
 
내가 사는 곳이 뭐, 그리 대수로운 곳일까마는 가로등에 의지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이 도시에 대한 작은 기록을 적습니다 .
 - <너없이 걸었다 >중 뮌스터, 당신이 모르는 어느 도시

가로등에 의지해서 시인이 돌아가고 싶은 집은 독일 뮌스터였을까? 어린 시절 고향 진주였을까?

시인은 독일 뮌스턴 곳곳을 발로 누비며 자주 시인의 고향 진주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다. 뮌스턴의 기차역 앞에서 어린 시절 진주 시골역에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역 앞을 서성이던 추억을 떠올리고, 도시를 둘러싸고 흐르는 뮌스터아 강을 따라 걸으며 고향 진주 옆을 흐르던 남강과 강 옆에서 놀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뮌스터에 유일하게 있는 칠기박물관을 자주 방문한 이유도 고향 풍경의 한 조각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곰방대를 몰고 소를 모는 노인, 버드나무 밑에서 물을 긷는 처녀의 그림,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들이 전복 껍질로 칠기에 수놓아져 있는 곳, 그것에서 시인은 고향의 한 조각을 느낄수 있어 좋았다고 말한다.
 
내 고향의 풍경인데도 독일의 한 도시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 전시된 그 풍경은 기묘한 향수와 이국적인 경이감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나 나는 이 박물관이 좋았다.
단 한 조각의 고향이 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
 - <너없이 걸었다> 중 칠기박물관 앞에서

낯선 도시를 여행하기 위한 책들이 넘쳐나는 지금, 이 책은 여행에 필요한 교통정보, 맛집 정보들이 나열된 가벼운 여행서적은 아니다. 8세기 칼 대제가 파견한 선교사가 이 곳으로 와 수도원을 지으면서 시작됐다는 오래된 도시, 중세에서 근대로, 다시 현대로 이어진 시간동안 뮌스터를 살다간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진중한 책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뮌스터가 한층 가까이 느껴져서 시인의 말처럼 언젠가 시간이 나면 독일의 이름난 관광도시들을 섭렵하고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그냥 이 도시에 가서 오래도록 이 도시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한번 들르세요, 일부러 오기까지는 못하겠지만
이 근방을 지나가신다면 마치 기약 없는 나그네처럼,
훌훌 털어버린 가벼운 어깨를 하고,

그냥 한번,

이렇게 바쁜 세상에,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정말 만의 만의 하나라도 시간이 난다면

- <너없이 걸었다> 중 뮌스터, 당신이 모르는 어느 도시

인구 30만에 학생이 5만명이라 '학생도시'라 불린다는 도시,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도시의 중심가를 둘러싸고 있다는 '푸른 반지', 18세기 칠년전쟁이 끝난 뒤 도시의 방어벽을 헐고 그 길을 따라 나무를 심어 가로수길을 만들었다. 덕분에 도시의 중심가를 둘러싼 4.3km에 나무들이 울창한 가로수길이 만들어졌다.

푸른 나무 그늘이 드리운 '푸른 반지' 길이 4.3km에 걸쳐 있는 도시라니, 왠지 이런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갈 것만 같다. 이 책은 표지를 벗겨서 접어진 면을 펼치면 뮌스터의 지도가 마법처럼 나타나는데, 이 지도를 보면 도시를 둘러싼 '푸른 반지'가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책 표지를 펼치면 나오는 뮌스터 지도, 둥근 원이 '푸른 반지'길이다
 책 표지를 펼치면 나오는 뮌스터 지도, 둥근 원이 "푸른 반지"길이다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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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상점들이 치명적인 소비의 유혹으로 가득하다면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가로수길은 소비를 잊으라고 권하는
푸른 등불이다. 도심에서는 어느 곳이든 이 길로 들어설 수가 있다.
- <너없이 걸었다> 중 뮌스터의 푸른 반지
  
너없이 걸었다중 푸른 반지의 길
 너없이 걸었다중 푸른 반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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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반지를 따라 계속 걷다보면 만나게 된다는 '츠빙어'는 이 도시의 가장 가슴 아픈 역사다. 지름 24미터에 달한다는 지붕 없는 둥근 벽돌건물, 16세기부터 존재했었다는 이 건물은 한때 도시방어를 위한 망루였다가 또 어느 시기에는 화약창고였다가 나치가 이 도시를 장악했을 때는 사형 집행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나치 정권이 들어서기 전 뮌스터에는 유대인교당이 있었고 700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독일 곳곳에는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들의 이름과 나이, 끌려간 장소를 적은 걸림돌이 길가 곳곳에 박혀 있다. 뮌스터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잊음 가운데 가장 공포스러운 잊음은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폭력은 바로 그 순간에 나온다.
- <너없이 걸었다> 중 뮌스티아 강을 따라서 걷기
 
스스로 시중독자라고 말하는 시인은 독일에 산 지 10년 만에, 독일시를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이방 도시의 속살을 드문드문 알아차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시를 걸으며 독일시를 읽었다는 시인은 이 책에서 새로운 챕터를 시작할 때마다 독일 시 한 편씩을 싣고 있다.

'하인리 하이네', '라이너 마리아 릴케'처럼 유명한 시인의 시에서부터 열여덟 나이에 나치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젤마 마르바움 아이징어'까지, 유독 굴곡 많은 생을 산 시인들의 삶과 그들의 시가 함께 수록돼 있어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너없이 걸었다중
 너없이 걸었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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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의 나라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시인'이 보는 '도시'는 현재보다는 지나간 시간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때 도시를 가득 채웠으나 지금은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궁금했다는 시인.

책을 읽다 보면 낯선 이방의 도시와 그들의 역사와 시인의 삶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쓸쓸한 생의 무늬가 따스한 위로를 건넨다. 시인의 글답게 구절 하나하나 되새겨 볼 문장이 많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책 제목은 <너 없이 걸었다>지만 수많은 그리운 이름들을 부르며 거리를 걸었다고 고백하는 시인, 불현듯 생의 쓸쓸함이 밀물처럼 몰려오는 어느 날, 이 책을 펼쳐보길 권한다.
 
이 곳에서 누구도 고향을 보는 사람은 없다.
고향은 멀리 있고 삶은 삶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중이다.
- <너없이 걸었다> 중 기차역에서
 
필요한 물건을 찾아 벼룩시장을 찾아 헤매는 가난한 한국의 시인과 삼엄한 한 시대의 수레바퀴에 짓밟혀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독일 시인들의 삶, 인간들의 짧은 생을 뛰어넘어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도시의 여러 풍경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책, 그 곳이 어디든 삶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안타까운 것은 이제 더 이상 시인과 함께 하는 산책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 시인과 함께 한 처음이자 마지막 산책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태그:#허수경, #너없이 걸었다, #난다출판사, #뮌스터, #푸른 반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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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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