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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가 탄 버스는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Split)를 향해 계속 달리고 있었다. 더없이 푸른 아드리아해와 함께 도로 오른쪽으로는 험준한 검은 산맥이 계속 우리를 따라 달렸다.
 
무화과, 오렌지, 석류 등 다양한 과일을 살 수 있다.
▲ 노점의 과일가게. 무화과, 오렌지, 석류 등 다양한 과일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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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들이 자리잡은 도로변에는 여행객들을 상대로 과일을 파는 노점들이 들어서 있다. 차에서 내려서 보니 이들이 주로 파는 것은 말린 무화과와 오렌지, 석류였다. 모두 크로아티아를 대표하는 과일들이다. 특히 무화과 가격은 이 가격이 맞나 하고 다시 되물어볼 정도로 값이 싸다. 무화과 한 개를 먹어보았더니 과육과 과육 안의 씨들이 너무나 풍부하고 풍미도 만족스러웠다.

검은 산맥과 바다 사이에 생긴 평지에는 어느 곳이나 풍족한 도시들이 들어서 있었다. 버스가 잠시 멈췄다가 떠난 플로체(Ploce)와 마카르스카(Makarska)는 규모는 작지만 여행자들이 방문하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였다. 차창 밖으로는 많은 여행자들이 노천카페에 앉아 아드리아해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그냥 걸어가는 게 싸요" 놀라운 택시
 
아드리아해 연안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휴양도시이다.
▲ 마카르스카. 아드리아해 연안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휴양도시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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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든 아드리아해의 석양이 우리 버스를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석양을 보면서, 스플리트 버스터미널에 내리면 숙소까지 이동할 차량 공유 서비스를 검색해 보았다. 스플리트의 숙소까지는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장거리 버스이용으로 지친 아내가 택시나 차량 공유 서비스를 이용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차량 공유 서비스에 여러 차례 연결해보려고 시도했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서비스가 연결되지 않는다. 다시 지도에서 검색해 보니, 스플리트 구시가 한복판에 있는 우리 숙소까지는 묘하게도 차를 이용하는 것이 걸어가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우리는 완전히 어둠이 내린 스플리트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터미널은 아드리아해를 오가는 거대한 페리 선착장 앞에 있었다. 다행히 버스터미널 앞에는 손님들을 기다리는 택시 기사들 몇 명이 서 있었다. 나는 택시를 타기 전에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숙소가 공화국 광장 앞에 있는데요. 공화국 광장으로 갑시다."
"택시를 타고 거기까지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택시를 타면 차가 진입할 수 없는 구시가 외곽을 한참 돌아가기 때문에 20분이 걸립니다. 하지만 걸어가면 10분~15분이면 갑니다. 걸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외국여행 중에 만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동안의 여행에서 외국여행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수많은 택시기사들을 만났는데, 이 택시 기사는 걸어가는게 낫다며 지도를 보면서 걸어가는 길까지 알려준다. 나는 마음 따뜻한 이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끌고 지친 몸을 이끌며 걸었다. 아름답다는 스플리트의 바닷가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 걷지 않아 구시가의 가장 큰 번화가인 리바 대로(Riva St.)를 만나게 되면서 눈이 번쩍 뜨였다.
 
밤 늦은 시간에도 수많은 여행자들의 흥겨움이 이어진다.
▲ 리바대로. 밤 늦은 시간에도 수많은 여행자들의 흥겨움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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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Diocletian's Palace)의 성벽 아래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식당들의 밝은 불빛이 시원스러운 리바 대로를 가득 비추고 있었다. 평일 밤인데도 수많은 여행객들이 바닷가 식당에 모여 휴양지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고, 식당 밖으로는 왁자지껄한 흥겨움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찾아가는 숙소는 리바 대로의 끝에 자리한 공화국 광장(Trg Republike)에 있었다. 놀랍게도 스플리트의 문화유산인 구 관청 건물 안에 우리 숙소가 있었다. 'ㄷ'자 형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관청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답게 육중한 모습이 시선을 압도했다. 게다가 저녁임에도 밝게 빛나는 핑크빛 건물색상이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이 광장을 둘러싼 건축물은 스플리트의 문화유산으로 유명하다.
▲ 공화국 광장. 이 광장을 둘러싼 건축물은 스플리트의 문화유산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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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워낙 크고 옆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어디서부터 숙소 위치를 찾아야할지 살짝 난감했다. 다행히 건물 1층에는 밤 늦은 시간에도 문을 연 식당 안에 손님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식당의 한 청년에게 우리 숙소위치를 물어보았고, 이 청년은 숙소로 올라가는 입구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묵을 숙소는 우리나라로 치면 4층인 3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역사 오랜 문화유산 건물이어서 4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나는 무거운 여행가방 2개를 손으로 들고 낑낑대며 올라가야 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로마유적 중 가장 뛰어난 보존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찾아갔다. 아침에 나와 보니, 어제 밤에 걸어오며 봤던 리바 대로(Riva St.)는 과거 로마 궁전의 남쪽 성벽 앞을 지나는 대로였다.

황제가 권좌와 맞바꾼 도시
 
아침의 아드리아해를 배경으로 배낭족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 스플리트 앞바다. 아침의 아드리아해를 배경으로 배낭족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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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앞, 아드리아해 연안의 휴양도시로 유명한 스플리트의 바닷가에는 도시의 명성만큼이나 거대한 페리와 크루즈 선박들이 정박해 있다. 거대한 크루즈 선박 앞으로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다음 행선지로 떠나는 젊은 배낭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더해지고 있었다.

