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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과 지성은 기존 체제에 저항할 권리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그에 대응하여 사회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결국 지금의 절망을 계속 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교수(74)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현재의 모순에 눈감지 말고 사회변혁운동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절망에 빠지다보니 현실정치에 무관심해지고, 취업을 비롯한 자기 발등의 불끄기에 바쁠 수도 있다"면서 "그래도 사회를 바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지금 세대는 물론, 다음 세대도 마찬가지로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젊은이들이 기존 체제에 대응하여 사회구조 개선해야"

송두율 교슈는 "젊음과 지성은 기존 체제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면서 "적극적으로 그에 대응하여 사회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결국 지금의 절망을 계속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젊은과 지성은..." 송두율 교슈는 "젊음과 지성은 기존 체제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면서 "적극적으로 그에 대응하여 사회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결국 지금의 절망을 계속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신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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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안 보이는 청년들이 유학이나 워킹홀리데이란 이름으로, 외국에서 생활해 보고 이민 정보도 얻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혼자만 탈출하면 되겠습니까? '헬조선'에서 벗어나는 일은 개인의 탈출일 뿐이지요. 전부 다 해외로 나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송두율 교수는 "젊은이들의 취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근원적으로 원인을 찾아서 개혁을 해야 한다"면서 "바로 민주적이고 공정한 경쟁체제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것은 정치를 개혁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동시에 국방비로 인한 낭비와 고통을 줄이려면 분단상황을 극복하고 평화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4월 23일(현지 시간) 송두율 교수의 독일 베를린 자택을 방문하여 인터뷰를 했다. '남북정상회담 전망'을 중심으로 25일 보도한 1차 인터뷰 기사에 이어 '독일 교민사회의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2차 인터뷰 기사를 싣는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이다.

9개월 서울구치소 생활을 뒤로 하고 2004년 8월 2일 초대 '전교조' 위원장을 역임한 윤영규 선생(2005년 서거)의 안내로 망월동 국립묘지를 방문했을 때. 왼쪽이 송두율 교수.
▲ "망월동 참배" 9개월 서울구치소 생활을 뒤로 하고 2004년 8월 2일 초대 '전교조' 위원장을 역임한 윤영규 선생(2005년 서거)의 안내로 망월동 국립묘지를 방문했을 때. 왼쪽이 송두율 교수.
ⓒ 송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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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위주 경제정책 극복해야 일자리 생긴다"

- 부(富)가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계층이동이나 상승이 거의 불가능해졌으니 그렇게 된 겁니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교육도 차별적으로 받게 되지 않습니까. 결혼도, 취업도 끼리끼리 하지 않나요.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서울대생의 절반 이상은 시골 출신이었습니다. 칫솔 하나만 들고 상경하여 공부했습니다. 개발독재시대였지요.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 어떻게 해야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요?

"대기업 위주 경제정책을 극복해야 일자리가 생깁니다.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이 일자리를 다 만들어 준다고들 생각합니다. 삼성을 개혁하면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기업이 독점을 못하도록, 또 공정하게 경제가 운용되도록 해야 합니다. 튼튼한 중소기업의 뒷받침 없는 일자리 창출은 불가능합니다. ('강소기업'이 튼튼한) 독일의 경험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결국 사회 구조를 바꿔야겠군요.

"한국사회는 촛불혁명을 통해서 개혁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지요. 개발독재식 정책은 그 약효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재벌 중심의 경제로는 더 이상 힘들 것 같습니다. 삼성 문제가 이를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21세기에 걸맞는 정치와 경제 운용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여기에 젊은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참신한 아이디어는 물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겁니다. 통일 시대를 살아가야 할 청년들이기에 자신들의 삶과 연결된 통일 조국의 미래를 좀 더 고민해 보면 좋겠지요."

- 독일 상황은 어떻습니까?

"입시에 시달리는 우리 청소년과 독일 청소년을 비교하기는 어렵지요. 계층이동이 대학 졸업장에 달려있는 한국과 그렇지 않은 독일은 분명히 다릅니다."

- 오히려 독일은 개인주의가 강하지 않나요?

"한국에서는 개인주의를 종종 이기주의로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다릅니다. 개인주의는 사회적 책임을 전제로 합니다."

"독일 교민들은 고국의 참담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2017년 말,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테네리페(Teneiffe)에서.
▲ "테네리페에서" 2017년 말,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테네리페(Teneiffe)에서.
ⓒ 송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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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교민들 현황도 궁금합니다.

"1960~1970년대 미국 이민자는 주로 한국의 중산층 출신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독일은 광부와 간호사로부터 출발했습니다. 현재는 유학생들도 많고 기업체 주재원들도 있지만,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은 교민이 아니지요. 지금은 교민 2세들이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 독일 교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소개해 주시지요.

"1974년에 유신을 반대할 때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1974년에 55명으로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운동을 한 겁니다. 그 이후에 통일운동도 진행했습니다. 우리 세대는 분단과 독재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참여한다고 해서 당장 변화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국의 참담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지요."

- 주로 누가 주축이 되었나요?

"처음에는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지요. 귀국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서 유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간호사들과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쉽게 동참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뒤 간호사들이 영주권을 획득하고 그들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광산에서 일했던 일부가 민주화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영주 자격을 얻은 뒤 뭉쳐서 운동을 한 겁니다. 지금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소수지만 다음 세대에는 사라질 것 같습니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래도 교민 2세들은 한국 문제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지요."

- 독일교민들의 민주화운동이 다른 지역과 차별성이 있는지요?

"일본, 미국과는 다른 성격을 띠었지요. 재일동포들은 일본사회에서 민족적 설움을 느꼈기에 통일 지향적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민 생활이 안정된 교민들이 운동에 참여했지요. 독일은 가장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을 했습니다."

