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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추 헤아려보니 10년도 넘었다. 동문회에 발을 끊은 지가 그만큼 됐으니, 학교를 찾은 건 더 오래됐을 거다. 출장 목적이든 개인적인 일로든 숱하게 서울을 오르락내리락했지만, 학교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동안 해본 적이 없다.

동문회에서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회보도 언제부턴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동문회비를 내지 않은 탓일 게다. 학교 안팎의 소식이 궁금하지도 않았고, 취임과 영전, 승진 일색인 동문들의 근황은 이질감마저 느껴져 곧장 폐지함에 던져지기 일쑤였다.

사는 게 바빠서라기보다 동문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교를 멀리하게 된 것 같다. 졸업 후 이력서 최종학력란에 대학 이름을 적어 넣을 때 빼고는 딱히 학교를 떠올릴 기회가 없기도 했다. 학연을 승진의 수단으로 삼을 게 아니라면, 장삼이사들에게 대학과의 인연은 대개 취업과 동시에 끝난다.

교문 앞에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대학 캠퍼스는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교문과 학생회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본관 등 몇몇 건물만 제외하면 온통 생소한 것투성이다. 건물과 길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변에 심어진 나무들까지도 낯설다.

교문과 본관 사이 당시 태평양처럼 느껴졌던 대운동장은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처럼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넓은 잔디밭은 '출입금지' 팻말이 없어도 들어가기 조심스러울 만큼 깨끗했다. 축구 하던 운동장이 산책하는 공원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공원이 된 운동장 아래에는 차량 수백 대, 아니 천 대는 족히 동시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섰다. 여러 겹으로 된 지하 주차장에서 승강기를 타면 곧장 캠퍼스로 이어지는 구조다. 운동장보다 주차장이 더 필요하다고 여긴 셈인데, 친구들과 함께 걷던 길은 죄다 차도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보다 차가 먼저였던 걸까. 인도는 차도에 밀려나 먼 길을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곳곳에 세워진 안내판도 흡사 도로표지판처럼 차량 운전자들을 위한 배려인 양 큼지막했다. 하긴 얼마 전 대학 동기로부터 요즘엔 자가용을 운전해 등하교하는 후배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옛날엔 우리처럼 가난한 시골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교로 손꼽혔지만, 지금은 서울 강남 출신에다 특목고나 자사고 졸업생이 태반이라는 거다. 그의 말마따나 명문대일수록 부유층 아이들이 많다는 건 새삼스럽지도 않다. 운동장을 헐어내고 주차장을 만든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대학인지 대기업 입주한 클러스터인지 헛갈려

캠퍼스 경관 중에 가장 크게 변한 건 새로운 건물이 많이 지어졌다는 것과, 지금도 더 짓기 위해 공사 중이라는 것이다. 햇빛이 땅을 비출 틈조차 없을 만큼 캠퍼스는 콘크리트 빌딩으로 빼곡했다. 조금 과장한다면, 건물과 건물 사이에 미로처럼 길이 난 형국이다.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릴 테지만, 햇볕 좋은 벤치나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업을 빼먹었을 만큼 캠퍼스는 여유로웠다. 아무리 지루하고 딱딱한 강의라고 해도 건물 밖으로만 나오면 숨통이 탁 트였다. 그 어떤 건물도 시야를 가리지 않았고, 군데군데 콘크리트의 잿빛은 초록이 덮고도 남았다.

건물마다 굴지의 대기업 이름이 주인처럼 내걸렸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기업이 '사회공헌사업'의 일환으로 대학에 기부한 건물이고, 학교는 그 '숭고한' 뜻을 기려 이름을 내어준 것이다.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이곳이 대학인지 대기업들이 입주한 클러스터인지 헛갈릴 터다.

옛 강의실 건물은 철문으로 굳게 잠겨있다. 문에는 주말과 방학 기간에는 폐쇄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그래선지 그 넓은 캠퍼스에 공사장 인부와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관광객들 말고는 오가는 대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지금 대학생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옛날에는 방학이나 주말에 더 바빴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말을 이용해 삼삼오오 불러 모아 운동을 하거나 세미나를 열었고, 과모임과 동아리활동, 농촌봉사활동 등이 이어져 방학을 두고 '제3학기'라는 말까지 회자됐다. 그러다보니 집이 먼 경우에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선배와 동기의 신세를 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동아리방이나 과방을 전전하는 경우도 많았다.