스플리트는 황제의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가 퇴위한 후에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래 로마의 속주였던 아드리아해 연안, 달마티아(Dalmatia)의 군인이었다. 후에 황제가 된 그는 후기 로마에서 가장 효율적인 통치를 펼쳤던, 능력을 인정받던 황제였다.

284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은퇴 후 남은 여생을 보내기 위해 295년부터 10년에 걸쳐 거대한 궁전을 건설하였다. 이 궁전은 자신이 태어난 도시 솔린(Solin)에서 약 8㎞ 떨어진 스플리트에 지어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59세 때 심각한 질병을 앓았는데, 질병에서 회복된 이후 자신이 지어 두었던 바다 근처의 이 궁전에서 말년을 보냈다.

놀랍게도 리바 대로 뒤편으로는 그 때 당시에 지은 성벽들이 아직까지도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서 있었다. 당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두 번째 임기 제안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할 정도로 이 궁전과 스플리트를 사랑하였다.

"나에게 이곳의 평화와 행복을 다른 것과 바꾸라고 감히 권하지는 못할 것이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70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이 궁전에 거주하면서 양배추를 기르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스플리트 시 한복판에 있는 이 궁전은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 아드리아해 남쪽 해안에 지어진 가장 귀중한 로마건축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내 눈 앞에는 아침부터 기대 이상의 유적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성벽을 올려다 보았다. 성벽은 가장 높은 곳의 높이가 무려 25m나 되었다. 성벽의 북쪽, 동쪽, 서쪽의 3면은 육지에 접하고, 내가 보고 있는 남쪽은 아드리아 바다를 바로 앞에 보고 있었다. 궁전 앞에 푸른 바다를 바로 접하고 있으니 일대 장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경관이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축양식들이 뒤섞여 있다.
▲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성벽.  각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축양식들이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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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살던 궁전의 성벽은 요새처럼 튼튼하게 지어져 있다. 당시 성벽 안, 3만 m2의 넓은 부지 위에 세워진 궁전은 6세기까지도 계속 사용이 되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성벽의 곳곳이 허물어졌지만 인류에게 더 없이 아름답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앙아시아의 몽골계 유목민인 아바르(Avari) 족이 비잔틴 제국 내 발칸반도를 침입해 왔을 때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전은 그 공격을 잘 버텨냈다. 614년경 아바르족의 습격으로 인근 솔린(Solin)이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솔린의 거주민들은 이 궁전의 안전한 성벽 안으로 피난해 와서 정착했다. 이때 이들이 스팔라토(Spalato)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이 도시가 현대의 스플리트가 된 것이다.

그후 스플리트를 지배했던 수많은 지배자들은 여러 대에 걸쳐서 궁전 내부를 개조하고 다시 지었다. 그러다가 스플리트의 인구가 계속 증가하게 되자 성벽 밖에도 건물을 짓게 되었다. 현재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성벽의 남쪽 파사드에 아케이드 모양을 이룬 건축물들은 수세기에 걸쳐 스플리트에 정착한 선조들의 유산인 것이다.

"로마 시대의 기둥들이 마치 궁전 성벽에 달라붙은 것처럼 박혀 있어. 정말, 로마시대의 기둥 사이에 후세에 만든 창과 벽들이 빼곡하네. 로마시대의 성벽과 기둥이 관청과 호텔, 레스토랑의 벽면이 되어 있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야."

"로마의 성벽을 유지한 채로 성벽을 파고들어가 지어진 건축물들의 양식만 해도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으로, 마치 스플리트 역사의 흐름을 보는 것 같아. 이렇게 한 건축물 안에 여러 시대가 뒤섞여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로마 시대의 유적이 파괴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고대와 중세, 근대의 역사가 쌓인 모습이 너무나 운치가 있고 멋스러워."
 
스플리트는 황제의 도시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 스플리트 구시가 입구. 스플리트는 황제의 도시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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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들은 리바 대로의 호텔과 레스토랑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었다가 이내 사라지곤 한다. 자세히 보니 궁전의 성벽을 쌓은 석재는 베이지색에 가까운 하얀 석회암이었다. 스플리트 바로 앞에 있는 섬들에서 채취한 스플리트산 석회암들이다. 오랜 역사의 때가 스며든 석회암 벽면은 궁전의 오랜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성벽 아래까지 가서 바닥의 석재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모두 대리석인데 아직도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 대리석들은 대리석의 중심 산지인 이탈리아에서 직접 수입한 대리석이었다. 궁전 바닥에 사용된 재료만 보아도 당시 로마제국에서 이 궁전의 건축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나는 궁전의 동쪽편으로 돌아가 성의 동문을 찾아보았다. 로마시대에 지어진 4개의 성문은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은(銀)으로 만들어진 문이라는 뜻의 포르타 아르겐테아(Porta Argentea)가 아직도 육중하게 서 있었다. 그동안 훼손이 심하여 1932년~1934년에 보수가 진행되었고, 지금은 스플리트 구시가의 출입문 구실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시민들이 이 고대 성문을 이용하고 있다.
▲ 포르타 아르겐테아. 아직도 많은 시민들이 이 고대 성문을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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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포르타 아르겐테아 아래로 시민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1700년 전에 지어진 성문을 아직도 도시의 문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왔다. 그 안으로는 가슴 설레는 로마의 유적이 이어지고 있었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발걸음으로 반들반들해진 로마의 대리석 바닥이 우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태그:#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여행, #스플리트, #스플리트여행,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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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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