"민주화운동 하면서 생명의 위협 느낄 정도로 압박 받아"

- 민주화운동을 하시면서 어려움도 겪으셨겠지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압박을 받았습니다. 밤길에 나를 테러하고 달아나면 그만이었거든요. 내가 미국이나 일본을 방문해서 현지 인사들과 연대하여 반독재민주화행사를 해야 하다보니 집을 자주 비웠습니다. 그러면 제가 집에 있는지 현지에 갔는지 확인하는 전화를 걸어오곤 했습니다. 혼자 있는 아내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그들이 귀국해서 교수도 되고 하더군요."

- 학자 본연의 일에 전념하는 데에도 힘드셨겠군요.

"아무래도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하다보니 학문에 전념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가령 남북학술회의와 같은 큰 행사를 준비하려면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듭니다. 그 시간에 학자로서 더 많은 연구를 했을 거라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그런데 '조중동'과 일부 검사는 나를 '이북에서 돈받아서 잘 사는 가짜교수'로 매도하더군요."

-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셨을 때 독일 교민사회의 상황을 알려 주시지요.

"당시 <제2 독일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현장 상황을 보았습니다. 의식있는 교민들과 유학생들이 서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항의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거리 시위를 하고 현지 소식을 독일 언론에 널리 알렸습니다. 나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국 상황을 브리핑하는 일을 시작으로 광주의 진실을 알렸습니다. 전두환 군부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독일 사회에 호소했습니다. 그런데도 1981년 9월 말에 독일 바덴바덴 시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는 서울을 1988년 하계올림픽대회 개최지로 결정했습니다. 올림픽 경기가 정치 도구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것보다는 군부독재를 빨리 종식시키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데 더 열심히 나섰습니다."

- 독일교민들이 광주민주화운동 행사를 해마다 연다고 들었습니다.

"'광주를 잊지 말자'면서 운동을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점차 유럽의 여러 단체들이 한데 모여서 행사를 했지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행사가 올해로 29년째인데 해외에서 국내와 연계하여 이렇게 오래 광주 관련 행사를 한 사례가 없습니다. 올해 행사엔 김세균 명예교수(서울대학교 정치학과)도 베를린에 와서 강연을 합니다. 특히 정범구 대사(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관)가 독일 유학 시절에 당시 광주 항쟁 행사에도 참가를 하였는데 올해 행사에서는 그가 인사말을 한다고 합니다. (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가 광주민주화운동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민주화된 덕분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88올림픽 보이콧보다는 군부독재 빨리 종식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

아테네 국립고대박물관에 소장된 소크라테스의 흉상 앞에서(2017년 10월).
▲ 소크라테스 흉상 앞에서 아테네 국립고대박물관에 소장된 소크라테스의 흉상 앞에서(2017년 10월).
ⓒ 송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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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 선생님과의 인연도 궁금합니다.

"윤 선생님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내가 서베를린으로 이사 온 1977년 여름부터였습니다. 그분 자택이 베를린 서북쪽 외곽인 클라도우에 있었지요. 나는 베를린 남서쪽에 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시간과 기회가 닿는 대로 자주 만났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윤 선생님의 서울 방문을 추진하는 분위기가 있어 이를 전제로 여러 가지 방안을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1995년 11월 3일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이 남긴 많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발터-볼트강 슈파러를 중심으로 '국제윤이상협회'가 발족되어 꾸준히 시디(CD)와 연감을 발행하고 연주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뜻과 협회 측의 의지가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윤 선생님의 업적을 단순히 음악 세계 안에만 가둘 수 없고 분단된 조국의 한 쪽만 바라보는 기념사업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김대중씨와 김영삼씨가 1987년 대선에서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서 국민들에게 끼친 피해가 정말 큽니다. 김영삼씨가 먼저 대통령이 되고 김대중씨가 그 뒤에 하면 되는 건데... 그 후유증이 사실 너무 오래 갔습니다."

"촛불혁명이 지속 가능한 한반도 평화체제로 이어지길"

- 촛불혁명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촛불혁명은 87년 6월항쟁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6월항쟁은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권리를 쟁취한 겁니다. 촛불혁명은 직접 선거로 취임한 박근혜 정부의 불법과 비리와 무능을 보다 못한 국민들이 정치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특히 박정희란 휘광으로 이미지 정치를 한 박근혜의 실체를 국민들이 제대로 보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서 들고 일어섰다고 보시면 됩니다."

- 박정희 신화가 손상된 것이군요.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부패하고 무능했습니다. 한때 번듯하게 포장되어 있었으나 비가 오면서 포장이 찢어진 셈입니다. 국민들이 이에 실망하고 분노를 터뜨린 것이지요. '박정희신화'도 동시에 손상되었습니다. 박근혜 덕에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것입니다. '촛불혁명'이 남북 정상회담으로 연결되었으니 앞으로는 지속 가능한 한반도 평화체제로 계속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시민들이 보수 정치 세력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고 한반도의 평화의 문도 열었지 않습니까."


태그:#송두율, #경계인, #재독 철학자, #남북정상회담, #독일 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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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글쓰기 전문가. 스포츠조선에서 체육부 기자 역임. 월간조선, 주간조선, 경향신문 등에 글을 씀. 경희대, 경인교대, 한성대, 서울시립대, 인덕대 등서 강의. 연세대 석사 졸업 때 우수논문상 받은 '신문 글의 구성과 단락전개 연구'가 서울대 국어교재 ‘대학국어’에 모범예문 게재. ‘미국처럼 쓰고 일본처럼 읽어라’ ‘논술신공’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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