수시로 대자보가 나붙던 건물의 외벽엔 그 흔한 테이프 자국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건물의 입구마다 설치된 게시판에는 대자보 대신 각종 자격증과 영어 학원 홍보물이 붙어있다. 그나마 반쯤 찢겨진 데다 한두 장뿐이어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SNS가 보편화되면서 대자보는커녕 게시판조차도 사라질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구내식당 표지판이 보였다. 점심때라 그렇잖아도 시장기가 돌던 차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치 오래 전 폐업한 곳처럼 냉기가 돌았다. 문은 굳게 닫혀있고, 식탁과 의자가 식당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문을 연 곳은 단 두 곳뿐이었다. 프랜차이즈 카페와 편의점. 인적이 끊긴 캠퍼스는 한 겨울이었지만, 울긋불긋 환한 조명을 내뿜고 있는 그 두 곳만은 봄이었다. 여전히 머릿속에선 매칭이 안 되는 낯선 풍경이지만, 대학 건물에 버젓이 대기업의 간판을 올리는 마당이니 어색하다는 생각 자체가 괜한 몽니일지도 모르겠다.

학술 동아리나 봉사 동아리 등은 대부분 사라진 듯

간단히 요기를 하고 학생회관을 찾았다. 꼭 한 번 와보고 싶었고, 부러 지금 대학을 찾아온 이유라면 이유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내내 거주하다시피 한 학생회관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삶의 좌표를 심어준 소중한 공간이다.

20여 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신축과 증축이라는 세파 속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스 신전의 그것처럼 건물을 감싼 채 곧추 선 기둥과 그 위에 얹힌 관제탑 같은 꼭대기 층의 모습이 마치 고향집처럼 친숙했다. 입구 계단에 올라서자 이곳을 무대로 매일이다시피 집회를 열던 당시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외양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부 구조는 많이 변해 있었다. 한달음에 동아리방을 찾아갔지만, 문이 잠겨있는 데다 이름조차 바뀌어 확신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어떤 동아리방이든 항상 문이 열려있었는데, 지금은 암호를 알아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잠금장치가 모두 설치되어 있었다. 한 시스템 경비업체의 로고가 찍힌 CCTV도 드문드문 보였다.

1층 로비에 있는 동아리방 배치도를 살펴보았다. 그제야 대학 시절 청춘을 함께한 동아리가 사라졌음을 알았다. 수십 년 동안 동아리가 유지된다는 게 분명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못내 서운하고 아쉽다. '살아남은' 동아리들과 비교가 되어 더욱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노래와 풍물패 등 이름만 대면 다들 알 만한 내로라하는 동아리는 꿋꿋이 살아남았지만, 철학 등 학술 동아리나 야학과 빈민 연대 활동 등을 하던 봉사 동아리 등은 대부분 사라진 듯하다. 비슷한 활동을 하던 동아리가 여럿이었을 만큼 당시만 해도 학생회관을 주름잡던 '주류'였다.

영문 이니셜로 된 이름만 보면 대개 무엇을 목적으로 모인 곳인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영어와 개신교 관련 동아리가 여럿 눈에 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셈이다. 그때도 개신교 동아리는 여럿이었지만,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영어 동아리와 함께 학생회관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교문 나서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학생회관 앞은 민주광장으로 명명되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지는 알 수 없다. 바로 옆에 거대한 신축 건물이 올라가고 있어 잔뜩 움츠린 모습이다. 이곳에서 당시처럼 대규모 집회를 연다면 옴짝달싹 못하고 갇힌 형국이 될 것이다. 현재 대학 생활의 중심이었던 이곳의 주인은 광장이 아니고 빌딩이다.

공기마저 갇혀버린 광장 한쪽에 허름한 텐트 하나가 보인다. 그 뒤로 시간강사의 대량해고를 저지하자는 현수막이 내걸려있다. 그곳에 시선이 머무는 건 인적이 뜸한 광장에 현수막 펄럭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기 때문이다. 평일 같으면 인근 공사장의 소음에 묻히게 될 것이다.

텐트 주변은 마치 무인도처럼 썰렁하지만, 불과 30여 미터쯤 떨어진 편의점엔 젊은이들이 제법 들락거렸다. 그저 부담스럽다는 뜻일 테지만, 부러 텐트 근처를 가로질러 가지 않고 멀리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괜히 서운하게 느껴진다. 그날 광장의 분위기는 유독 겨울의 매서운 추위 마냥 매정했다.

20년도 더 지난 지금 그때와 지금의 대학 분위기가 같을 리 없지만, 동문회보에서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발전'이라는 말에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았다. 대학이라기보다는 기업 같고, 공간마다 속물적이고 파편화된 느낌에 낯설고 불편했다. 현직 교사로서, 그런 이곳에 한 명이라도 더 진학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쥐어짜고 있는 일상의 모습이 순간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다.

교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앞으로 학교를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것 같다. 당장 이곳에 진학하겠다고, 후배가 되겠다고 원서를 들이미는 아이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나 싶어 그게 가장 고민이다. 차마 지성의 전당이라는 말은 못하겠어서다.

태그:#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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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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