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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여덟 살 난 딸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모, 이모 집 좋아? 넓어? 어디 아파트야?"

뭐라고 답해야 할까. 질문의 의도를 물어볼까, 좋고 넓음의 기준을 되물어야 할까, 적당히 그래, 그렇다고 얼버무리면 그만일까. 고민하며 머뭇거리는 찰나, 친구가 능숙하게 아이와 우리의 화제를 동시에 바꿨다.

아이는 제 질문도 잊고 잘 놀다 헤어졌건만, 괜히 나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게, 좋은 집이란 뭘까, 넓은 건 얼마나 되어야 넓은 걸까, 아이는 왜 콕 집어 아파트를 물었을까. 괜스레 심란한 건, 아무래도 전세 계약기간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 테다.

"집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배태되는 가장 근원적인 공간이다. 그 공간은 공허한 지리적이고 정위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생활로 구성된 풍경적인 공간이다." (p8)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우리의 주거 형태 역시 급격한 변화를 겪어 왔고, 이에 따라 주택정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들이 드러나고 있다.

'대안사회를 위한 일상생활연구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집을 공간적 의미나 공급의 측면뿐만 아니라, 그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데 주목한다. <일상과 주거>는 집의 의미를 일상생활론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들여다보는 책이다.

<일상과 주거> 책표지
 <일상과 주거> 책표지
ⓒ 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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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이며 우주"(p17)라는 말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책에 따르면, 집은 사람이 거주하는 물리적 공간일 뿐만 아니라, 안정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집은 공동생활과 공통된 기억의 공간이며, 가장 사적인 공간이며, 꿈이 탄생하는 내밀한 공간이다. 또한, 집은 인간을 자연적 '생존'에서 문화적 '생활'로 이행시키는 사회화의 첫 번째 공간이다.

이러한 집의 정의에 적정 사이즈나 가격은 등장하지 않으니, 현대사회에서의 집을 말하기에는 너무 순진한 정의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것은 시작일 뿐, 책은 집의 기본적 기능은 물론 현대사회에서 그 형태와 의미가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자세히 조명하고 있다. 

책에 실린 통계를 재인용하면(p30), 2015년의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2.3%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의 자가주택보유율은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고 하니, 주거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집은 가장 유효한 재테크 수단이 되어버렸고, 이와 결을 같이 하는 '아파트 공화국'이란 말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아파트는 언제부터 우리 삶에 이렇게 깊숙이 들어왔을까. 1960년대 초반, 정부는 급속한 도시인구의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단독주택 위주였던 주택 공급을 공통주택 위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대한주택공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단위 단지 아파트인 '마포아파트'의 건설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국민의 재건의식을 고취하고 대내외에 건설상을 과시하며 토지 이용률을 제고하는 견지에서 평면확장을 지양하고 고층화를 기도했으며, 생활양식을 간소화하고 공동생활의 습성을 향상시키는 한편 수도미화에 공헌하여 근대문명의 혜택을 국민에게 제공함으로써 대북한선전의 효과를 도모하는 데에 두었다." (p48)


즉, 아파트는 체제의 선전수단이며, 국민 의식 개혁의 계기로 이용된 것이다. 이렇게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아파트는 처음부터 인기를 끌진 못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마당을 가진 단독주택을 선호했고, 1970년 와우아파트의 붕괴와 1971년 광주단지 도시 빈민 소요사건으로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더욱 확산된 것이다.

그러자 정부는 아파트의 고급화를 추구하며 서민이 아닌 중산층을 대상으로 아파트 공급정책을 바꾸게 되었고, 이때부터 대형 아파트도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소득층 주거로 탄생한 아파트가 중산층이 선망하는 주택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역시 아파트 건설을 촉진하고 재개발을 장려함으로써 이러한 현상은 심화된다.

"우리나라 주택문제의 특수성으로는 '아파트 공화국'으로 대변되는 독특한 주거 문화, 재태크 대상으로서의 집과 '복부인'과 '떴다방'이란 말로 상징되는 과다한 투기 성향, 폭력적인 재개발과 인권 유린, 주택 공급의 부족과 '내 집 마련의 꿈' 등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데, 이는 권위주의적 정부의 민간 자본에 의존한 주택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p66)


이후 1997년 IMF 경제 위기로 김대중 정부는 폭락하는 주택 가격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노무현 정부는 다시 폭등하는 집값을 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한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물량 공급 위주의 주택정책을 펴 이른바 '빚내서 집 사라'는 표현까지 나오게 된다. 이로 인한 가계 부채의 폭증과 주택 공급의 과잉은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남았다고 책은 분석한다.

2018년 대한민국의 집.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소원이며, 누군가에게는 재산 증식과 과시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책에 의하면, 현대 사회로의 이행은 모든 물건을 상품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집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집이 삶을 영위하게 하는 본래적 가치보다 사고 파는 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가 더 높게 평가되었다는 분석은 너무도 씁쓸하게 다가온다.

책은 급격한 산업화 및 물질 중심주의 아래 우리의 주거 문화와 환경이 올바로 정착되기 어려웠으며 집을 통한 구별 짓기, 즉 차별화 및 양극화 현상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임을 상세히 설명한다.

"한정된 공간, 그래서 그곳에선 권력과 차별의 꽃이 핀다. 그 꽃은 가지지 못한 자, 가질 수 없는 자들의 땅에서 그들의 피를 먹고 자란 꽃일지 모른다. 안정과 친화를 으깨면서 다수가 불행해질수록 더욱 비대해지는 꽃." (p185)


지면상 옮기지 못했지만, 책은 일상과 주거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싣고 있다. 현대 주거 공간에 도입된 과학기술, 교외로 떠나는 사람들, 주거 공간에서 벌어지는 소통과 갈등, 아파트 속 신생활풍속 등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만한 주제들이다.

국가의 주택 정책이 바른 방향을 향하도록 감시하는 것도 시민의 일일 테다. 동시에, 우리의 집에 대한 관념을 돌아보는 것도 한 번쯤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게 필요한 것을 갈망하는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는 않는지, 집이란 정녕 무엇인지. 또한, 완벽히 홀로 살 수 없는 인간인 이상, 내가 아닌 '우리'를 생각해 보는 것 또한 해 볼 일이다.

"자, 지금부터라도 집의 '소유'를 넘어서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집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와 진솔하게 만나는 시간을 갖자. 조작된 욕구로 집의 허상을 소비하는 수동적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구분과 차별의 경주를 멈추기 위하여. 너와 내가 '함께' 웃기 위하여." (p186)


일상과 주거

대안사회를 위한 일상생활연구소 지음, 한울(한울아카데미)(2018)


태그:#일상과 주거, #대안사회를 위한 일상 생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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